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가지 시선,
    홍콩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2014년 11월 07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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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의 격렬한 시위와 중국의 대응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이번 시위의 배경에는 홍콩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엇갈려 있다. 이러한 내면의 시각, 홍콩의 과거 현재 미래를 어떻게 규정하고 모색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결국 문제의 핵심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로 상이한 세 개의 시선을 담은 책이 발간되었다. 이 세 개의 시선을 비교하면서 분석한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43, No. 1, November 3, 2014.>에 실린 훙호펑(孔誥烽, 존스홉킨스대학)의 글(원문 링크)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는 우동현씨가 번역하여 게재한다. 다소 길지만 홍콩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에게도 주는 적지 않은 시사점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일독을 권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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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첸관중(陳冠中), 『중국의 천하주의와 홍콩』(中國天朝主義與香港), 홍콩: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2012.

    첸윈(陳雲), 『도시국가 홍콩에 대하여』(香港城邦論), 홍콩: 인리치(Enrich) 출판사, 2011.

    챵시공(强世功), 『중국의 홍콩: 문화와 정치의 관점』(中國香港—文化與政治的視野), 홍콩: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2008.

    홍콩의 세 가지 지역의식(1)

    최근 홍콩은 혼란스러웠다. 2003년 시위에는 50여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여 23조 반(反)전복 활동법의 입법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2) 2012년에는 13만 명이 시위를 벌임과 동시에 학생들이 총파업으로 위협함으로써 베이징은 홍콩의 학교에 대한 국가교육과정 시행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시위는 베이징이 중국 본토(이하 ‘본토’)에서 되풀이하듯 홍콩의 이의제기를 손쉽게 엄단(嚴斷)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저항의 승리는 홍콩의 반대세력과 베이징이 근본문제에 관해 기꺼이 타협하도록 만들었다기보다, 오히려 양측을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2012년 중국정부는 전통적으로 베이징에 협력하는 일부 홍콩 토호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경파인 렁춘잉(梁振英, 1954~)을 행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홍콩의 상대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반대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중국정부가 이를 다루기 위해 더욱 가혹한 수단을 쓸 준비를 마쳤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연례적인 7월 1일[홍콩 반환일-역자 주] 시위와 2012년 1월 1일 시위에서 영국 깃발 또는 영국령 홍콩 깃발이 등장했고 이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깃발에는 본토의 관광객들을 공격하는 표어가 실렸고, 때로는 “중국인 식민주의자들”이라는 문구도 있었다.

    우1

    홍콩 시위에 나타난 영국기와 영국령 홍콩 깃발

    베이징과 친(親)정부 성향의 관측자 대다수는 강한 지역적 정체성, 심지어는 친독립적 성향이 대두했다고 느꼈다. 베이징의 통치를 분명히 거부하는 정치적 선언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의자와 반중(反中) 청년들 또한 직접적이고 전투적인 행동을 주도하였다.

    일례로, 지역의 일상용품과 그 중에서도 유아용 유동식(流動食)의 공급을 지켜내기 위해 본토 관광객의 밀반출을 방해하는 시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에드워드 톰슨(E. P. Thompson)의 저명한 논문인 “18세기 영국 군중의 도덕경제”에 나타난 근대초기 유럽의 식량 폭동을 떠올리게 한다.(3) 지역주의적 시위는 또한 홍콩정부를 압박하여 공공병원체계에 부담을 주는 본토발(發) 출산 여행을 제한하게 하였다.

    최근의 여론 조사 결과는 홍콩 거주민,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급증한 반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해졌음을 보여주었다.(4) 홍콩 지역의식 급격한 분출은 베이징을 거슬리게 하지만은 않았다. 이러한 지역의식은 또한 1980년대 이래 홍콩을 중국식 자유화와 민주화의 화신(化身)으로 보는 담론, 즉 홍콩의 반대운동을 역사적으로 지배했던 중국식 민족주의 담론에서도 벗어나는 중이다.

    챵시공(强世功)·첸관중(陳冠中)·첸윈(陳雲)은 최근 저서에서 각각 베이징, 중국의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 홍콩의 지역 젊은이의 관점에 입각하여 홍콩의 지역의식 문제를 살폈다.

    챵시공의 책은 제국의 중심부인 베이징이 중국인 엘리트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의 핵심으로서의 홍콩에 대하여 점차 발언을 늘려가는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줬다.

