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자본의 반격
[책소개] 『신자유주의의 위기』(제라르 뒤메닐 외/ 후마니타스)
    2014년 07월 26일 04: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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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연구자들의 견해에 따라 다소 상이하긴 합니다. 흔히 전 세계적으로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에 걸쳐,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발생해, 1990년대를 거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고 이야기되곤 합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갑작스럽게 이자율을 상승시키기로 결정한 1979년이 상징적으로 그 시기의 출발점으로 거론되기도 하는데요, 이는 또한 1979년의 격변(쿠데타)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이윤율의 하락 추세와 경제적 긴장을 표현하던 누적적 인플레이션)의 결과로 출현한 새로운 국면의 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그것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시킬 목적으로 자본가들이 상위 관리자, 좀 더 구체적으로는 금융 관리자와의 동맹을 통해 실행하고 있는 전략입니다. 이 점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이를 ‘자본의 반격’(Capital Resurgent)이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자본의 반격, 그 이후의 사회

그렇다면, 자본의 반격, 그 후 사회는 어떻게 재편되었을까요? 이를 가장 극명히 보여 주는 지표는 부의 불평등 지수입니다.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총소득 가운데 상위 1% 소득 계층에 있는 가계가 올린 몫은 최소 9%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0년대 이후 이 비율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위기 이전인 2007년에 이르러서는 24% 정도에 도달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부의 집중은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부와 소득의 상위 특권 계층들로 집중되었는데, 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6년과 2007년 사이에 초부유 계층의 비율은 연평균 8.5% 증가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 세계적인 수치를 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한데요,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부의 46%를 상위 1%의 부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한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위 10%의 소득 비중은 전체 대비 45.51%로 미국(52%)보다는 낮지만, 일본(40.5%), 프랑스(33%)보다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결과 상위 10%의 소득과 하위 10%의 소득은 12배에 이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결과는 또한 오늘날 우리가 상시적으로 겪고 있는 경제 위기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생산적 투자를 위해 진행된 것도, 하물며 사회적 진보를 위해 진행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상위 소득 계층의 소득을 발생시킬 것으로 목표로 진행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진행되는 동안 중심부 국가들에서조차 국내 축적과 내수 안정은 상위 계급에 유리한 소득분배를 위해 왜곡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나타난 생산의 탈영토화 경향이 바로 이를 대변하는데요, 이를 통해 국내 축적은 하락하고,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향한 무한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이와 같은 전략은, 금융 서비스, 지식 경제로의 재편을 통한 고소득의 추구와 맞물려 있었으며, 이를 위한 대대적인 규제 완화가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추세가 진행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 거시 경제에 대한 통제력의 손상과 누적적 불균형의 증가였던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뒤이은 금융 위기였던 것입니다. 이는 애초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미국 헤게모니하의 신자유주의’라고 표현되듯이, 그 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며 파멸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위기

신자유주의 이후에는 어떤 사회가 올 것인가

이 책은 2008년 위기가 발생한 직후에 쓰였고, 저자들은 각종 데이터를 통해 위기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추적하며, 그에 따른 결과와 단기적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저자들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독자들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들이 진단하는 위기의 원인은 ‘고소득 추구’, ‘세계화’, ‘금융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양상과, ‘자본축적의 감소’, ‘무역 적자’, ‘부채의 증가’라는 미국 경제의 거시적 궤도가 결합된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닥의 양상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화와 금융화 없이 상위 계층의 고소득 추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이런 신자유주의적 경향은 미국 경제의 독특한 거시 경제 궤도를 만들어 내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이 위기를 각각의 경제 주체(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따라 ‘계급’이다)들은 어떤 식으로 극복하려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먼저, 신자유주의 위기로 인해 이전의 궤도를 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 결과, 위기 이후에는 각각 계급들의 세력 관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신자유주의적 경향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고소득 추구를 상당 정도 억제하는 관리적 경향(상위 자본가 계급과 관리자 계급 사이에서 관리자들이 주도하는 신관리주의적 우파적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 민중 계급과 관리자들의 동맹을 통한 좌편향적 관리 경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어찌 됐든 저자들은 좌편향적 경향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적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이전과 비견할 만한 민중 계급의 세력을 표현하는 사회운동 또는 노동자 운동이 급속도로 축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주요 쟁점에 대한 소개: 토마 피케티와의 쟁점

이 책은 수많은 데이터와 그림들을 통해 저자들은 위기의 원인들을 증명하고, 위기의 연대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자들은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분석 틀을 수정하고 갱신해 이후 세력 관계를 예측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양상은 ‘(상위 계층의) 고소득 추구’, ‘세계화’, ‘금융화’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특히 상위 계층의 고소득 추구는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주된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세계화와 금융화는 자본주의의 어떤 시기에 특별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니며, 자본주의에 잠재된 내재적 경향으로서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전성기를 구가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세계화와 금융화는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적 위계질서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했고, 그들의 소득과 권력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불평등의 심화’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은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Le Capital au XXIe si?cle)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피케티 또한 이런 ‘불평등의 증대’ 경향을 분석하고 있으며, 저자들 또한 오래 전부터 피케티와 그의 동료들(에마뉘엘 새즈와 앤서니 앳킨슨)의 자료를 불평등의 한 지표로서 꾸준히 이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피케티가, 자본(capital)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자산(patrimoine)상의 불평등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피케티는 이런 과정에서 세습이나 유산(heritage)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피케티의 자료를 통해서 보더라도 프랑스의 경우, 1970년 이후 국민소득 대비 자산의 증가 확인할 수 있지만 불평등의 정도는 일정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오히려 임금 또는 고임금에 있다는 것으로, 저자들은 이를 피케티보다 좀 더 세분화된 구분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임금 소득 계층 상위 부분은 물론이고, 초부유층의 경우에도 고임금 형성은 이들 소득의 증가에 지대한 역할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고임금의 증가가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타협’의 물질적 기초였습니다.

