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소수자와 진보정치 10년
    2011년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까지를 중심으로
    By 토리
        2014년 11월 25일 02: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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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에 <세계 LGBT 운동의 역사> 칼럼을 게재하고 있는 토리님이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와 성소수자들의 정치에 대한 짧은 역사를 돌아보며 평가와 소회를 담은 글을 보내왔다. 그 이전과 이후의 역사 또한 짚어지고 평가를 해야 하지만 토리님의 경험이 2011년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까지의 활동에 집약되어 있어서 그 시간대로 한정하여 서술되었다. 이후 다른 사람에 의해 2011년 이후의 역사와 평가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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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활동 정리 및 사건… 등등. 설립 과정의 우여곡절, 성소수자 정치의 전망’라는 내용을 글로 쓸 것을 정혜연 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장님으로부터 부탁받았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을 소위 역사화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내가 당시 성정치위원회에 참여했던 이의 대표 자격으로 지금에 와서 정리하는 것도 가당치 않는 얘기이다. 토크쇼란 분위기에 맞추어 간략한 에세이로 풀어내는 것이 맞을 거라 생각한다.

    1.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의 출발은 2008년 최현숙 국회의원 후보 선거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거 하나만이 돌출적인 사건으로 빅뱅처럼 하나의 기원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전의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분당 맥락이 있었고,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맥락과 역사가 있었다.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는 성소수자 운동과 정당이 함께 했던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때 같이 하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은 최현숙 선거를 ‘계기’로 진보신당에 가입하고 성정치위원회를 만들게 된다.

    그렇다면 왜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이었을까. 분당 국면에서 새로운 인원의 확충, 공간의 열림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요청을 받아 용역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 자체와 관련을 맺으면서 활동하는 걸 두려워하기도 했다. 새로운 활동 공간은 목말라 했으나 민주노동당은 일단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최현숙 선거를 준비한다는 얘기는 여러 차례 들었으나 내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당에서 먼저 꾸리면 도와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준비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얘기만 들은 상황이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2007년 말 차별금지법 싸움, 보수 정권의 탄생부터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권 말(보수자유주의 정권 말)에 보인 여러 가지 정황적 한계, 그러면서 가시화된 후퇴, 그래서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2007년 말에 집적되었던 것 같다. 분당은 더 큰 붕괴와 열림의 느낌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차별금지법 싸움이 일단락된 후 갔던 성소수자 운동 캠프에서 현숙 언니가 눈물을 보여서 선거에 같이 합류하기로 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당시 현숙 언니가 당에서 (혹은 외부에서) 무엇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마음이 몸과 느낌으로 전달되었던 것 같다.

    민주노동당을 같이 하던/하지 않았던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서 선거 캠프를 구성했다. 그러나 상황 및 조건과는 별개로 당과 성소수자 운동의 결합은 순탄치 않았다. 이는 월간 <사람>에 기고했던 졸고 <최현숙 선거를 다시 생각한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소수자 정치세력화의 의미를 되새기며’>에 간략하게 정리한 바 있다.

    “최현숙 선거운동은 이러한 성소수자 인권운동 내 고민들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단순히 소수자를 ‘인정’하라가 아닌 왜 소수자를 어떤 공간의 대표로 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선거라는 공간에서 대표성을 경쟁함으로써만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한편으로 레즈비언 등 성소수자가 아닌 다른 정체성의 피선거인이 선거에 나섰을 때에는 한 번도 질문된 적 없는 질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최현숙 선거를 준비하면서 선본 구성원들은 다시 기존 민주주의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왜 이성애자, 혹은 비장애인을 대표로 세우는가? 기존의 대표성을 표방한 정치인들이 얼마나 우리의 이해를 대변해낸다고 담보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오히려 일반적인 기존 선거의 장에서 ‘대표’를 세운다는 것은 이성애자 남성, 혹은 비장애인의 것으로 ‘사고’되는 인구 만의 대표를 선출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 외의 존재들은 ‘정치의 장’에서 추방되어야만 민주주의 절차의 규범성이 마련되는 것이 아닌가?”

    혁명적 열의와 질문을 던지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으나 중반 이후에는 ‘후보를 각인시키기 위해 후보를 비롯한 수행원들은 ‘깨끗한 여성 정치인 최현숙입니다’라는 인사말을 반복하기도 하’는 상황 속에서 일부는 회의를 보이고 돌아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라는 문구를 처음으로 내세웠다는 감동들이 진하게 남았다. 그 내용은 연분홍치마의 다큐멘터리 ‘레즈비언 정치도전기’에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선거가 끝난 후 평가에서 ‘그냥 참여했다가 너무 감동이 남아서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분위기에서 ‘엎질러진 물’이라고 남은 사람들의 모임을 이름 붙였다. 2010년에는 지방선거를 통해 정말 당선되자고 입을 모았다. 그 모임을 시작으로 주로 선거 토론회, 백서 모임을 하자고 했다. 모두 다 진보신당에 가입하진 않았지만 가입한 사람들 중심으로 평가를 조금씩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 중 진보신당에 가입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성정치기획단 제안서를 2008년 5월에 작성했다. 왜 성소수자위원회가 아닌 성정치기획단인가는 제안서에 잘 정리되어 있다.