    첸관중과 첸윈의 책은 챵시공의 명제에 명백히 이의를 제기하며 홍콩에 대한 베이징의 신제국주의적 자세를 강하게 반박하였다. 첸관중의 작품이 본토의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견지에서 쓰였다면, 첸윈의 대답은 홍콩 자체의 관점을 천착하며 밀물처럼 거세지는 홍콩의 지역주의적 이념과 행동을 반영하였다.

    제국의 입장에서 홍콩 바라보기

    1990년대 미국의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중국의 신좌파는 최근 수년간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사상,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및 나찌의 법 이론가 칼 슈미트(Carl Schmitt), 유교 등 서로 명백히 상충되는 지적 계보의 결합을 옹호하는 기이한 지적 대형(隊形)을 갖추게 됐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지식인 연합체가 점점 더 억압적으로 바뀌어가는 당국(黨國)체제와 공모하거나 공공연히 협력했다고 비판하였다.(5)

    챵시공은 바로 이 연합체에 속한 지식인 중 하나이다. 그는 신(新)마오주의자로,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맹렬히 비판함과 동시에 문혁 기간 수행된 “대(大)민주주의”의 실험을 그르게 비난하고, 민주주의에 관한 중국 고유의 담론을 박탈하며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홍보하는 서구 앞에서 벙어리가 됨으로써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조바심을 쳤다. (챵시공, 2008: 187~8)

    동시에 그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실천 및 주권의 절대적 결정이며, 그것들은 또한 법리적 권위와 입법적 권위에 앞선다고 본 칼 슈미트의 법철학을 소개한 핵심 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챵시공은 2004~2007년의 기간 동안 홍콩 내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사실상의 본부인 중앙인민정부 주홍콩연락판공실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홍콩에서의 근무 중일 때와 그 이후에도 홍콩 문제 및 부흥하는 유교제국 중국에 대하여 홍콩이 가지는 중요성에 관해 논한 일련의 글을 베이징의 월간 잡지 『독서』(讀書)에 냈다. 앞서의 책 『중국의 홍콩: 문화와 정치의 관점』은 그의 글들을 모아 펴낸 것이다.

    그의 견해는 신좌파 가운데서 그렇게 독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북경대 법학대학 부학장(Associate Dean)이면서 동시에 주홍콩연락판공실에서의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권력의 중심부인 당과 긴밀한 관련 속에서 홍콩 문제에 관해 세간의 이목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챵시공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정책이 1997년 홍콩의 반환을 가능케 한 뛰어난 방식이었으나, 막상 이 정책은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 문제 중 가장 중요한 사안, 즉 홍콩 사람의 정체성 문제를 다룰 순 없다고 주장하였다.

    챵시공은 홍콩 사람의 정체성 문제에 관해서는 법리적 수단보다는 정치적 수단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며, 베이징은 홍콩 거주민을 진정한 중국의 애국자로 변모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일국양제”라는 틀 너머를 사고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렇지 않는 한,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은 공식적일뿐 결코 실질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챵시공은 홍콩 사람 대다수가 1950년대 이래 사회주의 모국을 받아들였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심지어는 영국에 협력한 홍콩계 중국인들마저 본질적으로는 애국적이었는데, 이는 몇 세대 뒤로 거슬러 올라가는 본토와의 가족적 유대 때문이다. (챵시공, 2008: 142~45) 그렇다면 중요한 과업은 바로 홍콩계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애국주의를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식민통치 기간 영국인들이 기민히 움직여 홍콩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얻게” 됐는데, 챵시공은 베이징은 이러한 영국의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챵시공이 “마음과 정신을 얻다”를 “세뇌영심(洗腦迎心)”, 즉 문면 그대로 “뇌를 씻고 마음을 얻는다”로 옮기면서 영어 원문의 본뜻을 탈각시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챵시공, 2008: 31)

    챵시공의 명제는 모든 홍콩계 중국인들이 본질적으로 “즉자적 애국자”이면서 베이징의 애국적 전위대를 통하여 “대자적 애국자”로 변모되길 기다리고 있다는 주장에 버금간다. 이 명제는 홍콩에서 베이징의 이념 공작이 지역적 정체성을 극복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제안한다. 돌이켜보면, 챵시공의 진단은 그의 홍콩 부임 이후 나온 베이징의 2012년 안건, 즉 홍콩의 모든 학교에 강제적인 국가교육과정을 도입하려는 시도와 잘 맞아 떨어진다.

