• '친숙한 일상'과 '거대한 악'
    [논술에서 배운다-2] 불편한 것을 불편해 할 때
        2014년 12월 09일 02: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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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술에는 삶과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문제들이 꽤 있다. <말글 칼럼>을 써왔던 우한기씨가 이 주제들에 대해 묻어두기 아까워 하나씩 꺼내보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논술에서 배운다>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대학 입시용이 아닌 거기에 묻어 있는 시대의 흐름과 고민을 살펴보자는 것이 필자의 고민이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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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정말로 독일인들이 대학살을 보지 못했을까?”,

    “만약 그걸 알았다면 왜 그들은 그 끔찍한 일들을 방관했을까?”,

    “대체 독일인들이 그걸 외면해서 얻은 이익은 뭘까?”

    정말로 익숙한 것에 현혹되었다면 ‘모르면서 저지른 죄’가 되지요. 그렇다면 ‘나치즘을 낳고 키우고 지지하며 거기서 이익까지 얻었다’는 말은 지나치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그럴 것 같으면 이런 글 쓰지도 않았겠지요? (나) 시랑 닿지도 않구요. 따라서 단순히 ‘현혹되었다’고만 하면 필자의 의도에 제대로 가 닿지는 못한 꼴이 됩니다.

    포인트는 ‘익숙하고 친숙한 일상’에 있습니다. 그것이 거대한 악을 낳은 토대라는 거죠. 자, 문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는 예, 이를테면 ‘왕따’를 생각해봅시다. 그게 부당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그런데도 외면합니다. 왜 그렇지요? 여기에 ‘친숙한 일상’을 집어넣어 보시죠. 그러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겁니다.

    질문을 살짝 바꿔보지요. 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뛰어들지 않지요? 그 문제를 고발하고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그걸 실천할 때 가장 걸리는 문제가 뭐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내 친숙한 일상이 깨어진다는 겁니다. 늘 즐기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더는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 외면하고 방관하여 얻은 이익이 뭔지도 대충 알 만합니다. 그렇지요. 내 일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처음엔 좀 불편하겠지만 일상으로 들어가 이윽고 잊어버리게 되지요. 독일인들이 수용소 담벼락에 쓰인 익숙한 표어만 본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일 테죠. 가령 G20한다고 노점상을 몰아내면서 ‘거리정화’라는 표어를 내걸면 ‘그렇지, 깨끗한 게 좋지.’ 하는 식이죠.

    이제 (나)도 읽을 만합니다. ‘아름다운 꽃밭’에 있는 ‘아름다운 꽃’, 누구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왜 거기 ‘살의’가 깃들까요? 바로 그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답지 못하다 여기는 풀들은 제거된다는 거지요. 잡초들 말예요. 그렇게 뽑아서 죽이면서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니까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잡초를 태우며’를 보면 참 잘 다가옵니다. 잡초가 된 유태인, 삼청교육대들은 마땅히 없애야 할 대상이지요. ‘어여쁜 말’도 마찬가집니다. ‘모난 말’들, 고통 받는 목소리나 현실을 고발하는 말들은 불편하지요. 그래서 지우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런 사회가 썩기 쉬운 사회가 된다는 거지요.

    <예시답안>(300자 내외)

    (가)는 ‘평범한 악’을 고발한다. 친숙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악을 외면하는 사이 대학살이 버젓이 자행된다. 만약 그 악을 비판할 것이면 편안과 안전이 파괴될 것이기에 소시민들은 악의 무리가 포장해놓은 예절규범 따위만 쳐다보면서 비겁을 숨긴다.

    (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미적 감각을 경계한다.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기 위해 무수한 ‘잡초’를 태연하게 뽑아버리지 않던가. 말도 그렇다. 번드르르한 말만 좋아하는 풍토에서는 그렇지 못한 말들, 고통 받는 목소리나 현실을 고발하는 말들은 제거된다. 그것은 획일적인 질서를 낳고, 이윽고 사회 자체가 썩어버리고 말 것이다.(318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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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문제>2008학년도 숙명여대 정시

    ※ (가)의 내용을 바탕으로 (나)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서술하시오.(300자)

    (가)

    독일어를 쓰는 것, 소시지를 좋아하는 것, 라인강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등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친숙한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 중 무엇인가가 나치즘의 기반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고 한번쯤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치즘을 낳고 키우고 묵인하고 지지하며 그것에서 이익까지 얻은 독일 국민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치욕감, 그 감각에 가능한 한 민감할 필요가 있다.

    …(중략)…

    수용소의 막사에는 “정직은 인생의 보물”, “웅변은 은, 침묵은 금”, “이 건물 안에서는 모자를 벗을 것” 등의 표어가 걸려 있었다. 세면장 벽에는 “햇빛과 공기와 물은 너희의 건강을 지킨다.”라고 씌어 있었다. 강제수용소 시스템의 최고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좌우명도 “무엇을 하든지 예절 바르게”였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예절 바르게 대학살을 수행했다. 미증유의 범죄행위를 실행한 개개의 범죄자들 배후에는 그것을 지지하고 그것에서 수혜 받으며 이를 묵인한 대다수 ‘독일인’이 있었다.

    (나)

    꽃은 누구에게나 아름답습니다

    호박꽃보다야 장미가 아름답고요

    감꽃보다야 백목련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우아하게 어우러진 꽃밭에서

    누군들 살의를 떠올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의 적이 숨어 있다면

    그곳은 아름다운 꽃밭 속일 것입니다

    어여쁜 말들을 고르고 나서도 저는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모나고 미운 말

    건방지게 개성이 강한 말

    서릿발 서린 말들이란 죄다

    자르고 자르고 자르다보니

    남은 건 다름 아닌

    미끄럼타기 쉬운 말

    찬양하기 좋은 말

    포장하기 편한 말뿐이었습니다

    썩기로 작정한 뜻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에도

    몹쓸 괴질이 숨을 수 있다면

    그것은 통과된 말들이 모인 글밭일 것입니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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