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사상은
여전히 기억되어야 한다
[기고] 맑스와 엥겔스의 베를린 생활
    2014년 06월 05일 05: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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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동의를 얻어 철학웹진 ‘e-시대와 철학’에 먼저 실린 것을 중복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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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엥겔스 포럼. 냉전 시절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 지역에 만든 건축물로 오늘날 베를린의 관광명소로 분류되고 있다.

맑스는 그의 생애에 걸쳐 총 4차례 베를린을 방문한다. 첫 방문은 그가 베를린 대학교, 즉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Fiedrich-Wilhelm-Universität, 오늘날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본에서 학업을 시작한 그는 1년 뒤인 1836년에 베를린을 방문해 1841년까지 머문다. (맑스는 베를린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예나 대학에 제출했다.)

그 후 1848년에 잠시 기차 환승을 위해 베를린에 들른 기록이 있다. 1861년에는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사망과 빌헬름 1세로의 왕위 계승을 계기로 기존의 정치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이뤄졌는데, 맑스는 이 당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프로이센 시민권을 얻고자 했다.

때마침 페르디난트 라쌀레의 제안으로 베를린에서 공동의 신문을 창설할 계획으로 일주일간 라쌀레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복잡한 법적 문제로 맑스의 프로이센 시민권 취득은 실패했고 그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야 했다.) 1874년 말에는 막내 딸 엘리노어와 함께 베를린을 여행했다. 그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맑스는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 학생이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철학, 특히 베를린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 1831년 사망한 헤겔의 철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당시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 교수이며 헤겔 법철학을 편집, 출간한 에두아르트 간스(Eduard Gans) 교수 밑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한다. 또 1838년에는 브루노 바우어의 소개로 ‘박사 클럽(Doktorklub)’에 가입해 청년 헤겔학파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맑스가 살던 당시 왕립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현재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학과 건물이 있으며, 앞에는 베벨 광장(Bebel Platz)이 있는데, 이곳은 1933년 권력을 장악한 나치 세력이 유태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쌓아놓고 불태워버린 곳으로 유명하다.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맑스의 서적들 역시 당시 대거 불태워졌다.

현재 이곳에는 텅 빈 서고만 남아 있는 지하 도서관을 땅 위에서 볼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이는 나치에 의한 분서갱유 사건으로 학문이 탄압받았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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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건물과 베벨 광장

참고로 이 법학과 건물의 도서관에는 동독 정부 시절 제작된 6미터 높이의 거대하고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 중심에는 레닌이 서 있고 그 옆에 맑스와 엥겔스의 얼굴이 보인다. 이곳은 레닌이 1894년 이 건물(당시에는 왕립 도서관)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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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도서관의 레닌 창문

그가 공부했던 베를린 대학교의 명칭은 이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바뀌는데, 훔볼트 대학교는 냉전 시절 동베를린 지역으로 편입되어 동독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동독 정부는 맑스주의를 홍보할 목적으로 훔볼트 대학 본관에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의 마지막 문구인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변혁해 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금속으로 제작해 벽에 전시하였다.

통일 직후 이 글귀를 벽에서 철거할지 말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대학 측은 이 글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며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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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 대학교 본관에 전시된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그는 베를린에 공부하며 거주지를 총 6차례 옮겼는데, 그중 그가 그의 약혼자 예니 폰 베스트팔렌의 오빠이자 맑스의 정치적 동료인 에드가 폰 베스트팔렌과 함께 거주했던 3번째 집이 가장 유명하다. 루이제 거리 60번지(Luisenstraße. 60)에 위치한 이 집에 동독 정부는 맑스가 살았던 곳임을 표시하는 현판을 걸어두었는데, 지금은 이 건물이 예술 아카데미 기록관(Das Archiv der Akademie der Künste)으로 편입되면서 현판이 철거되었다. 현재 베를린의 맑스 엥겔스 전집 편찬위원회는 맑스라는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감안해 이 현판을 다시 제작해 전시하자고 당국에 건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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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살던 집 건물에 붙어 있던 현판

엥겔스는 언제 베를린에 머물렀을까? 맑스가 베를린을 떠난 지 수개월 뒤인 1841년 9월 엥겔스가 베를린에 온다. 군대에 자원한 엥겔스는 포병으로서 베를린 대학 근처에 있는 Am Kupfergraben에 주둔한 병영에 거주하며 종종 베를린 대학의 철학 수업을 청강했으며, 브루노 바우어가 이끄는 청년 헤겔학파와도 교류했다.

동독 정부 시절엔 시내 중심에 위치한 그가 살던 집에 커다란 현판이 붙어있었지만, 지금은 재개발이 진행되어 건물이 소실되어버렸다. 1년 뒤 엥겔스는 쾰른을 거쳐 맨체스터로 이주해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그곳의 노동자들의 생활을 관찰한 뒤 정치적으로 급진화하기 시작한다.

베를린에 남아 있던 맑스의 흔적들은 대부분 동독 정권 시절 정권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러한 흔적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소실되어 더 이상 기념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동독이 무너졌지만 맑스에 대한 독일인들의 자부심은 여전히 대단해서, 베를린에만 칼 맑스 거리(Karl Marx Straße), 칼 맑스 대로(Karl Marx Allee) 등 맑스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곳곳에 맑스의 흉상과 얼굴 조각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맑스를 기념하는 장소들과 지명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들도 우파들로부터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맑스와 독재를 동일시하며, 동독이 사라진 현재 맑스를 기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묻는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과 달리 맑스의 사상은 동독 정권의 독재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동독 정권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아닌 맑스 사상의 비판적이고 변혁적인 핵심을 연구하고 실천적으로 계승하려는 노력들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독일의 연구자들은 맑스 엥겔스 전집(MEGA)을 발간하며 동독 국가 이데올로기와 다른 맑스 사상의 새로운 내용들을 세상에 공개하고 있다.

맑스가 죽은 지 13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불평등과 착취, 억압이 지배하며, 새로운 형태의 위기가 재생산되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맑스의 사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전히 베를린에 “더 많은” 맑스 기념시설들이 필요한 이유다.

필자소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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