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교회와 정당의 틈에서
    [세계 LGBT 운동의 역사] 이탈리아 LGBT 인권운동
    By 토리
        2014년 04월 10일 09: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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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LGBT 인권운동의 시작

    이탈리아 인권운동은 다른 나라의 LGBT 인권운동과 한가지 조건 외에는 그다지 다를 바 없다고 얘기된다. 그 조건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존재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로 인하여 전통적 성별 역할과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Passerini는 이탈리아를 “가부장적 전통의 국가, 어머니와 남성 아이 사이의 관계를 특권화하는 지중해적 전형을 가지 동시에 가톨릭주의와 파시즘이 작동하는 나라”라고 단정한 바 있다.

    1889년 형법이 제정되었을 때 동성간 결합을 처벌하는 조항이나 반소도미 조항이 없었으며 파시스트 체제에서도 새롭게 처벌 조항이 제정된 바 없었다. 그러나 게이 레즈비언에 대한 사회적 보호 조항 역시 존재한 바 없다.

    전후 이탈리아 기독민주당(Democrazia Cristiana)의 강고한 지배 후에 처음으로 LGBT 인권활동 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첫 게이 인권 조직은 1963년 Massimo Consoli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조직의 이름은 ROMA-1 (혁명적 동성애자 남성 아나키스트)이었다.

    1972년 이 조직은 이름을 바꾸어 ‘동성애 해방 전선’, 그 후에는 ‘호모 라이엇’으로 불리웠다. 1973년 5월 Consoli는 ‘이탈리아 소수자 인권 활동 도큐멘트 센터’를 설립하는데 동성애혐오범죄 국제사법위원회부터 삐에르 파졸리니 살해 후 핑크 트라이앵글까지 다양한 종류의 활동을 펼쳤다.

    1978년 5월 그는 이탈리아공산당 내에서 “동성애 문제”라고 불리우는 모임을 열었는데 1976년 10월 30일 파졸리니 살해 추도 모임에서 우연히 집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동성애혐오범죄 국제 사법위원회는 파졸리니를 살해했다고 고백한 Pino Pelosi를 고발하는 일을 진행하였다. 초기 동성애 인권운동 선구자 Mario Mieli나 Angelo Pezzana 등도 사법 과정에 협력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다양한 이탈리아 사회운동의 지도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파리와 미국의 운동, 아타키스트와 맑시스트 저술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운동은 기존 정치적 정당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였다.

    여타 사회운동 이론들과 달리 이탈리아 의 새로운 사회 운동은 전통적 조직의 내부 운동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이탈리아 좌파 정당들은 새로운 운동들의 시작과 제도화에 있어 무대로서의 역할을 제공하였다.

    Fuori! (=Out)

    Fuori!는 1973년 Angelo Pezzana에 의해 설립되었다. 1971년 암스테르담에서 발행된 “도덕적 혁명에 대한 선언: 혁명적 동성애”가 이탈리아에 알려지면서 그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Fuori!는 최초의 이탈리아 게이 조직으로서, 설립 동시에 동명의 저널을 발행하였으며, 사무국을 튜린 지방에 두었다.

    AngeloPezzana

    Angelo Pezzana

    Angelo Pezzana는 Fuori! 첫 호에 조직의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거부한다.(..)처음으로 동성애자들이 다른 동성애자들의 편에서 발언할 것이다. 처음으로 동성애자들이 주체로 등장하고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이 될 것이다. 동성애자의 위대한 각성은 시작되었다. 다른 유대인, 흑인들의 활동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제 우리 차례이다. 그리고 각성은 즉각적으로 전파될 것이고, 아름다울 것이다.”

    편집위원회 구성원들로는 Angelo 뿐만 아니라 Mario Mieli, Alfredo Cohen 등이 함께 하였다. 잡지는 1982년까지 발행되었다.

    1974년 11월 Fuori!는 당 내 동성애자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의 연합이 투쟁에서 유리할 것으로 보고 이탈리아 급진당(Partito Radicale)과 연관을 맺게 된다. (급진당은 지금은 해소된, 1970년대 및 1980년대 이혼이나 낙태 등의 이슈에 관해 활발히 활동한 정당이었다.)

