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당원, 특권층이었다고?
민주적이었다면 망하지 않았다”
[쏘련-미래 향한 추억②] 당내 민주주의, 지도부 비판 필요
    2012년 06월 18일 05: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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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 당원이었던 외할아버지의 경우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당’이라고 하면 아마도 ‘특권’ 같은 단어가 연상될 것이다. ‘당원’은 마치 사회 상부에 속하는 특권적 신분, 거의 지배계급 구성원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의 집권당 당원 수만 보더라도 이들이 모두 특권층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예컨대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북조선 노동당의 당원 수는 3백만 명 이상, 즉 성인 인구의 25%에 가까웠다. 북조선 노동당이야 현실 사회주의 권역에서 가장 대중화된 편에 속해 당원 비율이 높았지만, 쏘련 공산당의 당원수도 1986년 기준으로 약 1천9백만 명으로 성인 인구의 10%에 접근했다.

인구 10%가 특권이 있는 사회를 상상해볼 수는 있겠지만(예컨대 일본의 막부 시대에는 인구의 약 10%가 칼을 지닐 수 있고, 관료가 될 수 있는 사족계층에 속했다), 내가 기억하는 내 주위의 당원들은 특권과는 사이가 멀었다.

열성 당원이었던 나의 외할아버지는 한 대공장의 계획부장을 맡았던 평범한 하급 관리였는데, 외할아버지가 관리가 된 것은 입당 이전의 일이었다. 입당했다고 해서 월급이나 배정되는 주택, 희귀 물자(내핍이 체질화되고, 수출입이 통제되는 사회에서는 오로지 수입만 되고 국산이 없는, 예컨대 바나나 같은 과일)에 대한 접근성이 달라지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입당하고 나면 당원으로서의 자세를 지키고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일이 더 버거워진 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외할아버지의 경우 당신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자 당원들을 상대로 매주 당의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부과됐으며, 당원으로서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의식까지 생겼다.

소련을 18년간 통치했던 브레즈네프와 포드 미 대통령

비당원들에게는 쉽게 용서가 되는 작은 과실 – 예컨대 주위 사람들에게 예절을 지키지 않는 일 같은 것들 – 도 당원에게는 정기 당회에서의 논의의 대상이 되며,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당원 44% 공장 노동자

당원은 무엇보다 비당원들에게 ‘모범’이어야 했기 때문에, 사석에서의 한 번의 욕설 같은 아주 작은 실수도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 같은 무명 당원보다 ‘유명 당원’의 행실은 물론 훨씬 더 주목 받았다. 예컨대 유명한 가수인 마르크 베르네스(1911~1969)가 1958년에 도로 횡단을 잘못하고 나서 이에 대한 비판 기사가 중앙일간지(!)까지 나왔으며, 그는 이후 거의 2년 동안 대중 활동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과 당적을 믿고 거만해졌다.”는 주위의 평은 유명 당원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당원 신분 그 자체는 특권과 그다지 관련이 없었다. 실은 쏘련 망국 당시 당원의 약 44%는 일선 공장 노동자들이었고, 약 12%는 농민이었다. 당원의 신분이라 해도 살아가기가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원이 되자면 적어도 2명의 기성 당원의 입당추천서가 필요했고, 약 1년 동안 ‘후보 당원’으로 생활하면서 같은 직장에 다니는 기성 당원들의 관찰과 평가를 받아야 했다. 후보 당원이 단위 직장 당 세포 동료들의 심사에 통과되지 못해 정식 당원이 되는 것에 실패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본다면 말기 쏘련의 당원이란 기본적으로 생산 공동체, 즉 단위 직장의 ‘모범 일꾼’에 가까운 신분이었다. 하지만 입당이 어려운 만큼 당원이 되는 것은 명예로 인식됐으며, 또 그만큼 입당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단위 직장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모범적 삶을 재현하도록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모범이라는 것은 꼭 실적만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는 점이다. 모범은 ‘통념’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했고, 대다수가 도시민 1~2세, 즉 시골 출신이나 시골 출신의 자녀인 신생 공업국 쏘련에서 통념이란 것은 실은 전통 마을공동체의 통념과 거의 같았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배려하는 ‘상부상조’가 모범으로 취급됐던 것이다.