    챵시공은 “일국양제” 방식은 그 기원이 1951년 티베트를 두고 베이징과 달라이 라마 정부 사이에 체결된 “십칠조협의(十七條協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는 홍콩의 반환을 예측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제국 중국의 부흥의 전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챵시공, 2008: 123~58)(6)

    챵시공에 따르면, 중화제국은 청조(淸朝, 1644~1911) 때 절정에 도달했고, 유교문명의 진원지이자 주변부를 끊임없이 핵심부로 통합하고 변모시키는데 기반을 두었다. 청 황제는 새로이 통합한 지역의 엘리트에게 독특한 관습과 지도권을 보장하고 지역적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물론 그것은 영구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제국의 중심부로 통합되고 문화적으로 동화되면서 지역적 자율성을 폐기할 터였다. 그 후 제국은 새로운 지역의 합병에 나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의 홍콩 통합과 함께 장래에 있을 홍콩의 동화와 종국에 가서 타이완의 통합 및 동화는 과거 중화제국의 팽창주의와 비슷한 21세기의 팽창주의적 감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챵시공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홍콩에 대한 “일국양제” 정책은 단지 전술적이고 과도적인 방식에 불과하다. 홍콩을 기다리는 것은 1959년 이래 티베트가 처했던 운명, 즉 베이징이 주도하는 무력에 의한 흡수와 직접적이고 엄격한 통제라는 것이다.

    챵시공은 책 전반에 걸쳐 “제국”이라는 용어에 긍정적인 함축을 담아 쓰길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되살아난 중화제국은 영국제국의 통치술에서 배워야 한다고 규정하기까지 하였다. 챵시공이 홍콩을 논하면서 마오쩌둥사상, 유사 파시즘, 제국주의를 한꺼번에 수용하는 것은 결코 이례적이지 않다. 이는 오히려 홍콩에 대하여 발언을 늘려가는 중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홍콩 바라보기

    첸관중의 『중국의 천하주의와 홍콩』은 홍콩을 바라보는 챵시공의 견해에 대한 명백한 응답이다. 이 책에서 첸관중은 홍콩의 역사 및 홍콩·중국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책의 반절을 할애하여 챵시공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첸관중은 챵시공의 견해가 수년간 중국인 관료들 사이에서 오갔으나 결코 공개적으로 정식화되지는 않았다고 올바르게 관측하였다. 그는 그러한 견해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챵시공의 시도를 환영했는데, 이는 중국의 대(對)홍콩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따져 물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첸관중은 홍콩 베이비 붐(baby boomer) 세대의 상징적인 문화비평가로 활약하였다. 그는 상하이 출생으로 홍콩에서 교육받았으며, 1976년에는 홍콩의 문화적 사안을 다루는 전위적인 잡지 『호외』(好外)를 창간하였다.

    그는 10년 전에 홍콩에서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중국 내의 자유주의나 정치개혁에 관한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홍콩의 주류 온건 민주주의자들의 노선과 견해를 같이 하고, 베이징이 설정한 한계 내에서 점진적인 민주적 개혁을 옹호한다.

    챵시공에 대한 첸관중의 비판은 홍콩의 관점과 중국 자유주의의 관점을 고루 반영한다. 그는 챵시공이 문혁을 “대민주주의”의 사례로 끌어안고, 슈미트적인 정치관을 견지하며, 중화제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충격적이라고 파악하는데, 이는 챵시공을 비롯하여 신좌파, 또는 첸관중의 용어를 빌려 “우파 마오주의자들” 가운데 챵시공의 지적 동반자들이 파시스트적인 경향을 몸소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첸관중, 2012: 118~22)

    첸관중은 챵시공이 홍콩의 역사를 오독하고 왜곡하는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는 1950~60년대 홍콩계 중국인들이 중국을 따스한 마음으로 맞았다는 챵시공의 묘사를 순전한 날조라고 파악하였다. 사실 전후(戰後) 홍콩 인구의 다수를 구성한 본토의 중국인 이민자들은 공산주의 통치를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이었다. 홍콩 사람들은 대약진운동의 기근과 문혁 기간 동안 동포들이 홍콩으로 밀려들어오는 모습을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했고, 따라서 그들은 결코 자연스레 중국을 애호할 수 없었다. (첸관중, 2012: 7~10; 58~61)

    첸관중은 홍콩이 중국의 문화·정치적 발전에 대하여 단지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참여자라고 지적하였다.

