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대와 동맹의 정치
    [세계 LGBT 운동의 역사]남미 마지막편 ⑤
    By 토리
        2014년 01월 07일 11: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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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질: 탑 다운 입법 활동

    1982년 선거 직후 브라질 활동가들은 입법부 의원들(주로 노동자당 PT)과 개별적 동맹들을 강화하게 된다. 개별 의원들에게 있어 LGBT 사안들은 인권과 동시에 “소수자” 정체성으로 개념화되는 것이었다.

    활동가들은 “동성애 시민” 커뮤니티를 하나의 잘 구분된 권리적 주체로서, 다른 소수자 그룹과 동일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LGBT 활동가들과 관계를 맺은 의회 의원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여 2007년에는 상원 16명, 하원 199명에 이르며, 하원의 경우 40%에 육박하고 있었다.

    브라질의 특징은 다수 정당들이 원내에 진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게이 인권이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6년 하원 기준 21개 정당이 원내 진출하고 있으며, 정당이 다수인 관계로 의회가 약하지만 LGBT 단위의 의회 정치로의 진출이 멕시코에 비해 용이하다.

    PT 의원들을 비롯한 개별 진보적 지향의 의원들은 흑인, 장애인, 게이 등 소수자 인권 전략을 통해 인권 가치를 선거 캠페인의 중심 아젠다로 활용해 왔다.

    브라질 활동가들의 초기 입법 전략은 일종의 탑 다운 방식(낙수효과)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상부에서 낙인화된 정체성의 의미를 정상화한 후 사회 전반적으로 새로운 단어 의미가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것이다.

    1980년대 두 가지 주요 입법 캠페인 중 하나가 WHO 분류에서 동성애를 비병리화한 흐름에 맞추어 동성애를 정신병리적 요소에서 제외하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헌법에서 성적 지향을 포함한 반차별 조항을 삽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브라질 입법 활동에 있어 첫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다.

    페미니스트 의원들은 브라질 LGBT 운동의 첫 입법 사례에 디딤돌이 되었다. 동성애 낙인은 정치적 동맹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에 동성애 관련 입법 활동을 한 의원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의원들로 포장하였다.

    여성단체의 지지를 얻고자 했던 정당들의 경쟁 속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1982년 정당 정치에 입문하였고, 이는 동성애 관련 입법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또 하나는 동성애 비병리화 입법 자체가 크게 공적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개인 의원들의 성적 지향에 대한 태도를 묻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정당 다수를 아우르는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점을 성공 요인으로 볼 수 있다.

    헌법 개정은 좀 더 어려운 문제였다. 1985년 형성된 두 단체, Triangulo Rosa와 Lambda가 이 캠페인을 주도하였다. 헌법 개정은 보수적 제헌의회 의원들로부터 ‘호모 개정’이라 불리며 계속 실패하였다.

    (룰라 재선 직후 2006년 11월 연방법에서 최초로 성적 지향 관련 차별금지법이 입법 추진되었는데, 이는 여러 개혁 입법들과 동시에 추진되는 것이어서 보수정당 의원들에게도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헌법 개정 실패 이후 활동가들은 1990년대 초 70개의 지방의회와 주 헌법에서 유사한 입법을 추진하여 효과를 보게 된다. 이 입법들 또한 실효가 있기보다는 상징적 차원이었으나 상징적 효과를 얻기에는 충분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동성 커플 파트너쉽은 활동가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고 초기 활동가들은 결혼이 일종의 보수블럭의 ‘덫’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동성 결합에 대한 관심사가 높아지게 된 시기는 브라질 LGBT 운동이 HIV 예방 사업에 따른 자원 확보로 운동이 제기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1994년 리오 데 자네이로와 바이아 지역 게이 활동가들은 시민 결합을 상위 의제로 선언하는 선언식을 가졌다. 같은 해 PT 의원 Marta Suplicy가 동성 커플 간 시민결합(나중에 PCR이라 일컬어진다)을 인정하는 입법을 추진하였다. 브라질 게이 레즈비언 바이 트랜스젠더 연합(ABGLT) 역시 PCR의 인정을 주요 운동 의제로 상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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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ta Suplicy

    그러나 시민 결합 운동은 진보정당의 기반 중 하나가 가톨릭이었던 탓에 위로부터의 압력보다 아래 풀뿌리에서의 반대가 극심하여 입법에 실패하였다.