독재국가 쏘련의 자유천국

하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적지 않는 역설도 내재돼 있었다. 당 그 자체는 주민의 국가적 규율화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직장에서 인기를 얻어 ‘모범 일꾼’,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국익이나 국가 규율보다 동료들을 배려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인기를 얻어야 했다. 문제는 그 배려가 때로는 국가 규율에 정면 위반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실은 역설적이게도 ‘독재 국가’ 쏘련의 직장 분위기는 내가 지금 사는 노르웨이에 비해 거의 ‘자유 천국’에 가까웠다. 예컨대 노르웨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정상적’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무단결근, 즉 의사가 발행하는 증명서 등 정당한 이유 없는 결근이 해고 사유에 해당될 수 있지만, 전문대 교수였던 나의 어머니는 나와 내 여동생 때문에 많이 바쁠 때면 동료들에게 대강을 부탁해놓고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얼마든지 며칠 동안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서로 봐주기’는 헌법이나 노동법보다 쏘련의 훨씬 더 일차적인 ‘철의 관습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범 일꾼으로서의 평판 이외에 입당의 중요한 요건에는, 당에서 실시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기초에 대해 일정한 수준의 ‘정치 교양’을 쌓는 것도 포함된다. 내용은 국가에 의해서 다소 교조화된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학력 수준이 비교적으로 낮았던 농촌지역보다 숙련공과 기술 일꾼이 많았던 대공장이나 연구소 등에서 당원이 많았던 것은 이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 실은 이미 1960년대 초반에 과학기술 일꾼 중에서는 당원 비율은 거의 50%에 임박했다. 내가 쏘련 망국 직전인 1989년에 입학한 레닌그라드 대학교의 동양학부 교수들 중에서의 당원 비율은 70~80% 수준이었다.

약 1년 동안 거기에서 당원 신분으로 있다가 망국이 확실해진 1990년에 자진 탈당했으며, 현재 국민대의 교수이자 나의 스승이었던 안드레이 란코브씨가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동양학부의 단위 당 세포는 “교직원 클럽이자 학부의 운영위”에 가까웠다. 레닌그라드 대학 교수 당원들은 정기 당회에서 직장 운영의 중요 문제들을 의결했는데, 베테랑 당원의 목소리가 보다 강하게 들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당원들이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해고보다 무서운 자아비판

단위 세포의 당위원장이 직장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위원장 선출 과정의 마지막 단계가 지역 당위원회 조직부의 승인이 필요하긴 했지만, 표결을 통한 선출 과정 자체는 나름대로 민주적이었다.

즉, 당 세포는 모두들의 이해관계를 나름대로 배려해주고 모범 일꾼인 당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직장 운영의 핵심적 기구이었다. 그 기구는 특히 당원들 자신들에 대해 규율화 기능도 가졌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관리자의 권한을 제한시키는 등 한계는 있었지만 직장 민주주의를 보장해주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규율’이라는 말은 푸코를 주된 이론가로 섬기는 우리사회에서 다소 안 좋게 들리겠지만, 당 세포에 의한 당원의 규율화가 꼭 부정적인 면모만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당회에서의 자아비판, 당원들의 ‘동지적 비판’, 당 차원의 징계와 궁극적으로 출당의 불명예가 무서워서라도 당원인 교수들이, 예컨대 여학생을 성추행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당원들은 그러한 사건이 발생됐을 경우 발생하는 해고보다, “나는 어떻게 해서 이처럼 도덕적으로 추락했는가?”에 대해 동료 당원들에게 설명하면서 자아비판 하는 것을 더 무서워했다.

당원들이 정말 당의 사상을 상당 수준 공유했는가, 신념으로 입당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모범 일꾼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해 직장 운영에서의 발언권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입당했는가에 대해 일면적으로 단정 짓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알았던 나의 일가, 친척 중 윗세대 당원의 절대 다수는 그 신념이 아주 공고했다.

특히 혁명 이전의 러시아 제국에서의 평민들의 끔찍한 삶을 기억했던 노인, 그 중에서도 또 민족 차별까지 받아온 고려인이나 유대인 등은 그 어는 것보다도 당에 감사했다. 그래도 보다 평등한, 보다 발전되고 약자들에게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쏘련을 열렬히 옹호했던 이유

예컨대 1917년 이전이나 백위군이 점령한 내전 시기의 북부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 학살 등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비극들을 겪어본 나의 외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남들과 평등하게 교육 받아 학자가 될 수 있는 사회, 구성원 사이의 임금 차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사회, 주택 등을 무상 배정하고 무상 의료가 시행된 사회를 “내가 그리던 꿈의 사회”로 인정하며 늘 열렬히 옹호하곤 했다.