    첸관중은 챵시공을 비판함과 동시에,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뤄진 중국의 자유주의적이고 입헌적인 개혁에 대한 홍콩의 기여를 개괄하였다. 19세기말 홍콩의 영향력 있는 신문 『순환일보』(循環日報, Universal Circulating Herald)를 창간한 지식인 왕타오(王韜, 1828~1897)는 홍콩과 본토의 문인들에게 개혁주의적인 생각을 고취시켰고,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가 이끈 19세기말의 입헌군주제적 개혁운동을 직접적으로 도왔다.

    한편 캉유웨이는 일찍이 홍콩을 여행했는데, 그는 그곳의 영국 식민당국을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통치체라고 본 바 있다. 1898년 개혁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홍콩은 혁명가들의 가장 중요한 피난처가 되었다.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孫文, 1866~1925) 박사의 부친을 포함하여 많은 수의 혁명가들이 홍콩에서 교육받았고, 유럽의 혁명적인 이론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첸관중, 2012: 14~21)

    우2

    홍콩의 손일선 박물관에 있는 손문의 동상

    바로 다음 세대의 중공 지도부는 홍콩을 본토로부터 분리했을 때의 효용을 인지하였다. 중공은 일찍이 1946년부터 홍콩을 돌려받지 않는다는 정책을 채택했고, 미래의 사회주의 중국에게 홍콩이 세계로의 창구 및 영국과의 외교 수단으로써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다. (첸관중, 2012: 42~46)

    중공은 심지어 마오 시기 동안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 식량과 식수를 조달하는 등 홍콩의 안정과 생존을 유지하는데 조력하였다. 첸관중은 그러한 정책을 통해 영국이 중국으로 기울 것이고, 따라서 냉전 기간 중국을 포위하고 있던 영·미 동맹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마오의 주장을 언급하였다. 홍콩은 또한 중국정부가 외화(外貨)와 세계의 정보를 흡수하는 통로로써 기능하였다. 중공에 대한 홍콩 사람의 혐오감을 제외하더라도, 쟝시공은 마오 시대의 중국에 홍콩이 매우 중요했다는 냉혹한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인식하길 거부한 셈이었다. (첸관중, 2012: 42~61)

    덩샤오핑이 홍콩 문제를 풀기 위해 “일국양제” 모형을 택한 것은 주권 이양 문제를 뛰어넘어 중국의 발전이라는 틀 안에서 홍콩의 특수한 역할을 연장하려는 시도였다.

    첸관중은 그러한 방식이 의도치 않게 중국의 정치적 개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홍콩반환협정(中英聯合聲明)과 기본법(香港基本法)에 쓰여 있는 “일국양제” 방식은 중국 영토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진정한 입헌주의 및 법치의 사례였다.

    따라서 홍콩의 실험이 내포하고 있는 입헌주의적인 속뜻은 지켜져야 하며, “일국양제” 방식의 입헌주의적인 성격을 실용적이며 임시적이라고 폄하하는 챵시공의 신제국주의적인 이론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첸관중에 따르면, 홍콩의 자율성을 지키는 일은 중국 내의 자유주의자와 보수적 국가주의자 사이의 거대한 싸움에서 하나의 전장(戰場)이나 다름없다.

    첸관중은 1997년 이후 중국에 대한 홍콩의 경제적 가치에 관해서 이 도시가 중국 내 다른 도시들에 비하여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베이징의 주류적인 설명에 동조하였다. 첸관중은 홍콩이 중국 내 다른 지역과의 통합을 심화해야 하고, 경제적 소외를 피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5개년계획에 포함돼야 한다는 관변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첸관중, 2012: 70~77)

    첸관중은 중앙정부가 심지어 본토의 후진적인 도시와 성(省)들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쉽게 폐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홍콩이 예전과 같은 경제적 특수성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은 여전히 “일국양제” 모형을 가볍게 파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홍콩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하며, 홍콩의 주권에 대한 베이징의 철의 결단(決斷)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홍콩 사람들은 베이징이 설정한 제한된 공간을 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의 권리와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첸관중, 2012: 70~82)

    국가주의자들의 맹공에 맞서 입헌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받아들여 지키는 식으로 “일국양제” 모형을 방어하는 첸관중의 논변에 중국 내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상당히 공명(共鳴)할 법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 일부는 명백한 모순이고, 현실이라는 시험 앞에서 유효하지 않다.

    우3

    1984년 덩샤오핑이 마가렛 대처에게 일국양제를 설명하고 있다.