    “우리는 이번 선거를 통해서 성sexuality이라고 하는 것이 여성이나 성소수자 등 일부 인구 집단만의 의제가 아님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성은 노동과 생태처럼 우리 사회의 지배 질서가 ‘우리’ 모두를 통제하고 통치하는 것으로서 정치의 핵심입니다. 한편에서 성을 통하여 지배질서는 고전적으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분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경계를 가로지르며 승진이나 임금, 소비와 욕망을 따라 우리를 포섭하기도 하고, 배제하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를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이 지레 생각하는 것처럼 성정치가 노동정치나 생태정치와 별개로 동떨어진 주제가 아니라 지배질서라는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시절에 겪었던 것처럼 성정치가 ‘여성과 성소수자’들의 문제로만 게토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 자체가 보다 더 급진적으로 재구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판단입니다.”

    이를 위해 우선 ‘신자유주의와 성정치’, ‘신자유주의와 계급화된 젠더’,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주의’ 등의 일련의 강좌를 기획했다. 부모를 위한 성교육이나 HIV/AIDS 강좌 두 가지로 나누어서 강좌를 진행하기도 했다. HIV/AIDS 강좌는 HIV/AIDS 인권주간에 맞추어 진행했고 관악과 마포 당협과 함께 에이즈의 날 사업을 조직하자고 결의, 당협과 함께 거리에서 캠페인을 진행한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다.

    2008년은 촛불 국면이 진행 중이었다. ‘찢어진 콘돔’으로 퀴어문화축제 때 문구를 들고 나갔다가 이런저런 말을 듣기도 했다. 당 내에서는 촛불과 함께 진로 논쟁이 한참이었고 진보신당 여성 당직자들에게 쏟아지는 성폭력적 움직임에 대해서 반대 흐름을 만들어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선거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잊히고 모임이 약간 느슨해진 상황에서 다시 사람들이 결집하게 된 계기는 제2창당에 대한 개입과 최현숙 부대표 출마 선언이었다. 당 여성 부대표로 출마하면서 최현숙은 무지개정당을 표방했고, 우리가 최현숙 선거를 진행하면서 꿈꿨던 당 역시 이번 계기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결과적으로 준비했던 이들의 입장에서는 아깝게 떨어졌는데, 이 역시 성정치기획단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변곡점이 되었던 것 같다.

    부문대의원, 부문위원회 인준 과정 또한 선거 전후로 진행되었는데, 앞서 기획단 제안서처럼 의제 중심의 위원회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여성위원회와 성평등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자는 제안을 먼저 했었다. 그러나 이 역시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성정치위원회의 문제의식이 여성이라는 인구 집단과 별개로 여전히 성소수자 인구 집단의 문제로 이해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2009년 2월 첫 총회를 개최하고, 4월에 대구 퀴어문화축제 행사를 처음으로 당시 갓 가입한 대구의 열성당원 배진교를 주축으로 개최했다. 2009년 성정치 워크숍을 통해 진보정당과 성정치, 동네에서의 성정치 등을 다루었으며, 당협과의 연결 경험에 많이 고무되어 각 당협과 돌아가면서 성정치 월례토크를 진행하였다.

    서울시당을 중심으로 비이성애자 당원 협의회를 구상하기도 했는데 결국은 성정치위원회 주변의 퀴어당원모임을 꾸리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LGBT 인권포럼에서 성소수자와 정치 섹션을 맡아 어렵게 진행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 해 11월 위원회가 인준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현숙 언니는 하방하고 나는 위원장, 두영은 전국위원, 오김은 2010년 지방선거 후보를 결의했다.(돌이켜보면, 전국위원이 위원장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0년 상반기는 SPA 강좌 진행, 지방선거 준비 및 오김 선거 후원 등으로 활동했던 것 같다. 그간 활동을 보며 열성적으로 결합한 당원들과 함께 레디앙에 <성정치-치명적 매력>이란 제목으로 기획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사실 소수의 집단이었고 당 내 일부로부터는 인정받았으나 그 외에서는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활동 자체도 쉽게 성소수자 대중 일반에게 다가가기는 어려웠지 않았나 싶다. 뭔가 특이하고 이론도 겸비하고픈, 혹은 열정도 가진 집단으로 어필했는데, 정당의 외부적 이미지도 한몫 했을 걸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 내부 정치학에 깊게 몸을 담은 것은 빨라야 2010년 하반기 때부터였다. 지방선거 이후 통합 논쟁이 불거지면서 좋든 싫든 논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최현숙

    2008년 한국 최초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진보신당 최현숙씨의 홍보 현수막