그녀는 과연 요즘 흔히 말하는 ‘스딸린주의자’였을까? 글쎄, 이 문제도 일면적으로 답하기는 어렵다. 그녀도, 수많은 다른 베테랑 당원들도, 그들이 사는 현실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나 레닌이 꿈꾼 사회, 레닌의 『국가와 혁명』(1917년)에서 그 윤곽이 잡힌 ‘새 사회’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마음 아파했다.

그들은 현실의 쏘련에서 국유화된 기업들이 노동자가 아닌, 당위원회의 견제 아래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합리성’에 입각해 뽑힌 직업적 지배인이 경영한다는 사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지배인을 직선제로 뽑지 못한다는 사실 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것이 사회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도 잘 알았다. 그들은 또 직선제로 선출되지 않는 당과 국가 관료들이 비록 생산시설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생산과정과 사회생활 전체를 비민주적으로 지배한다는 점도 비판적으로 인식했다.

브레즈네프 이후 당 서기장이 된 KGB총책이었던 안드로포프

한데 많은 당원들이 이를 사회주의 초기에 발생하는 부족한 점 정도로 이해하고, 사회가 보다 발전되면서 점차적으로 노동자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런 기대감은 “소비에트 민주주의 부활”, “레닌 사상으로의 회귀”를 구호로 내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초기에 당원들이 매우 높은 지지를 보여준 근거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 페레스트로이카를 ‘진정한 사회주의로의 이행 과정’이라고 착각했던 수많은 평당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지도자들이 실제로는 당과 국가 관료의 지배권을 소유권으로 바꾸고, 관료제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로의 회귀를 기획했다는 점에 대해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었다. 1990~91년, 당 안에서 ‘공산주의적 발의 운동’(DKI)과 ‘마르크스주의적 강령 운동’ (Marxist Platform Movement) 등이 만들어져 ‘자본주의화 결사반대’ 노선을 분명히 했지만, 이미 때가 늦은 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던 이유

절대 다수의 당원들은 모범 일꾼으로 인정받아 “평등하고 계획적으로, 인민 전체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발전되는 사회가 좋다.”는 신념으로 입당을 해, 별다른 특권이 전혀 없었던 생활을 한 데 반해, 극소수의 당원에게는 당은 출세 가도를 의미하기도 했다.

당원이 아닌 이상 일부 고급-최고급 관직(장관, 부장관, 중앙정부 부장급, 대령 이상의 군직, 학부장 이상의 학교 보직 등등)에 진출하기도 힘들었지만, 당원의 경우 당 관료로서의 출세는 비교적 빨랐으며, 노동자 등 전문교육을 받지 않은 계층들에게 널리 개방돼 있었다.

평판이 좋은 당 세포 위원장이 아예 본업을 놓아두고 지역당 전업일꾼으로 발탁되고, 그 다음에 지역당에서의 고급 관직을 가지거나 중앙당 관직으로 옮기는 것은 대표적 패턴이었다. 예컨대 보리스 옐친은 나중에 쏘련 망국에 주도적 역할을 했지만, 그의 출세 경로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옐친은 고향 스베르들로브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편집자) 하급 노동자 출신으로, 이후 건설 기술자-하급 관리자-입당-주임 기술자 발탁-건설업소 지배인-지역 당 대회 대의원 선출-지역당 건설부 부장-지역당 제1서기로-모스크바 지역당 제1서기-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의 길을 밟아왔다. 이는 당이 노동자나 일선 기술자들에게 열어주는 가능성들을 대변해준다.

대체로 60년대 이후의 당 중앙위 위원들의 경력을 분석해보면 절반 정도는 일선 노동자(약 40%)나 군에서의 일선 병사(약 10%)로 시작해 입당 이후에 당 관료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며, 나머지 절반은 대졸로서 일선 기술자 등 하급 인텔리로 시작해 역시 입당을 계기로 신분 상승을 경험했다. 중앙위 위원들 중에서 부모가 당 고급 관료가 있는 사람은 사실상 전무했다. 즉, 당은 사회 일선의 구성원들을 실력주의에 입각해 발탁하는 장치로서의 기능을 한 셈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사라지는 민주주의

‘실력주의적 발탁’이란 말이 부와 학력, 사회적 신분이 사실상 거의 대물림되는 남한 사회에서는 꽤 좋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공산당이 만든 신분상승의 메커니즘에는 하나의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