    첸관중은 “일국양제”를 새로운 중화제국이 확장됐을 때 즉각 폐기될 우발계획 정도라고 폄하하는 챵시공의 입장이 베이징에서 세를 얻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지난 몇 년간 홍콩의 선거·매체·학계에 베이징이 직접적으로 간여한 결과, 베이징이 애초에 홍콩에 설정했던 자율성의 경계가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홍콩 사람들은 중국의 영향 하에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공간에 얌전히 머무른 채로 계속 그들의 자율성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 공간은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경계가 첸관중이 경고하듯 철갑(鐵甲)처럼 두텁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홍콩 사람들은 분명히 기본법이라는 틀에 반항하고 있지만, 베이징은 아직 홍콩에 대한 명시적 억압을 꺼려하고 있다.

    일례로, 홍콩이 기본법 하의 헌법상 시행해야만 했던 23조 반전복 활동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2003년의 군중시위 이후 베이징은 홍콩정부가 23조의 입법을 무기한으로 보류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한 저항은 베이징이 설정한 엄격한 경계를 위반하였는가? 그렇다면 첸관중은 그가 경고한 베이징의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가 그러한 위반을 용인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의 책에는 23조 반전복 활동법에 관한 논의뿐만 아니라 1989년 중국의 민주화운동에 홍콩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빠져있다.

    또 다른 사례로, 2012년 베이징의 국가교육과정 시행에 대하여 첸관중의 책이 출간된 직후 발생한 성공적인 대중저항을 들 수 있겠다. 홍콩에서의 시위가 견인력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주류 민주주의자들은 홍콩 사람들에게 국가교육과정을 반대하지 말고 차라리 이를 받아들인 후 개선하는데 집중하라는 식으로 첸관중의 감상만을 되풀이하였다.

    베이징이 계속 23조의 입법의 무기한 유예를 용인하는 사실은 홍콩이 보통의 중국 도시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는 첸관중의 주장과는 달리, 중공의 통치 하에서 홍콩의 자율성 및 “일국양제”가 여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상 중국이 인민폐(人民幣, 元)의 국제화를 통해 미국 달러에의 의존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홍콩의 독특한 역할은 중국의 금융 분야도 인정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이 달러를 국제화하고 지배적인 화폐로 만들기 위해 런던의 유로달러(Eurodollar)를 필요로 한 것처럼, 중국은 점차 강해지고는 있지만 아직 태환성(兌換性)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인민폐를 국제화하기 위해서 역외시장을 필요로 할 터이다.

    은퇴한 금융관료와 중국의 주요기업 및 국제적인 금융회사의 분석가들로 구성된 중국의 두뇌집단인 금융사십인논단(金融四十人論壇, China Finance 40 Forum)은 최근 발행한 보고서에서, 홍콩은 법치, 정보의 자유, 중국으로부터의 입헌적 분리 등이 보장될 때만이 대규모 역외 인민폐 시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7)

    실증적인 증거들은 홍콩이 보통의 중국 도시로 바뀌었고, 상하이나 다른 도시들에 밀린다는 얘기가 대부분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담론은 정치적 동기가 개입된 수사이거나, 또는 베이징이 국영기업과 인민폐의 국제화를 촉진시키는 역외시장의 중심으로서 홍콩을 이용하려는 필요에 지나지 않는다.(8)

    쟝시공의 제국주의담론에 대한 첸관중의 비평은 탁월하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권 행사에 맞서서 홍콩 사람들에게 그가 제안한 저항의 방식은 쟝시공의 수사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홍콩 사람의 입장에서 홍콩 바라보기

    첸관중의 책이 중국의 입헌주의적인 개혁에 관해 홍콩의 자율성이 갖는 효용을 강조하는 동시에 쟝시공의 담론을 비판했다면, 첸윈의 『도시국가 홍콩에 대하여』는 홍콩이 홍콩 사람에게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쟝시공에게 대답하였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열띤 공개토론을 촉발시켰고, 광범한 인기를 누렸다. 이 책은 라디오텔레비전홍콩(香港電台網站)이 주최한 홍콩 서적박람회에서 2011년 올해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됐고, 같은 해 말 출간된 이래 모든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등재됐다.

