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에게나 삐비가 있다
    [그림책 이야기] <삐비 이야기>(송진헌/ 창비)
        2014년 08월 28일 10: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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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비라는 아이가 있었어
    내가 아주 어릴 적 이야기야.
    삐비라는 아이가 있었어.
    -본문 중에서

    『삐비 이야기』는 주인공 나와 삐비라는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삐비는 겨울 내내 집에만 있다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숲에 나타나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삐비는 언제나 혼자입니다. 아이들이 삐비를 피해 다녔고 삐비는 숲속에만 있었으니까요.

    숨바꼭질을 하던 어느 날 주인공 나는 숲속으로 숨어들어갔다가 삐비를 만납니다. 나는 너무 놀라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삐비는 무심코 내 앞을 지나칩니다. 나도 천천히 삐비를 따라갑니다.

    삐비는 나뭇가지를 한 움큼 주워들고는 머리를 때리며 걷습니다. 때리다가 부러지면 또 하나로 때리고…… ‘따악, 따악’ 소리를 내며 숲속을 돌아다닙니다.

    이제 나와 삐비는 어떻게 될까요? 나와 삐비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삐비가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에게도 어릴 때 만난 ‘삐비’가 있습니다. 어릴 때 저는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갈 때면 제 또래의 어느 여자 아이를 종종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 나타나서는 저를 확 밀치거나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뿜어내는 강렬한 에너지에 놀라 겁을 잔뜩 집어먹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피하기 위해 엄마 뒤로 숨기도 하고 냅다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를 어떻게 따돌렸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장에 갈 때마다 그 아이를 만날까봐 두려워했던 기억은 지금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아이가 조금 특별한 아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저는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 아이는 시장 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삐비 이야기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이야기

    『삐비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습니다. 우선 그림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림이 흑백영화처럼 이어집니다. 어느 때는 한 페이지였다가 어느 때는 두 페이지에 걸쳐 영화의 롱테이크 장면처럼 펼쳐집니다.

    또 어느 때는 한 페이지가 여러 컷으로 나눠집니다. 심리 드라마처럼 편집된 그림들이 읽는 이의 마음을 늘였다가 줄이기를 반복합니다.

    송진헌 작가의 이야기는 더욱 아슬아슬합니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삐비가 있었는데 삐비는 혼자였고 아이들은 삐비와 놀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게다가 삐비 역시 아이들과 놀지 않고 숲속에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숨바꼭질을 하던 ‘내’가 숲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삐비를 만납니다. ‘나’는 너무 놀라지만 나에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삐비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뭇가지로 자기 머리만 연신 때립니다.

    그 다음부터는 더욱 아슬아슬합니다. 저는 독자로서 진심으로 주인공 ‘나’와 삐비가 친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삐비와 다른 아이들이 친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진심으로 끝까지 아주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읽는 내내 제 마음은 점점 더 속으로 타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송진헌 작가가 어렸을 때, 작가의 숲에는 삐비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엄마랑 다니던 시장에는 어느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삐비는 숲속으로 사라졌고 그 여자 아이는 시장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삐비는 숲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여자 아이는 시장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만을 위한 어떤 곳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들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 ‘나’와 제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독자들 모두 주인공 ‘내’가 무언가를 해내기를 바랐지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삐비를 숲속으로 혼자 보낸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그 아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장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 아이’를 저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독자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주인공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독자와 화자의 너무나 간절한 꿈은 ‘따악, 따악’ 삐비의 머리를 때리던 나뭇가지처럼 산산조각이 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에 희망은 어느새 후회뿐인 과거가 되었습니다.

    『삐비 이야기』는 애타게 바라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현실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지를, 아주 먹먹한 흑백의 기억으로 보여줍니다.

    누구나 실수를 통해 배운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조금 특별한 삐비를 외톨이로 만든 게 잘못이라는 것을, 삐비를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오히려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엔 특별한 사람도 많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을 외면하는 게 잘못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외면하고 나면 뼈저리게 모두 후회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통해 배우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바로 지금이 우리의 양심을 깨울 때입니다.

    그림책 『삐비 이야기』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주인공 ‘나’와 저에 대한 아쉬움으로 자꾸만 들춰보며 눈물짓게 되는 그림책입니다.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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