단위 세포 위원장의 선출 정도는 민주적일 수 있었지만, 그 이상 올라가면 ‘밑으로부터의 선출’보다 ‘위로부터의 발탁’이 훨씬 더 핵심적이었다. 면(rayon) 단위의 당 서기는 사실상 지역(도, oblast’)당 제1서기가, 중앙 조직부의 추천에 따라 단 한 명의 후보를 선정하며, ‘지역 당원 총투표’는 단독 후보를 선출하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중앙당 전당대회 대의원이 되려면, 형식상 선출 과정의 주역이어야 했던 지역 평당원의 의견보다 지역당의 추천이 더 중요했다. 또한 1920년 이후 중앙위 위원 선출은, 전당대회에서 비록 ‘거수투표’를 하긴 했지만, 사실상 정치국 위원 등 당의 실세들이 주도했다.

중앙당 제1서기를 정치국이 – 비교적 민주적으로 – 선출했지만 정치국의 새로운 위원의 선출에는 중앙위보다 바로 제1서기가 더 영향력을 크게 미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직장 세포 수준 이상의 당은 기존에 발탁된 세력가들이 후배들을 알아서 발탁해주는, 철저하게 과두적 (oligarchic), 피라미드형 조직이었다.

그러다보니 부풀려진 실적 내기와 아부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 됐고, 당 관료 사이에서 순응주의가 새로운 통념이 되고, 결국 신념보다 출세지향이 강한, 그리고 별다른 진정한 신념이 없는 인물들이 맨 위까지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친자본화한 이유

윗사람에게 아부해온 만큼 자기 자신들을 엘리트로 간주하고 싶어 했던 그들에게는, 평당원들과의 일체감이 전무했던 대신, 쏘련 당 간부에 비해 백배 천배 더 부유한 삶을 향유하는데다 그 재산을 자손들에게 물러줄 수 있는 자본주의 국가 지배자들에 대한 부러움이 끝 모르게 커져갔다. 쏘련 당 간부들의 경우에는 본인들의 자동차나 별장마저도 국가나 당 소유로 등록돼 자손들에게 물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 고르바초프

고르바초프나 옐친 등 말기의 당 지도자들이 친(親)자본화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배를 해도 소유를 할 수 없는 계층에 속했던 그들은, 명실상부한 소유자, 즉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가 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쏘련 공산당의 강령 내용대로 민주성이 보장됐다면 이와 같은 엘리트 지향의 순응주의자들이 과연 출세가도를 달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기가 이렇게 쉬웠을까? 비민주적 과두 조직으로서의 공산당 관료조직은, 이렇게 해서 괴물적인 ‘러시아식 자본주의’의 모태가 된 것이다.

쏘련 공산당의 절대 다수 당원들은 출세주의자가 아닌 쏘련식 직장 공동체의 ‘평판 좋은’ 멤버, 그리고 나름대로의 평등주의적이고 사회정의 지향적 신념의 소유자들이었다. 그 신념 체계에 스딸린주의적 개발주의라든가 국가주의 등이 영향을 미쳤다 해도 그 본바탕인 평등주의라든가 상부상조 사회 지향 등은 원리상 ‘좌파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입당한 당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좌파정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운영까지 책임지게 된 커다란 과두적 관료 조직이었다. 민주주의 원칙이 위로 갈수록 통하지 않았던 그 거대 조직에서 가장 출세하기 쉬운 사람들은 속으로 ‘지배자’ 되기를 꿈꾸었던 ‘실적 좋은 경영자’나 아부꾼들이었다.

당 관료는 아부꾼들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인민 위에 군림하는 엘리트로 인식하는 만큼 그들에 대한 신뢰도 말기로 가면 갈수록 바닥에 떨어졌다. 당 엘리트의 철저한 비민주성, ‘그들만의 리그’ 형성, 다수 인민으로부터의 격리(보통 운전수 달린 자가용을 타고 다녔던 지역당 제1서기 이상의 관료들은 일반 인민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등은 결국 쏘련식 체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혁명 조직이 혁명 이후에 비민주적으로 구성된 지배조직으로 탈바꿈돼 혁명을 죽이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쏘련의 역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진보정당들이 바로 민주성과 상부에 대한 비판의 개방, 상부의 군림 가능성 차단에 보다 주의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혁명이 다시 이길 경우에는, ‘혁명적 당의 영도’보다 노동자들의 직접 민주주의, 즉 소비에트식 민주주의의 착근이 훨씬 더 일차적이고 중요하다는 점도 우리가 알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가 민주적이었다면 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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