    저자 첸윈(본명은 첸윈근陳雲根)은 독일의 괴팅겐대학에서 민족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97~2007년 동안 홍콩특별행정구정부의 문화·예술·민사 관련 선임 고문을 맡았으며, 도시재개발 열풍이 불러온 지역공동체와 역사적 건축물의 파괴에 저항하는 선도적인 비판적 지식인으로 거듭났다. 첸윈이라는 필명을 쓰는 그는 여러 편의 신문 기고를 통해 홍콩과 중국의 부동산 토호 및 베이징의 홍콩 개입에 전투적으로 저항하는 젊은 급진주의자들을 열성적으로 지지하였다.

    첸윈의 견해에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홍콩이 중국을 필요로 하는 만큼보다 더욱 중국이 홍콩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이러한 사실이 과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사실이라는 점이다. 식민지기에는 필수적인 식량 때문에, 탈식민기에는 자본과 고객 때문에 홍콩이 중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했다는 식의 이해는 베이징의 홍콩 사람들의 자신감을 파괴하고자 선전으로 보인다.

    식민지 홍콩은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봉쇄 속에서 중국이 외화를 흡수하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였다. 홍콩이 식수를 공급받는 대가로 중국에 지불한 금액은 싱가포르가 자국의 식수 공급을 책임지는 기술이기도 한 담수화(淡水化)의 비용보다 훨씬 더 비쌌다. 시장경제로의 이행기와 경제의 국제화 기간을 통틀어 중국이 홍콩의 투자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현재, 중국에 대한 외국의 모든 직접투자유입 중에 홍콩의 투자비율은 놀랍게도 64%나 된다. (첸윈, 2011: 112~127; 135~140)

    1997년 이전까지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홍콩정부는 지역의 영국인·중국인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결탁하여 런던의 영향에서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고, 사실상 도시국가의 지위를 유지하였다.(9)

    첸윈은 1997~2003년의 기간 동안 베이징이 홍콩의 도시국가적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과도한 간섭을 참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은 23조의 입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홍콩전략을 급격히 바꾸었다. 아직까지 베이징은 전면적인 단속을 실시할 순 없으나, 경제회복 및 홍콩과 중국의 사회경제적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국가로서의 홍콩의 경계를 침식하기 시작하였다. (첸윈, 2011: 112~127; 145~63)

    이 계획의 핵심 정책 중 하나는 바로 본토발 홍콩 관광객을 대규모로 허용하는 것이다. 홍콩을 찾은 본토 관광객들의 숫자는 크게 증가했는데, 2012년 현재 홍콩을 찾는 연간 본토 관광객의 숫자는 3천5백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약 7백만 명에 달하는 전체 홍콩 인구의 다섯 배에 이르는 규모이다.

    홍콩정부는 중국정부가 발행한 홍콩 여행증을 소지한 본토 관광객을 거부하거나 규제할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본토 관광객이 급작스럽게 증가하자 홍콩 거주민과 본토인 사이의 갈등과 긴장도 증가하였다. 홍콩의 사치품점이나 일상용품점이 모두, 본토에서는 살 수 없거나 또는 홍콩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구입(수입관세 때문에)해야 하는 물품들에 대하여 더욱 많은 돈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는 본토 관광객 소비자를 우선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8년 본토에서 오염된 우유와 관련된 추문(醜聞)이 돈 후에, 중국으로의 조제유(調製乳) 밀반출은 본토 방문객 대다수의 부업이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홍콩의 몇몇 구역에서는 식료품과 의약품이 동나기도 하였다. 홍콩 사람과 본토인을 구분하는 사회적 관습의 차이(군데군데 일어나지만 이미 잘 알려진 새치기라든가 공공장소에서 용변 보기 등)는 논쟁의 주제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지역의 중공 산하 단체들 또한 본토의 이주민들 – 이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일일 150명 수준으로 “편도 사증(査證)”을 편무적으로 발급 받으며(공식적으로는 가족의 재회라는 목적으로), 홍콩정부의 사전 심사를 거치지 않는다 – 을 충성스러운 유권자 집단으로 조직하는 노력을 확대하였다. 1997~2012년 사이에 홍콩으로 이주한 새로운 본토 출신 이민자들은 전체 홍콩 인구의 약 10%를 구성하였다.