    의회에서의 실패와 반대로 성과가 있었던 부문은 사법 부문이라 할 수 있다. 1998년 브라질 대법원은 동성 커플의 상속권을 인정하였고 집단 동성 커플 인정 소송에서도 승소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이러한 성과는 상파울로의 동성애옹호국 등의 활약으로 2004년 리오 그란드 주가 최초로 동성 커플 등록제를 실시하게 되는 성과로 이어진다.

    브라질 운동 담론의 특징은 성적 권리를 보편적 인권과 리버럴 시민권의 확장으로 개념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헌법 개정 운동 시기, 전국여성권익위원회가 반차별 개정을 여성의 완전한 권익을 상징하며 브라질인들을 “시민”으로 만든다고 개념화하며 홍보한 것이 한 예이다.

    활동가들은 국제적 선례에 비추었을 때, 헌법 개정은 브라질의 보편적 인권 수준을 한 단계 앞당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시민 결합에 있어서도 활동가들은 동성 결합 인정이 보편적 시민권과 공적 공간에 대한 보편적 접근이라는 방향에 합치하며 브라질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동성애자들이 모든 시민들의 권리로부터 배제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제1세계의 문명화된 국가’로서의 브라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독재로부터 벗어난 리버럴 민주주의 국가로서 LGBT 주체를 혁명적 주체가 아닌 리버럴적 주체로 담론짓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헌법 개정 운동에 있어 활동가들은 개정 내용이 ‘성적 선호(sexual preference)’가 아닌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동성애자/이성애자/양성애자라는 본질적 정체성 담론을 받아들이는 반면 ‘성적 선호’와 같은 선택의 문제를 거부한 것이다.

    또한 활동가들은 입법 과정에서 ‘동성애 해방’이란 담론이 아닌 ‘동성애 권리’라는 담론을 점차 사용하였다. 이는 “해방”이란 단어가 동성애 행동이 무조건 옳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잘못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리버럴 담론 중심, 탑-다운 방식의 운동이 현재 브라질에서 지나치게 엘리트 중심적이며 입법 활동의 실효성이 미약하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멕시코: 주변화된 동맹

    1982년 주요 게이 레즈비언 활동가들은 멕시코 선거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정치에서 주변화된 존재였다. 멕시코는 브라질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새로 선출된 미구엘 대통령 치하에서 멕시코는 4년간 실질임금 30%가 하락했으며 경제성장률은 0%였다.

    이 기간 멕시코의 게이 레즈비언운동은 바닥의 동력을 상실하였으나 브라질의 경우와 같은 제도화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멕시코의 민주화는 대중 기반의 정당 민주혁명당(PRD)에서 활동가의 주변화, 종교 기반의 정당 국민행동당(PAN)의 득세와 함께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소수의 주요 정당들이 “평균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경합하는 경우, 할 수 있는 한 논쟁을 피하게 된다. 브라질과 달리 멕시코에서 활동가들은 주요 정당에게 요구를 행사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었고 제도혁명당(PRI) 지배 체제 이후 보다 좌파 정당으로 꾸려진 PRD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재선하는 것이 어려운 멕시코의 선거 제도 또한 의회 대표자들에게 운신의 폭을 어렵게 하고 정당 지도자들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멕시코의 입법 운동은 PRI 지배 아래서 구성된 시민사회와의 동맹, 특히 페미니스트와의 동맹 속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페미니스트 운동은 LGBT 운동이 멕시코 의회 정치의 장애물들에 저항하는데 가장 중요한 동맹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활발하게 조직되어 기존 페미니스트 운동과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운동은 1987년 제1회 라틴 아메리카 캐러비언 레즈비언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기존 페미니스트의 이성애 중심적 태도를 성공적으로 논박하였다.

