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이데 히로아키
    시민과학자 그리고 박상표
    [에정칼럼] 권력과 자본 아닌 시민에 봉사하는 과학자
        2014년 02월 12일 09:39 오전

    Print Friendly

    1949년 생으로 이제 노년을 맞고 있지만, 그의 직함은 교토대학 원자력실험소 조교다. 조교? 한국에서는 대학교에서 갓 졸업한 대학생들이나 대학원들을 값싸게 부려먹기 위해서 이용하는 비정규직 인력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60대의 조교라.

    일본대학에서의 조교는 한국의 조교와는 다르게, 정년이 보장된 정식 교원 중 하나란다. 아마도 가장 낮은 직급? 그렇다고 하더라도 낯선 느낌은 여전히 남지만,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면 그 느낌 속에 굉장한 무엇인가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조교’라는 직함은 그가 생애를 걸고 지켜온 과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얻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이데 히로아키. 전공투 투쟁으로 세상이 들썩이기 시작한 1968년에 도호쿠대학교의 원자핵공학과 입학을 하였다. 핵기술이 인류의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으로 가진 신입생은 인근 센다이((仙台) 핵발전소 반대 주민집회에 참석한 후, 인생의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생을 반핵운동에 바칠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공을 바꾸지 않고 핵공학자로서 반핵운동을 지켜온 것이다. 방사능 계측과 원자력 안전을 전공하고 연구하면서,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서 인생에 걸쳐 연구하고 비판해왔다. 그리고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그는 일본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핵전문가가 되었다.

    그러나 주류 학계가 그에게 대가를 치르도록 하였고, 그 결과가 60대 조교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평생 경험했을 따돌림과 불이익의 아주 작은 조각일 뿐이리라.

    그는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그가 후쿠시마 핵사고를 추적하고 개입해왔던 기록을 책으로 엮은 <원자력의 거짓말>(녹색평론, 2012)에 번역 출판되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핵발전의 위험에 대해서 한국인들 앞에서 발표하였다. 그리고 모 방송에 출현하여 일본 후쿠시마의 재앙을 숨김없이 고발하면서 “일본 여행을 삼가면 좋겠다”는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소위 ‘국익’보다는 양심을 따르는 과학자였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은 한 칼럼에서 고이데 히로아키 선생의 방문과 그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한 젊음이가 당신에게 물었던 “왜 한국에는 고이데와 같은 양심적인 ‘반골’ 과학자가 없는가”라는 질문을 전하고 있었다([김종철의 수하한화]과학자의 양심과 ‘국익’). 사실 본인 자신의 질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과학(특히,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로 초점을 맞춘 것이라 생각되는데)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서 포섭당한 어용과학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답도 내놓았다. 대체로 동감한다.

    고-박

    고이데 히로아키(왼쪽)와 박상표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고이데 히로아키 선생과 같은 ‘반골’ 과학자는 정말 없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식민지 해방과 분담의 격동기에서 자신의 양심과 이념을 따라 살려 했던,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과학자들의 이름들이 몇몇 떠오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요즘 유행하는 ’적정기술‘ 쯤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비날론을 만든 북조선의 리승기 같은 사람들 말이다. 논란이 많겠지만.

    그러나 고이데 히로아키 선생은 과학기술의 위험을 시민들의 편에 서서서 고발하고 정부와 기업의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는 점에서는, 그와 같은 ‘반골’ 과학자를 찾는 일은 최근의 인물들로 찾아볼 일이다.

