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벨물리학상과
    나까무라 슈지에 대한 기억
        2014년 10월 21일 0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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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중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등 전 세계의 전기·전자회사들이 동일한 전자부품 하나의 개발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컴퓨터와 홈씨어터의 필수 기기 중 하나였던 DVD 플레이어에 들어가는 엄지손톱 1/4 보다도 작은 크기의 전자부품, 그리고 그 부품에 들어가는 겨자씨보다도 작은 크기의 반도체 부품의 개발이었다.

    이 부품이 개발되기만 하면 홈씨어터를 통해서 관람하는 영화의 화질은 기존의 CD나 DVD를 통해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게 좋아질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사실적인 음질까지 동시에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존의 CD-ROM이나 DVD에 비해 수십 배나 커진 자료저장용량 덕분에 영화의 줄거리를 시청자가 직접 골라서 볼 수 있는 interactive film and storytelling의 시대가 열리는, 그야말로 영화와 매체산업의 혁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광고하였다.

    메모리 반도체의 성장과 이익률이 조만간에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는 시장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이들 전기전자업계의 공룡들은 멸종의 위기를 벗어나, 제2의 전성기로 인도할 제품 가운데 하나로 바로 이 부품의 기술개발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었다. 그 부품의 이름은 바로 청색레이저다이오드 (blue laser diode, blue LD)이다.

    사실상 그 당시 청색 LD 개발을 둘러싼 이 전쟁은 이미 승패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전 세계의 전기·전자회사들이 벌이고 있던 그 당시의 치열한 전쟁은 사실상 2위 자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승자는 그 당시 이미 2위 그룹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앞서가고 있었다.

    그 절대 권력을 가진 승자가 바로 일본 남부의 작은 도시에 자리 잡은 중소 화학기업 니치아의 연구원이었고, 현재는 이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한 미국 주립대학의 종신교수이며, 심지어 이제는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나까무라 슈지이다.

    필자는 지금 그 분야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나까무라가 아직 니치아에 근무하면서 전 세계의 유명 물리학자들과 재료공학자들, 전자공학자들에게 무력감과 자괴감을 “주기적으로” 안겨주던 그 당시 우리나라 유명 전자회사의 그룹중앙연구소에서 바로 그 청색 LD를 개발하는 팀에 근무한 연으로 이런 사실들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나의 기억이 사실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나는 당시 나까무라가 흔히 말하는 명문대와는 거리가 있었던 도쿠시마 대학의 석사 출신이며 박사 학위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당시 물리학 석사 출신인 나와 동급(?)의 연구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최근 노벨상 관련 기사를 보니 내가 연구원에 근무하던 당시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되어있어 잠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여하튼, 기억을 되살려 내가 청색반도체광소자 분야에 근무하던 당시의 풍경 몇 장면을 소개해보자.

    전 세계를 무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우리 팀은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천문학적 단위의 돈이 들어가는 설비와 시설투자도 우리 팀의 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라면 턱턱 이루어지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투자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국내에서는 우리 팀이 가장 선두주자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우리 팀은 그 당시 그야말로 전 세계적인 전쟁터의 한 복판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력으로 따졌을 때 잘 보이지도 않는 저 멀리서 절대 고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까무라는 물론이고 특히 “2위 자리”를 두고 다투던 일본이나 미국의 경쟁사들로부터 새로운 기술개발 소식이 조간신문에 실리는 날이면, 우리 부서의 부서장은 아직 부서원들이 다 출근하기도 전인 이른 아침에 어딘가 높은 곳(?)으로부터 어김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매우 “바른 자세”로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런 전화가 걸려오는 날이면 나를 포함한 부서원들은 괜히 바쁘게 왔다 갔다 하거나, 아니면 일찌감치 부서장과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사무실을 나서서 실험실로 “대피”하곤 했다.

    나까무라

    이미 여러 지면과 방송을 통해 소개된 바와 같이 나까무라는 여러 면에서 근성과 반골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주로 주류 기술의 흐름을 벗어난 시도를 해왔고, 그런 시도를 통해 기존 기술의 한계를 하나씩 극복하면서 남들보다 훨씬 앞서가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청색 반도체 광원 연구에서는 ZnSe와 같이 주기율표 상에서 II-VI족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계열의 반도체박막결정을 이용하는 것이 대세였다.

    이번 노벨상 수상으로 인해 졸지에 유명해져버린 III-Nitride 계열의 GaN 기술의 경우 반도체 결정박막의 결점도(defect)가 너무 높아 양산에 필요한 수율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당시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나까무라는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GaN기술에 매달려 성공을 이끌어낸다. 또한 반도체레이저다이오드와 같은 부품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극저결점 반도체 박막결정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초고진공(ultra high vacuum) 환경이 기본이라는 당시의 통념을 뒤로하고 대기압과 별 차이 없는 진공도를 활용하는 MOCVD(metal-organic chemical vapor deposition)라는 기계를 본인이 직접 디자인하여 활용하였고, 이 기술은 이후 업계의 표준이 되었다.

    이렇듯 항상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난데없는 내공을 슬쩍 내보이며 저 멀리로 홀연히 사라지곤 하던 나까무라와의 경쟁으로 우리 회사의 부서장과 동료들은 주기적인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담배나 커피를 들고 모인 자리에서 “괜히 비싼 기계나 설비에 돈 쓰지 말고 나까무라를 우리 회사로 데려와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얘기를 사뭇 진지하게 하곤 했다. 그 당시에도 나까무라가 회사에서 업적에 상응하는 대우를 못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터이니 그런 얘기가 나올 법도 했다.

    그와 같은 일들이 한창 벌어지던 때 나는 반도체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야의 공부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랐다. 나까무라와 청색 반도체 전쟁터 이야기는 내 머리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갔고, 내가 회사를 떠난 이후의 전쟁터 소식은 뉴스 등을 통해서 간간히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듣게 된 소식 중에 하나가 바로 나까무라가 니치아를 그만두고 미국의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과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것이었다. 이번 노벨상 관련 기사를 보면서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기사에서는 이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소개할 때 3명의 일본인 혹은 일본 출신 물리학자들이라고 소개하는 반면, 미국의 기사에서는 두 명의 일본인과 한 명의 미국인이라고 소개한다는 점이다.

    글을 맺으며 짧은 가상소설을 하나 써보자. 그때 우리 회사가 정말 나까무라를 스카웃해서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면 이번 노벨상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나까무라가 받게 되었을까? 만일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물리학상이 탄생하였다면, 즉 일본계 한국인 나까무라가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또 일본의 반응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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