     2.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 공간’이란 이미지가 아닌 ‘열린 대중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민주노동당이 아닌 진보신당이란 곳을 선택했지만 현실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통합 논쟁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겹쳐 있었고, 이는 지도부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일부 당원의 반여성주의 정서가 반 지도부-평당원 중심의 이미지와 연결되었고 반낙태-반여성주의의 기치를 내건 ’공동체 가치 실현’과도 같은 그룹도 만들었다는 점이다. 진보정당에서 도저히 용인될 수 없을 거라 느꼈던 극우적 의견그룹과 소속 당원들을 하나의 의견그룹처럼 받아들이는 이들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래도 성소수자의 일이라면 선뜻 제스처를 취해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성정치위원회가 취해야 할 자세에 관해 진지하게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성정치위원회 멤버들보다 더 게시판에서 설전을 벌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당내 의견그룹들에게 분노했다. 겉으로는 이러한 극우적 의견그룹의 행태에 더 분개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실제 들어가 보면 그에 맞선 행동 하나를 하지 않는 이들도 꽤 있었다.

    성정치위원회가 해야 할 몫이 분명히 있었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게시판 논쟁들을 해 나갔다. 그 후과는 만만치 않아서 이후 당 내 반여성주의 그룹에 심하게 대립한 사람들에 대해 스토킹과 같은 폭력들이 온라인으로 번지기도 했다.

    왜 당 통합 논쟁 가운데 반여성주의의 양태가 분명히 도드라지게 된 걸까. 내가 나온 후의 당 재편, 세력 분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당 활동가들에게 순결주의적, 도덕주의적, 평당원(민중)에 대한 열정을 강요하는 집단일수록 이러한 극우적 액팅 집단과 더 잘 관계 맺게 된다. 이들에게 여성주의는 관료적인 리더들이 평당원을 몰아내려는 음모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남성성과 온라인 문화’라는 월례토크 발제문에서 잠깐 적은 바 있다.

    “진보신당의 온라인 문화에서의 남성성/반여성주의는 어떻게 구축되는가. 과거 민주노동당에서도 여성주의에 대해 호의적인 분위기는 별반 없었고 당시에는 기본적인 젠더 인지적인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몰성적 태도들(알고 보면 남성 중심적 태도들)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의 여성주의를 둘러싼 싸움들은 주로 정파 간 알력구도와 싱크로를 이루며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현재 진보신당 온라인 문화에서 구축되고 있는 남성성/반여성주의는 기존의 정파 구도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소위 ‘평당원’들이라고 불리우는 이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 전개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새로운 진보신당이란 영토가 생겼을 때, 온라인 공간이 구축되었을 때 이미 그 공간의 정체성을 둘러싼 목숨 건 전쟁이 예고되었고, ‘누가 그 이름을 전유할 것인가가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핵심’인 것이다.

    이 영토는 소수 지도자에 대한 팬덤으로 구축된 노빠들의 공간인 국민참여당이나 정파 질서에 의해 질서가 암묵적으로 유지되는 민주노동당과 다르다. 이 영토는 기존 정파 질서가 실패한 정치 공간을 누가 ‘올바른 진보정치=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전유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이는 왜 ‘평당원’이라는 기표가 온갖 당게시판 내 전쟁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나 스스로는 그렇게 판단했지만 ‘이 당이 아니다’라고 하기까지는 많이 망설였던 것 같다. (나 역시 순결주의적 사고를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직접적인 사유로는 당 통합을 논했던 입장에서 통합이 부결되면서 동력을 잃었고, 중앙당 직속의 활동가로 위치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컸다. 퀴어 당원 모임이 하나의 실체로 탄탄하게 있었으면 좀 더 나았을까? 지역당협 구조에서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당협 외 온라인 당협을 따로 두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별반 들지 않는다. 성정치라는 슬로건이 중앙당 이외에 집단적 실체로 존재하기 어려웠다는 평가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당이 아니다’라는 판단까지는 무엇이 필요한 걸까. 진보 노선과 입장 차이와 자신의 성소수자 운동 노선과는 어떤 관련을 맺는 걸까.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에서 성소수자 정치를 온전히 구현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했었지만 그건 정파 구도가 사라진 진보신당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보정당 내에서조차 성정치 정치 집단들에게 타협이나 대립, 적대의 정치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어느 선까지 의견 차이,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어느 선까지 협상하며 어느 선까지는 절대 타협할 수 없고, 존재의 가치를 버리지 않았다고 판단할 것인가. 여전히 어려운 숙제이다.

    여전히 당 운동은 성소수자 운동에서 중요한 공간이다. 해외에서는 진보정당과의 파트너십 없이 성장하고 권리를 일군 역사가 드물다. (미국은 92년 이후 민주당과의 파트너십이겠지만) 국내에서도 정당정치와의 경험을 통해 당 내외 구성원/지역주민들과 집약적인 교류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유용성, 필수성, 필연성 이외의 판단 근거가 있을까. 정당이 성소수자 활동가 개인의 취향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다만 복수의 진보정당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힘들을 함께 키우는 지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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