    우선 고이데 히로아키와 같이 원자력공학자 중에서 찾아보면, 그 대답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질 듯 하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정의와 양심에 따라서 바른 목소리를 전할 원자력공학자는 거의 찾기 힘들다. 반핵운동에 공감을 한 여러 원자력공학과의 학생들은 고히데 히로아키 선생과 다르게 아예 전공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력공학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면, 우리는 반골’ 과학자 몇 명쯤은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억해보자. 이명박 정부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내노라 하던 수많은 환경공학자들이 과학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거짓을 이야기할 때, 2008년에 “4대강 사업의 실체는 대운하 계획”이라며 진실을 고발한 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박사가 있다. 노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구소는 그 발언을 문제 삼아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내렸고, 그 후에도 계속 따돌림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다행히 그에게 내려진 징계를 철회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시간을 더 거슬러, 2005-6년 한국사회 전체를 미쳐 돌아가게 했던 황우석 사태를 생각해보자. 상업적 가능성과 삐뚤어진 애국주의에 진실, 윤리, 사회적 합의 같은 것은 다 던져 버리고,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가 열광하고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양심적인 내부 제보자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당시 닥터 K로만 알려졌던 그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윤리적 기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상황을 바라잡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최근 그는 다행스럽게도 이름도 밝힐 수 있게 되었으며, 숨죽여 행한 노력으로 전문의 자격을 얻고 그에 맡는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이번에는 광우병 촛불 정국을 생각해보자. 사실 그 때에 우리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여러 ‘반골 과학자’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황우석 사태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서울대의 우희종 교수도 그런 ‘반골 과학자’ 중에 한 명이다. 과학적 상식과 사회적 양심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반골 과학자’라면 당연히 그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뿐인가. 오랫동안 보건의료운동에서 앞장 선, 현업 의사이자 활동가인 우석균 선생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광우병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보건의료 문제에서 시민의 건강을 지키고 사회적 정의를 바로잡으려 노력한 그에게, 우리가 빚진 것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의사였던 박상표 선생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최근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 전해지면서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내게도 그와의 몇 가지 인연이 있다. 참여연대 활동가 시절, 그는 활동적인 회원이었다. 한국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회원들과 함께 역사 투어를 이끌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가 자신이 전공한 수의학으로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기여하기 시작한 것은 광우병 촛불 정국이었다. 국민을위한수의사연대의 정책국장을 맡아 과학자의 집요함과 성실함으로 그리고 사회적 거짓과 불의를 인내할 수 없는 시민으로써 미국산 쇠고기의 문제를 파헤쳤다.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촛불 의인’이었다.

    멋진 이름이지만 그에게 또다른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박상표 선생의 죽음과 고히데 히로아키의 방한을 동시에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 있다.

    일본에서는 고이데 히로아키 선생과 같은 ‘반골 과학자’들에게 그 용기와 헌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시민과학자’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김종철 선생도 칼럼에서 ‘반골 과학자’라는 얼마간 반어법적인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이 이름을 반길 것이다. 이미 녹색평론사가 ‘일본의 대표적인 반핵과학자였던 고(故) 다가끼 진자부로 박사의 책, <시민과학자로 살다>를 내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민과학자. 이 이름은 단지 일본 사회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자본과 국가에 의해서 과학기술의 포섭이 점점 더 심화되면서, 시민의 눈높이에서 그리고 시민을 위해서 과학기술의 위험을 연구하고 비판하는 과학자, 전문가의 역할이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 사회에서 험난한 길을 자처하고 나서고 그러다가 심지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기도 한, 여러 ‘반골 과학자‘들에게도 ‘시민과학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주어 그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격려할 일이다.

    우리에게 왜 반골 과학자, 아니 시민과학자가 없냐고 다시 묻는다면, 얼마간은 우리 사회가 그런 시민과학자들을 격려하고 그 수고에 감사하는 일은 게을리 한 탓일 수도 있다고 답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과학을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시민과학자을 알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과학기술이란 무엇이며, 과학자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토론하는 사회적 학습의 장이 부재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시민과학자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면, ‘촛불 의인’이라고 불렸던 박상표 선생에게 가장 먼저 바쳐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박상표 선생을 기리면서, 그와 좋은 파트너였던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가 제안한 것처럼(“박상표를 추모하며”), ‘시민과학자상’ 하나쯤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덧붙이는 말: 위에서 미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국사회 여기저기에서 활동하는 여러 시민과학자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대학 교수나 정부연구소의 연구자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몇 명은 구체적으로 이름도 떠오르지만, 미처 내가 알지 못하는 분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그들을 모두 기억해내고 밝혀서, 이 좁은 글 안에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