    친정부 성향 『문회보』(文滙報)의 편집자였던 언론인 청샹(程翔, 1949~)은 중공이 그러한 이주 기획을 통해 홍콩사회의 각계각층에 요원을 보냈으며, 남아있는 이주 한도는 종종 부패한 본토 관료들에게 판매된다고 쓴 바 있다.(10)

    홍콩 야권의 오랜 지도자 마틴 리(李柱銘, 1938~)는 그러한 이주 정책이 홍콩에서 자랐고, 홍콩의 핵심가치를 체화한 홍콩의 원주민을 소수로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홍콩을 티베트화 할 것이라고 보았다.(11) 2005~2012년의 기간 동안 홍콩의 행정장관을 역임한 도널드 창(曾蔭權, 1944~)과 그의 두뇌집단은 홍콩이 “인구의 수혈”을 필요로 하며, 지역민을 본토의 이주민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제안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중공(홍콩 내에 법적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 표를 매수하고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선거 전략을 통해 우호적인 후보에 대하여 새로운 이주민들의 표를 꽤나 성공적으로 확보했다는 사실 또한 널리 보도된 바 있다.

    첸윈은 본토의 관광객 및 이주민들의 대거 유입이 홍콩에 있는 기존의 제도나 사회적 관습에 심대한 위협을 제기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홍콩정부가 다른 모든 국가 출신 이민자에게 하듯이, 그리고 세계의 모든 정부가 그렇게 하듯이 본토발 이주민을 심사할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본토의 관광객 숫자가 반드시 축소돼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낙심천만하게도 홍콩의 반대운동은 이러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본토의 관광객이나 본토발 이주민을 심사할 수 없는 홍콩의 권한부족에 대한 불만을 “외국인 공포증”이라고 낙인찍었다. 심사권한이 없는 홍콩의 상황은 본토 출신 정착민들로 구성된 식민지와 흡사한데도 말이다. (첸윈, 2011: 150-63)

    친웬은 홍콩의 반대파가 홍콩과 중국 간의 경계 수호를 불편해하는 이유로 그들의 중국식 민족주의 이념을 꼽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홍콩의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중국을 꿈꿨다. 그들에게 홍콩의 민주화운동은 중국 내의 민주화운동에 부수적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홍콩의 반대파는 홍콩을 식민화하려는 베이징의 기획을 의도치 않게 지지하게 된다. (첸윈, 2011: 175-79; 51-54)

    첸윈은 그의 책에서, 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홍콩보다 중국을 우선시하는 풍조에 대한 답으로 아주 논쟁적인 의견, 즉 중국 내의 민주화는 절망적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중국의 민주화는 오로지 파시즘을 초래할 것이며 홍콩을 해친다는 것이다. (첸윈, 2011: 36-56)

    중국의 민주화를 바라보는 친웬의 음울한 시각은, 60년에 걸친 공산통치와 지난 30년 동안 지속된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적 호황 이후 과거 중국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며 인민들 사이에서는 신뢰를 북돋아준 크고 작은 전통들이 전멸했다는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국가가 무너진 후 남을 원자화(原子化)된 사회는, 적어도 그러한 붕괴 직후의 여파 속에서 건전한 민주적 제도를 함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풍경은 노골적인 파시스트 정치가 흥기할 수 있는 온상일 터이다.

    따라서 친웬은 주류 민주주의자들이 개진하는 “중국 우선”과 “중국과 홍콩의 통합” 대신에 “홍콩 우선”과 “홍콩과 중국의 분리”를 옹호한다. 그에 따르면, 홍콩을 겨냥한 중국의 신제국주의적인 접근에 맞서는 일과 홍콩의 반대운동을 중국의 민주화라는 더 큰 투쟁에 복속시키려는 중국 자유주의자들을 거부하는 일은 홍콩이 진정으로 민주적일 수 있는 조건인 유사 도시국가로서의 자율성을 수호하고 증진시키는데 똑같이 중요하다.

    우4

    2014년 9월 홍콩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

    홍콩에 관한 세 권의 책과 세 가지 미래

    사상의 전쟁은 언제나 지상의 정치투쟁과 함께 간다. 쟝시공, 첸관중, 첸윈의 시각은 각각 (1) 한시라도 빨리 홍콩을 동화시키고 그곳에 본토와 같은 권력행사 기제를 심으려는 베이징, (2) 홍콩 사람의 투쟁보다는 중국의 불투명한 민주적 개혁에서 그들의 희망을 거는 홍콩의 주류 민주주의자, (3) 베이징을 거부하고 홍콩 민주주의를 촉진시킬 준비가 된, 지역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신생 운동을 대표한다.

    홍콩에 대한 베이징의 공세적 압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한편, 주류 민주주의자 및 그들의 사회적 기반인 나이 들고 재산도 넉넉한 중산계급은 직선제로 선출된 입법회(立法會)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주류 매체의 지원을 누리면서도 여느 때보다 소심해져있다.

