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이야기
[산하의 가전사] 칼리닌그라드가 되어야 하는 이유
    2014년 04월 10일 01: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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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달달 외워야 했던 명언 가운데 시험에 나온 빈도가 가장 높았던 것은 칸트의 말이지.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직관이 뭔지 개념이 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하는 우리들에게 윤리 선생님은 매우 과감한 가르침을 내리셨다.

“느그 쉐이들은 이래 해야 알아묵는다. 느그들 섹스 좋아하재? 섹스 없는 사랑은 공허하고 사랑 없는 섹스는 맹목이다. 이해하겠나.” 대번에 알아 먹겠더라. 칸트는 아마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지 몰라도.

그런데 무덤에서 벌떡 일어난 칸트는 무척 어리둥절해 할 거다. 여긴 어디. 난 누구 그러면서. 왜냐면 칸트가 태어나고 평생을 살았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는 지금 존재하지 않아. 이 도시는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었고 사는 사람들도 대개 러시아 사람들이거든.

항상 정시에 산책을 하는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면서 ‘구텐 탁’ 인사를 하던 독일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13세기 이래 웅장한 성곽을 자랑하던 쾨니히스베르크 성은 어떻게 됐단 말인가. 칸트는 그 침착성을 잃고 머리를 쥐어 뜯을지도 모르지.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는 독일인들에게 매우 특별한 도시야. 통일 독일 제국의 모태가 된 프로이센의 발상지가 바로 이 지역이었거든. 정치 중심지를 베를린에 둔 뒤에도 프로이센 왕들은 대관식만큼은 쾨니히스베르크를 고집할 만큼 중요한 도시였지. 일종의 정신적 수도라고나 할까. 이 도시가 러시아령이 된 건 2차 세계 대전 때였고 그건 독일인 자신들의 책임의 댓가였지.

한때 독일군의 맹공격에 거의 함몰될 것 같던 소련은 그 광대한 영토와 인구의 에너지, 그리고 연합국의 도움으로 기세를 회복하고 독일 침략군을 물리치고 1944년 말 독일 영내로 진군 또 진군한다. 장교부터 사병까지 소련군은 단어 하나를 심장에 새기고 있었어. ‘복수’.

독일군이 소련 영내에서 자행했던 그 숱한 학살과 파괴의 모습은 영상에 담겨 정신교육 재료로 활용됐고 소련군의 눈에 복수를 탐하는 핏발을 세웠지.

독일인들 역시 공포에 질리지. 특히 동부 독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태인과 폴란드인에게 어떻게 대했고, 소련에 쳐들어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서쪽 사람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었거든.

그러나 공포에 질린 수백만의 민간인들은 재빨리 도망을 가지도 못했어. 우크라이나로 침략해서 민간인 학살의 악업을 쌓았던 이 지역 SS 친위대 사령관 코흐는 “단 한 사람도 피난가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피난가는 사람을 즉결 처분할 것을 선언하지. “절대로 동프로이센을 소련군에게 내 주지 않는다.”

또라이는 또라이라고 치고 독일 최고 사령부의 구데리안 장군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어. 70개 사단으로 200개 사단이 넘는 복수심 불타는 소련군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한데 히틀러는 지원 병력조차 거부했거든. “노르웨이와 발트해에서 병력을 빼자고? 못해! 동부전선은 이 이상 강화될래야 강화될 수 없다. 강화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독일 땅을 한 치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 구데리안은 뒷목 잡고 물러날 수밖에.

1945년의 쾨니히스베르크 요새의 모습(www.histomil.com)

1945년의 쾨니히스베르크 요새의 모습(www.histomil.com)

마침내 소련군이 전선을 무너뜨리고 프로이센으로 돌입한 뒤에야 독일인들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게 돼. 20세기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 할 만한 피난민의 대열이 서쪽으로 향했지. 소련군의 포위로 육로가 막히자 물길을 통해서도 탈출하려 들지만 그 바다에는 또 소련군의 잠수함이 떠돌고 있었지.

최악의 참사는 빌헬름 구스들로프호라는 호화 여객선에서 일어났지. 1만여명의 피난민들이 꽉꽉 들어찬 수송선으로 변한 이 호화 여객선은 출항한 지 얼마 안돼 소련군의 어뢰 공격을 받는다. 도대체 얼마를 태웠는지 정확한 숫자가 없기에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으면 5천명 많으면 9천명까지의 사람이 차가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해.

이즈음 독일의 군수 책임자였던 슈페르에게 히틀러가 한 말은 히틀러의 정신 상태를 짐작하게 하지. “전쟁에서 패한 국민들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미 용감한 자는 다 죽었고 비겁한 자들만이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도자를 민족의 구원자로 보고 열광한 죄, 그에 편승하여 유태인과 집시, 폴란드인과 러시아인들 짐승처럼 죽였던 죄, 그를 막지 못하고 눈 감았던 죄, 자신들의 ‘레벤스라움’ 즉 생활 영역을 꿈꾸며 다른 열등 민족을 깔아보고 그들을 노예로 부릴 꿈에 충만했던 죄로 독일 사람들은 참혹한 꼴을 겪게 됐지.

4월 초 소련군 60개 사단이 쾨니히스베르크를 둘러쌌다. 독일군은 4개 사단. 그리고 경찰 소방관 히틀러소년단까지 박박 긁어 모은 방위군. 소련군은 무시무시한 폭격을 퍼부어 쾨니히스베르크를 쑥밭으로 만들어. 웅장한 옛 성채는 포탄에 허물어졌고 한때 프로이센 왕이 러시아 황제에게 선물하여 페테르스부르크를 빛내다가 나찌가 다시 약탈해 왔던 ‘호박방’ 즉 보석 호박으로만 꾸며진 방 역시 폭격 와중에 사라져 버린다.

독일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소련군의 압도적인 힘을 물리칠 수는 없었지. 4월 9일 독일군 수비대장 라쉬 장군은 백기를 든다. 수십만 명의 쌍방 병사들이 목숨을 잃은 뒤였지.

이후 동프로이센은 독일의 손을 떠난다. 남부는 폴란드가 가지고 북부는 소련이 챙기고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이름은 칼리닌그라드로 바뀌고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독일인들은 강제 추방의 길을 걷게 돼. 이후 지금까지 칼리닌그라드는 소련이 보유한 주요한 부동항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칸트의 고향은 쾨니히스베르크가 아니라 칼리닌그라드”라고 한 적이 있는데 독일인들도 인정을 했어. 통일과정에서 독일은 쾨니히스베르크 등 옛 동 프로이센에 대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되니까.

그렇게 한 도시의 호적(?)은 바뀌었고 칸트의 고향은 칼리닌그라드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독일인들은 과거의 행적에 대해 철저히 반성해 왔고 자신들마저 파멸키셨던 독일 스스로의 과오를 되새겨 왔다고 해도 무방할 듯 해. 쾨니히스베르크는 그 상징 같은 곳이 돼 버렸다. 가장 소중한 곳 중 하나이지만 결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땅.

칸트는 오늘날 자신의 고향의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겠지. “이곳은 쾨니히스베르크가 아니어야 한다. 독일인들은 반성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이곳이 칼리닌그라드이어야 한다.

“반성 없는 행동은 맹목이고 행동 없는 반성은 공허하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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