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밴플리트의 4월
    [산하의 가전사] 노블리스 오블리제, 한국에서 보기 힘든 것
        2014년 04월 15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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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당시 낙동강 교두보까지 밀렸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뒤 기세 좋게 북진했지만 중공군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뒤 후퇴를 거듭하던 1950년 12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교통사고를 유발한 한국군 운전병을 사살하라고 노발대발할만큼 (빌어먹을 영감탱이..다행히 미군이 말려서 목숨은 구한다) 큰 충격이었어. 워커 중장이라면 낙동강 전투에서 “죽느냐 사느냐”를 부르짖으면서 인민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낸 바로 그 사람이었으니까.

    맥아더는 그 후임으로 리지웨이라는 사람을 지명해.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사단장으로서 낙하산 타고 뛰어 내렸고 언제나 수류탄을 가슴에 차고 다녔던 강골.

    그런데 미국 대통령쯤은 별로 안중에 두지 않는 듯 자기가 무슨 시저라도 된 양 제멋대로 행동하던 UN군 사령관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다.

    만주지역에 핵폭탄 수십 개 떨어뜨리자는 주장을 서슴지 않던 맥아더가 대통령의 한 마디에 절대 권력을 잃어버린 거지. 이게 미국의 무서운 점일 수도 있어. 영웅은 대접하되 월권은 용납하지 않는 거.

    그 뒤를 이어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UN군 총사령관으로 올라서고 그 뒤를 이은 8군 사령관으로 네덜란드 이민의 후예인 밴플리트가 부임해 온다. 네덜란드인의 후예냐고? ‘밴’플리트거든 빈센트 반 고호의 그 ‘반’을 ‘밴’으로 발음한 거니까.

    이 사람은 능력에 비해 출세가 좀 늦었어. 동명이인이 미국 육군 안에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사람이 유명한 주정뱅이였거든. 승진 심사 때마다 담당관이 “밴플리트? 다음!”을 외치는 통에 계속 물을 먹었던 거지.

    그의 동기가 바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였어. 동기생이 별 다섯 개를 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할 때 그는 상륙부대 연대장이었으니 알만하지? 하지만 그는 그 후 승승장구했는데 그가 가장 진가를 발휘한 것은 그리스 내전 때였어.

    동족상잔의 비극은 한국만 치른 게 아니야. 그리스도 마찬가지였어. 동유럽 전체가 소련의 지배에 들어가는 걸 보고 미국과 영국은 그리스만큼은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고 결심했고 전쟁 때 독일군에 맞서 투쟁했던 그리스 좌익들은 당연히 이에 저항했지. 내전의 전개 과정은 거의 한국과 쌍둥이같이 닮아 있어. 동아일보 1948년 5월 13일자에는 서양 특파원의 분석 기사가 등장한다.

    “조선은 희랍 사태의 완전한 재연이다. 양국에서의 공산당 전술은 동일한 것이며 희랍에서 발생한 전투는 조선에서도 발생할지 모른다. 양국이 지리적으로 근사하다. 양국은 다 산악이 많은 반도이다. 희랍 반도는 공산주의자가 지배하고 있는 발칸에 연결되어 있으며 조선은 역시 역사적으로 소란의 온상지이며 현재 공산군이 세력을 펴고 있는 만주에 연결되어 있다.” 똑같지?

    선거를 보이콧한 그리스 좌익은 그리스 정권에 반란을 일으켰고 능숙한 게릴라전으로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는 등 기세를 올리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익 정권에 의해 패배하게 되거든. 그리고 그리스에는 무지막지한 우익 독재정권이 등장하게 되고. 밴플리트는 그리스 정부군의 고문으로서 그리스군을 도와 좌익 게릴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었어.

    “게릴라들을 공격할 때는 최상의 기회를 포착하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게릴라 전투는 사냥과 유사한 것이다. 사냥감이 나타나면 곧바로 사격해야 한다. 지체하게 되면 노루나 새는 숲 속으로 사라지게 되며, 다시 이들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 밴플리트의 말이야. 미 제국주의는 멍청하지 않아. 이런 사람을 한국으로 보낸 걸 보면.