    이 선택에 대한 논쟁 끝에 Mario Mieli는 조직을 떠나게 된다. 1976년 급진당에서 커밍아웃한 게이 후보가 처음으로 입후보하였다. Angelo Pezzana는 급진당으로 1979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77년 모스코바에서 동성애로 감옥에 간 세르게이 빠라야노브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행동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1972년 4월 5일 최초의 공개적 동성애자 집회가 San Remo에 있었다. 이는 가톨릭 주도의 이탈리아 성 센터가 주도한 ‘성적 변태들에 대한 국제 총회’에 대항하기 위한 집회였다. 이 집회는 약 40인이 참석하였고 유럽 각국의 동성애자 인권단체들이 참석하였다. 1977년 Mario Mieli는 “동성애와 혁명: 게이 비판의 요소”라는 이탈리아 게이 인권운동의 뿌리가 되는 책을 출판하였다.

    1980년 10월 31일 기에르 지방에서 두 소년의 살해 사건이 일어난다. 지방에서 이들 소년은 “i ziti”(남자친구)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동성애 혐오 범죄의 피해자임이 분명했고, 범인은 13살 나이의 피해자 한명의 조카임이 밝혀졌다. ‘절대로 행복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이 주도하여 두 소년의 동의를 얻어 살해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례는 이탈리아 미디어의 많은 관심을 얻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부 시실리에서 Fuori!의 첫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한달 후 게이로 커밍아웃한 사제 Marco Bisceglia의 제안으로 Nichi Vendola(니키 벤돌라는 공산당, 재건공산당, 좌파생태자유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동성애자이며 사회주의자이고 카톨릭신자이다. 현 이탈리아 남부 아폴리주의 주지사), Massimo Milani, Gino Bell 등이 게이 이슈에 집중하는 ‘Arci-gay’를 설립하였다. 페미니스트들은 최초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조직인 The Papesse를 건설하였다.

    기에르 지방 살인 사건은 오늘날 이탈리아 게이 운동의 시작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ArciGay의 현재 회원수는 15만에 달하며, 총 42가지 정치 문화 그룹을 거느리고 있다.(64개의 상업 바와 디스코텍 등도 포함된다.)

    게이 운동과 가톨릭 교회

    이탈리아 게이운동은 첫 시작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갈등을 빚어왔다. 동성애 운동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첫 반응은 1976년 1월 발행된 ‘성윤리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었는데, 여기서 가톨릭 교회는 일과적인 동성애자와 본질적, 고치기 어려운 동성애자를 나누고 후자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정리하였다.

    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1990년대 초 큰 갈등을 겪자 몇몇 심각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1998년 1월 13일 동성애 작가 Alfredo Ormando는 가솔린을 쓰고 세인트 페테르 광장에서 분신 시위를 하고 사망하였다. 2000년에는 로마에서 월드 프라이드가 열렸지만 교황은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동성 결합

    이탈리아는 현재 EU 초기 멤버 중 동성결합을 인정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Arcigay의 가장 큰 목표 또한 동성결합의 제도적 인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한 대규모 집회와 총선 지지 전략들을 활용하고 있다. 2006년 야당 후보 Prodi 또한 PACS 통과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일부 가톨릭을 기반으로 한 Prodi 지지세력의 분열로 이어진 바 있다.

    2006년 Prodi는 당선되었으나 동거권 인정을 위한 DICO 법률을 내놓고는 통과시키지 못하고 총리에서 물러났다. 바티칸과 가톨릭 그룹의 강한 반대와 대비되는 좌파의 약한 동맹으로 평등권 입법이 어려운 사례라 볼 수 있다.

    동성 결합 제도적 인정 추진을 위해 Arcigay가 활용하는 또 다른 전략은 노동조합과 동맹을 맺는 것이다. 1992년 “새로운 권리” 아젠다 하에 설립된 ‘새로운 권리 기구’에서 이탈리아 노조 CGIL은 레즈비언 게이를 위한 특수 분과를 설립한 바 있다.