    청년 중심의 지역주의적 운동은 여전히 분열상을 보이고 주변화 돼있지만, 1997년 이후 등장한 젊은 세대 가운데서 인기가 높다. 또한 그들은 주류 민주주의자들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국가교육과정의 시행을 막거나 조제유 밀반출과 출산 관광을 단속하게끔 정부를 압박하는 등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둔바 있다.

    2014년 홍콩 시민들은 다시 한 번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홍콩의 미래는 전적으로 앞서 언급한 세 세력 간의 상호작용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에 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한편 세 책의 인기를 비교했을 때, 지역주의적 시각이 세를 얻고 있음은 확실하다.

    중국 자유주의자들이 좌절에 좌절을 겪고 있고, 어떠한 주류 정치세력도 여론조사를 통해 꾸준히 드러나는 홍콩의 지역적 정체성을 이해하거나 결집시키려고 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앞서의 관찰은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다. 그러한 홍콩 지역주의의 흐름이 계속 증가하여 대만 민족주의의 수준에 도달하고, 더욱 전투적인 반대운동의 밑거름이 될지는 장차 두고 볼 일이다.

    * 훙호펑은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사회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로 동아시아에 초점을 맞춰 지구정치경제, 저항운동, 국민국가의 형성, 사회이론 등을 공부한다. 그는 『중국적 특징을 가진 저항: 청조(淸朝) 중기의 시위, 폭동, 탄원』(Protest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Demonstrations, Riots, and Petitions in the Mid-Qing Dynasty)의 저자이며, 『중국과 지구적 자본주의의 변환』(China and the Transformation of Global Capitalism)의 편집자이다.

    이 글을 인용할 때 다음과 같이 출처를 밝혀줄 것을 권고함. Ho-fung Hung, “Three Views of Consciousness in Hong Kong”,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43, No. 1, November 3, 2014.

    <참조>

    1. 이 글은 9월말 터진 우산혁명(雨傘革命)의 전야에 『비평』(Critique) 807-808호, 2014년 8-9월자에 “Trois visions de la conscience autochtone à Hong Ko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불문(佛文)을 손 본 것이다.

    2. 홍콩정부가 제안한 법은 다음과 같다. “홍콩특별행정구정부는 중앙인민정부(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대한 반역, 분리 독립, 선동, 전복 등의 활동, 또는 국가비밀의 사취(詐取)를 막고, 해당 지역에서 외국의 정치기관이나 단체의 정치활동을 금하며, 정치기관 또는 단체가 외국의 정치기관 또는 단체와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방지하는 법을 제정한다.” 그러나 이 법안은 보류됐다.

    3.『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 50(1), 1971, 71~136쪽

    4. 주민에 대한 민족적 정체성 조사, 여론 프로그램, 홍콩대학

    5. Lilla, Mark, 「베이징에서 스트라우스 읽기」(Reading Strauss in Beijing), 『새로운 공화국』(The New Public), 2010년 12월 10일자; 마준(馬駿), 슈지안쟝(徐劍剛), 『인민폐의 국제화를 위한 방안: 역외시장 발전과 자본 개방』(人民幣走出國門之路: 離岸市場發展和資本項目開放), 홍콩: 커머셜(Commercial) 출판사, 2012.

    6. 1951년 협정의 전문은 중국어, 티베트어, 영어로 이용 가능하다.

    7. 마준(馬駿), 슈지안쟝(徐劍剛), 앞의 글, 2012.

    8. 일례로, 「왜 홍콩은 여전히 중국경제에 필수적인가」(Why Hong Kong remains vital to China’s economy),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2014년 9월 30일자를 보라.

    9. Yep, Ray, 「대중화권에서 자율성 협상하기: 1997년 전후의 홍콩 및 주권」(Negotiating Autonomy in Greater China: Hong Kong and its Sovereign Before and After 1997), 코펜하겐, 덴마크: 니아스(Nias) 출판사, 2013.

    10. 청샹(程翔), 「18회 당대회를 통해 본 홍콩 내 중공 지하단체의 규모」(從十八大看香港地下黨規模), 『명보』(明報), 2012년 11월 7일자.

    11. Lee, Martin, 「홍콩의 티베트화」(香港西藏化), 『넥스트』(Next Magazine), 2012년 9월 29일자.

    필자소개
    번역 우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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