    밴플리트

    밴플리트 장군의 모습(사진=국방일보)

    1951년 4월 14일 밴플리트가 부임했을 때는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형성돼 있었지만 그가 부임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중공군은 제5차 대공세를 펼친다. “메이데이에 승전보를 모택동 주석에게!”를 외치면서.

    이때 밴플리트는 ‘밴플리트 포격’이라고 불리는 엄청난 화력을 퍼부어 중공군을 막아 낸다. 원래 관측된 목표에만 포격을 한다는 것이 포병의 교범이었지만 리지웨이는 미군이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인 물량 공세로 중공군의 인적 자원을 봉쇄해 버린 거지. 이때 백선엽 장군에게 한 말은 유명해. “탄약은 아끼지 말라. 필요한 만큼 제한 없이 써도 좋다.”

    이 대공세가 좌절된 이후 중공군이나 UN군이나 전황을 결정적으로 뒤바꿀 대공세를 취하지 않아. 그때부터는 땅 따먹기가 시작돼. 영화 <고지전>에서 봤을 그 피에 젖은 땅 따먹기가.

    그런데 밴플리트가 한국에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던 4월 4일, 밴플리트는 충격적인 소식을 하나 듣는다. 미 공군으로 참전한 제임스 밴플리트 주니어, 즉 아들 밴플리트 대위가 탄 폭격기가 작전 중 실종됐다는 소식이었지. 10년만에 본 아들이었어, 군인들이 으레 그렇지만 아들을 각별히 사랑했던 그였지.

    아프리카에서 아들과 함께 사냥을 즐길 때의 일화가 전한다. 두 밴플리트는 명사수였던지 사자도 쏘아 잡는 등 좋은 성과를 올렸어. 그런데 코뿔소가 나타난 거야. 밴플리트 왈 “쏘지 마. 저건 수렵 금지 동물이다.” 코뿔소는 아랑곳없이 돌진해 왔고 두 밴플리트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서 겨우 살았다고 해. 그래도 그들은 코뿔소를 쏘지 않았다는군.

    밴플리트는 아들의 실종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평정을 지켜. 장군의 아들 실종 소식에 안달이 나서 어떻게든 구조 활동을 펴 보려는 휘하를 막고 나선 것도 그였어.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구조 활동을 포기하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 며칠 뒤 부활절에 그는 한국전에서 실종된 군인들의 가족에게 이런 메시지를 발표한다.

    “여러분의 아들은 국가에 봉사하고 국가에서 부여한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오래전에 주님이 말씀하신 계시를 실천한 것입니다.”

    5개월 전 중국의 최고 지도자 모택동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 모택동의 장남 모안영이 은신지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네이팜탄이 떨어져 전사했을 때 모택동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전쟁이란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중얼거렸다고 하니까.

    모안영이 참전을 고집했을 때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당신 아들 좀 말려 달라고 하자 “걔는 내 아들이오.” (아니 그거 때문에 말리는 건데!)라고 고개를 저었던 그는 자식의 시신조차도 송환하지 않았다고 해.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자식을 잃었는가”라면서.

    비슷한 시기 부산항에는 헌병들이 항구에 정박한 배들을 뒤지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어. 어떤 배들 안에는 여차하면 일본으로 튈 요량이었던 부유층의 자제들이 호화로운 살림과 여자들까지 거느리고 살림을 차리고 있었지.

    사병들은 총에 맞아 죽으면서 빽이 없어 전방에 나와 죽는다는 뜻으로 “빽!”하고 죽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고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은 대학에 등록해서 (대학생은 징집을 면했음) 합법적으로 군대를 뺐다. 이걸 두고 이승만이 “근대화를 위한 인재를 양성”했다는 건 그야말로 웃기는 소리고.

    우리 땅에서 우리가 전쟁을 치르는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발휘한 건 우리가 아니었어. 그리고 지금도 크게 다르다고는 볼 수 없고. 밴플리트의 4월은 그 점을 아프게 가리키고 있다. 내가 입대했을 때에도 인사 카드에는 그런 걸 적는 난이 있었어. “알고 있는 유력 인사”를 적는. 글쎄 그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발휘하라는 뜻이었을까. 지금은 그런 항목을 적는 관습은 사라졌을까.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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