    비록 이탈리아에서는 EU directive 실시 이전에 자체 성적 지향에 대한 반차별법이 없었지만, 이탈리아 노조는 EU 노조들을 결합시켜 반차별법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키는 중요한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2007년 Arcigay와 CGIL은 DICO 법률 통과를 촉구하며 5만명이 결집, 시위하기도 하였으며 이는 가톨릭 진영의 역시위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

    이탈리아 여성운동은 다른 나라와 동일한 과정을 통해 권익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1970년 이혼이 인정되었고 1975년 가족법이 대폭 개정되었다. 1978년 낙태가 합법화되었고 국가보건의료체계를 통해 무료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로서, 이탈리아 역시 전통적 사회구조에서 보다 현대적 게이 정체성에 수용적이 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게이 운동이 다른 서구 국가와 유사하게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으로 섹슈얼리티를 사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으로 인해 사람들을 운동이 결합시키기가 어렵다는 평가가 우선 존재한다. 게이들에게 있어서도 성별 규범이 그대로인 경우가 많으며, “바텀의” 여성스러운 게이는 낙인의 대상이다. 결혼하기 전에 가족을 떠나는 경우가 드물며 특히 아파트가 적은 도시에서 더욱 드물다.

    게이 가시성은 점점 증가하고 있지만, 매년 150-200명이 동성애 혐오 범죄로 살해당한다. 이성애자를 규범으로 삼는 정책도 계속되어 이탈리아 의사 협회는 투표를 통해 “정상 커플”에게만 인공수정을 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이탈리아 게이 인권운동은 역사는 길지만 제도화의 성과는 많이 거두지 못한 운동의 성격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하 내용은 엔하위키 미러에서 인용: 편집자>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 이탈리아의 명감독. 영어로는 Pier Paolo Pasolini라고도 쓴다.

    1922년 3월 5일 이탈리아 보로그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파시즘의 모순을 비판하는 영화들이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파시스트 고위당원이었고 메이드인 어머니를 강제로 덮쳐서 그를 얻었기에 그를 아들로 취급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아내로 여기지도 않으며 무시했다. 덕분에 어머니가 그를 홀로 돌봐야했기에 파졸리니는 아버지를 극도로 혐오했고 그가 병으로 죽자 무척 기뻐했을 정도였다.

    뒷골목 포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1961년 영화인 데뷔작 걸인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그의 영화에서는 일관된 파격성으로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때문에 감옥에 여러번 들락날락 거렸다고 한다. 동성애 성향이 있었으며, 1975년 유작 살로 소돔의 120일을 남기고 자신과 동성애 관계이던 소년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수많은 소문이 돌았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워낙에 적이 많았기에 용의자도 엄청났는데, 당시 살해현장에 난 많은 발자국 및 여러 차량 자국과 증언들 때문에 말이 많았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현장에 난 이런 증거를 없애는데 급급해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그의 몇몇 지지자들이 경찰에게 덤벼들면서 반발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그의 어머닌 죽을 때까지 아들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권력으로 은폐되었다고 비난했으며 소수의 지지자들도 시위를 벌이며 재조사를 거듭 촉구했지만 1998년 이탈리아 측은 사건 미해결로 그의 죽음을 처리한 것으로 마무리했다.

    게다가 2000년대 와서 범인으로 잡혔다는 그 소년도 당시 억지로 거짓 자백을 한 것이지 나는 파졸리니를 죽인 적도 그가 죽던 날 만난 적도 없다며 고백했다. 이럼에도 이탈리아 언론은 덮는데 급급하여 그를 지지하던 이들은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답게 교황청을 비롯한 교회를 엄청 까던 사람이지만 지인들 말에 의하면 그야말로 참된 신자라고 할 정도로 꽤나 진지한 기독교도였다고 한다. 실제 파졸리니 감독의 대표작 중에는 예수의 생애를 다룬 《마태복음》(l Vangelo secondo Matteo. 1964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도 있으며 이는 국내 개신교 관련 월간지 낮은 울타리에서 당당하게 추천하던 종교영화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이 마태복음을 보고 호평하던 바티칸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감독이 파졸리니라는 말에 기겁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이 영화가 바티칸에서 열리던 가톨릭 영화제에서도 상을 못 받은 게 심사위원을 맡은 성직자들이 파졸리니가 싫어서 일부러 외면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정도였으니.

    대표작으로는 데카메론, 켄터베리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 오이디푸스 왕, 살로 소돔의 120일, 마태복음이 있다.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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