다시 말해, 지배적 계층은 동시에 지도층이어야만 하고, 이들 상위 자본가 분파와 상위 관리자 집단 사이에는 일정의 타협을 필요로 했는데, 이들이 거시 경제를 취약하게 만드는 고소득 추구를 추구하고 이를 지속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고임금을 기초로 한 신자유주의적 타협이라는 사회적 형세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민중 계급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상위 고임금 계층에게 돌아가는 소득의 막대한 증가는 그 이하 임금 소득자들의 임금의 정체 또는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모든 임금 소득자들이 이 체계에서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회의 시기였고, 실제로 그러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여 주는 명확한 지표는 바로 총소득에서 임금 몫이 차지하는 비율입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기간 노동 착취가 증가했다면, 총소득에서 임금 몫이 차지하는 비율을 당연히 줄어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경험적 지표는 총소득에서 임금 몫이 72% 주변에서 변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1970년대의 추세와 별반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 같은 모순적 상황이 왜 발생했는지 명확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신자유주의 시기에 상위 소득 계층의 고임금이 대폭 증가했기 때문으로, 이는 하위 임금 소득자 95%의 임금 몫 하락을 상쇄하고도 남을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체 임금 몫의 수준이 하락하지 않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임금 소득자 대다수에게 이 시기는 지옥과 같은 시기의 연속이었고,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운명이었습니다. 이런 임금 소득 계층의 분리는 이른바 사회운동 및 노동자 운동의 쇠퇴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의 확대를 피케티 식으로 자산만을 강조하는 식으로 단순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초상위층의 세습이나 자산의 증가뿐만 아니라 임금 소득자 사이에서 발생하고 격차, 특히 정당화되기 힘든 형태의 고임금(사실상 이는 이윤이다)의 형태를 추적해야만 한다는 점을 저자들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또 다른 이론적 기여 역시, 피케티의 주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자본에 대한 정의입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저자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이윤율을 계산해 왔으며, 그를 위해 생산적 자본의 측정과 그를 바탕으로 한 지표들을 발굴, 생산해 왔습니다.

이 책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지표들이 소개됩니다. 금융 법인과 비금융 법인의 수익성에 대한 비교, 비금융 법인의 다양한 이윤율들과 자본 축적률에 대한 관계가 바로 그것인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런 수익성 수준이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전반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이윤율(수익성)의 저하’와는 다른 주장을 이번 위기와 관련해 저자들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윤율이 떨어진다는 주장으로서는 아무것도 설명하는 것이 없으며, 그것이 어떻게 거시 경제 및 자본가들의 (투자) 결정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넓은 의미의 자본, 즉 자산을 통해 현재의 위기 또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경향에 대한 피케티의 연구와, 저자들의 생산적 자본을 통한 연구는 확연히 다른데, 그것은 피케티적 의미의 자본을 통해서는 그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자본주의 근본 경향 자체를 분석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습니다.

잘 알려진 바대로 피케티는 심지어 자신이 제시하고 있는 각 변수들을 단순히 외생적으로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의미 또는 생산적 자본을 바탕으로 한 연구가 어떻게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 경제 궤도를 재현해 낼 수 있는지에 대해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의 정치적 지향을 피케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피케티의 주장을 접해서 알고 있듯이, 피케티의 미래 정치(또는 정책)는 능력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습이나 자산의 증대를 통한 소득 및 권력의 증가는 이 같은 능력주의에 반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느 부분에서도 동의할 수 있고, 함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능력주의로 위장된 위계 관계와 그로 인해 정당화되는 고임금 또한 우리 앞에 던져진 과제입니다.

저자들 중 제라르 뒤메닐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비데와 함께 쓴 <대안마르크스주의>(Altermarxisme)라는 저서에서 이 같은 과정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수행했으며, 이 책에서도 여러 지표를 통해 이것이 만들어 내고 있는 환상과 위계 관계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능력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며,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지만 문화와 교육과 같은 재생산 과정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상과 실행이라는 형태로 분리된 과정은 능력주의적 위계 관계를 정당화합니다.

바로 이 점이 ‘동맹 속의 계급투쟁’이라는 저자들의 관점이 더 나아가는 지점입니다. 자본주의적 관계를 넘어 더 민주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전문가와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능력주의적 위계 관계’ 또한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지점입니다.

하지만 정세는 이런 모든 문제 제기들에 아직은 취약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민주적인 사회를 찾아가려는 모든 엔진은 아직 꺼지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주의 또한 민주주의를 위한 이론적 엔진의 역할을 여전히 수행할 수 있음을 저자들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연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정교하고도 진지한 형태의 연구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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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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