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접속한다, 고로 차단된다
    [책소개] 『단속사회』(엄기호/ 창비)
        2014년 03월 29일 11: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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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등을 통해 한국사회 청년담론을 주도해온 저자가 새롭게 주목하는 것은 우리 삶을 뒤흔드는 근본적인 상황의 변화 즉 ‘소통 불가능에 처한 시대’다.

    그간 생생한 현장 연구와 그 사례를 해석하는 독특한 관점을 선보이며 ‘망원경과 현미경을 두루 갖춘 소장학자’라는 평을 받아온 저자는 이번 책에서 ‘단속사회’라는 주제를 내세우며 그동안의 청년담론을 넘어 한국사회 전반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인간관계의 파탄을 해석하는 번뜩이는 기지

    현대인이 관계를 맺는 현상으로 저자가 착목한 것은 바로 ‘단속’이란 개념이다. 단속은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타인의 고통같이 이질적인 것의 침입을 철저히 차단하면서, 동질적인 것이나 취미공동체에는 과도하게 접속하고 의존하는 사회현상을 개념화한 말이다. 즉, 차단하고[斷] 접속한다[續]는 의미의 결합이다.

    아울러 타인과의 진실한 만남이나 부딪침을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자기를 단속(團束)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저자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단속’으로 정하고 10여년간의 현장연구를 정리하여 2013년 「‘단절-단속’ 개념을 통해 본 ‘교육적’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구」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의 핵심 키워드를 토대로 한국사회 전반의 사례들을 새롭게 엮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가 ‘단속’을 자신의 연구주제로 삼게 된 것은, 자신의 주변에서나 현장연구를 통해 만나온 사람들이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고 자기를 단속(團束)하는 모습을 감지하면서부터다. 이때 흥미로웠던 것은 이처럼 자기를 감추고 타인과의 긴밀한 만남을 차단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늘 접속해 있다는 점이었다.

    본격적으로 이를 개념화하는 와중에 저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쏘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엄마와 마주 앉아 있지만 엄마와는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고 친구들과 카카오톡에만 열중하는 한 소년의 모습에서 저자는 큰 충격을 받고는, 이처럼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하는’ 단속(斷續)의 양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언제 누구와 접속하며 또 언제 누구와 단절하는가. 10여년간의 현장연구에서 저자는 아파트 등 중산층 밀집지역, 노동조합 등 시민사회 등의 사례를 수집해오며 이 질문에 관한 답을 차근차근 풀어낸다.

    단속사회

    한국사회는 시민 대다수가 자기가 속한 가족, 직장 내에서 소통이 매끄럽지 않음을 호소하는 한편 정작 그 불통의 당사자와는 일대일로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불통 그 자체의 공간이다.

    그러면서 그 스트레스를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또다른 힐링의 공간에서 해소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누적되며,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피로와 무력감에 휩싸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처럼 자신과 다른 남의 생각을 도무지 인정하지 못하고 소통에 무력하며 자신과 친밀한 ‘취향의 공동체’에만 기대는 것이 단속사회의 대표적 현상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이 꿈꾸던 도시는 어떤 곳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제1부는 도시공동체와 지역커뮤니티, 회사, 또래집단, 가족 등이 도미노처럼 붕괴해온 양상을 추적한다.

    특히 1980년대 이래 많은 진보적 개인이 꿈꿔온 ‘개인과 개인의 자유로운 연대체’로서의 공동체가 2010년대 들어 실제로 어떻게 하나의 망상으로 쪼그라들었는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는 서술은 저자 특유의 글쓰기가 지닌 현장감과 어우러지며 빛을 발한다.

    크게는 대통령선거에서부터 작게는 아파트 입주민 회의에 이르는 다양한 민주주의의 토대들은 폭로와 매장의 악순환에 빠졌다. 90년대 말부터 연이어진 경제위기는 공동체의 전통적 보루였던 가족을 무너뜨렸고 결국 모든 개인은 어떠한 보호막도 없이 살아가며 타인 앞에서 자기를 숨기는 자기단속의 굴레에 빠지게 되었다.

    CCTV 아래에 살면서 그것의 지나친 감시를 탓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문제일까. 그 시스템이 우리 마음 속에 어느새 자리를 잡고는 자기단속을 부추기는 것이 정작 큰 문제 아닐까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남의 고통이 곧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된 사회
    ‘힐링’ 열풍의 이면을 들춰내다

    근래의 힐링 열풍은 이런 점에서 문제적이다. 힐링의 공간을 찾아가 그곳의 멘토로부터 조언을 얻고 온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이겨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한편의 진실이다.

    힐링이 지닌 다른 한편의 문제는 그것의 출발과 도착 모두가 ‘나’를 향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를 다잡아야 한다는 주문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도무지 지금의 고통을 타인의 고통과 연결 지을 고리, 즉 “고통의 사회성을 발견할 틈”이 없다.

    타자의 고통을 생각지 않게 된 사람들의 공동체는 과연 이곳을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책의 제2부는 고통의 사회성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의 일상을 관계, 소통, 노동, 국가폭력이라는 각기 다른 렌즈를 통해 조망한다. ‘열린 토론의 장’에서 줄곧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들, 내 곁의 사람들 중에 내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인가를 세어보게 하는 세태, 국가가 노조간부·소수자·이주노동자 등 ‘내부의 적’을 잉여·유령으로 만들고자 시도하는 다양한 방식 등이 가슴 아픈 사연들을 통해 소개된다.

    고통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 대신에 우리는 가해자 옆에 한 사람의 구경꾼으로 서는 방법을 택한다.

    저자 특유의 시적인 문체가 돋보이는 제3부에서 저자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거나 속죄를 권하지 않는다. 단지, 남의 고통을 구경할 뿐 아니라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버리는 ‘구경꾼’ ‘몰이꾼’ 사회를 향해 타인의 고통이 담긴 이야기를 경청하는 게 실은 얼마나 어렵고 준엄한 일인지를 되묻는다.

    총 3부를 통해 소개되는 우리 사회의 이미지들, 그간 묻혀 있던 이야기들, 누군가 자기 내면의 고통을 느끼고 그 상처를 들여다보는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한층 뒤흔든다.

    ○○사회라는 제목의 책 대부분이 우리 사회가 이렇다 저렇다 정의 내리는 데 머물고 만다면, 현장의 삶에 가까이 다가간 저자의 처방은 남다르다.

    사회과학의 어떤 계보도 따르지 않고 본인이 직접 겪은 생생한 체험에 기반을 둔 제안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보고 당시 자신의 대처법말고도 또다른 길이 있었음을 깨우치게끔 해준다.

    다른 책들이 지금까지 ‘아프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아프지 말라’고 이야기해왔다면, 저자 엄기호는 고통의 근원으로 다가가 고통 받는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 경청의 행위를 통해 우리 삶을 복원하자는 진지한 제안을 던진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경청은 단지 귀 기울여 듣기만을 뜻하지 않는다. 경청은 낯설고 모르는 것과 부딪치고 만나며 자신의 경험을 확장하고 갱신하는 행위다.

    나의 경험은 다른 누군가에게 참고사항이 되어 전승된다. 경험이 이처럼 손에 손으로 이어져갈 때 그 사람 그 사회는 연속성을 지닐 수 있다. 지금의 단속사회를 지속가능한 사회로 되돌리는 데, 이 사소해 보이는 경청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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