    동시에 이듬해 PRI 헤게모니가 약화된 선거에서 자발적 모성, 여성 폭력 금지, 자율적 성적 선택 등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모토를 페미니스트 동맹에서 전면화하였다. 페미니스트들은 대규모이자 눈에 보이는 유권자 집단이었고 낙인화된 LGBT들에 있어 훌륭한 은신처가 되었다.

    LGBT 입법 활동에서의 페미니스트들의 중심적 역할은 1997년 레즈비언 활동가 빠트리야 지메네즈(Patria Jiménez)의 하원 선거 출마, 선출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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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tria Jiménez. Photo: Producciones y Milagros Archivo Feminista

    그리고 1998년 멕시코 연방지구 의회에서 성적 다양성과 인권에 관한 첫 포럼이 구성된 것은 그간 수년간 제도화가 운동 아젠다가 아니었던 멕시코 LGBT 운동이 제도화의 발걸음을 내딛은 시작이라 할 수 있다.

    2000년에는 또 다른 레즈비언 활동가 Enoe Uranga가 연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PDS). 반차별법과 시민결합 제도화 역시 여성운동 캠페인에 의해 주로 제안되었다.

    1999년 멕시코 연방 의회는 멕시코 최초로 성적지향이 포함된 반차별법을 통과시켰다. 2009년 연방 의회는 멕시코시티 동성결혼을 입법함으로써 멕시코시티는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지역이 되었다.

    사회민주당(PDS)는 페미니즘과 성적 다양성을 선거 캠페인의 핵심으로 삼으면서 여러 ‘성적 다양성’ 후보들을 출마시켰다. 페미니스트 정치 연합 Diversa와 선거 동맹을 맺었고, 자신들을 “현대화된” 좌파 정당으로 대중 기반 PRD와 구분지었다. Uranga의 선거는 페미니스트 운동이 국가 대상 아젠다에서 성적 다양성을 핵심 의제로 삼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브라질에서처럼 멕시코에서도 HIV/AIDS 유행이 국가와 활동가들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지배 정당 PRI가 공식적으로 게이 조직 활동가들을 초청하고 활동가들의 AIDS 컨퍼런스에 보건부 관리가 참석한 것도 최초의 일이었다.

    AIDS 이슈에 있어서 입법 활동보다 정부 테크노크라트 관료들과의 직접 협상 경로가 더 중요해졌고 AIDS 이슈를 대응하는 그룹들은 “HIV/AIDS 예방”과 “성적 건강”이라는 구호 하에서 다른 그룹들과 더 잘 뭉칠 수 있었다. (“나는 게이 남성으로서 이런 저런 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적 건강과 재생산권을 주장하는 우리 그룹은 이런 저런 사항을 요구한다”는 레토릭을 활용하게 됨)

    비단 AIDS만이 아니라 성교육 영역에서 250개 그룹을 묶은 네트워크 DEMYSEX 역시 광의의 의제화로 구성된 시민사회라 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국가에 대한 직접 요구 형태라 할 수 있는 이들 모습은 제1세계식 리버럴리즘이 도리어 협소한 정체성 프레임으로 만들어 버릴 것을 우려한다.

    멕시코 LGBT 운동은 보다 광범위한 시민사회와의 연합 전술이 입법 활동에서 유효하였고, 성적 지향보다 ‘집합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주요 담론으로 채택하게 된다.

    근대성, 보편적 인권 등이 주요 담론으로 활용되었다면, 한편으로는 교회와 구분되는 세속주의 주장 또한 멕시코에서는 효과적인 담론이었다. 세속주의의 관점에서도 집합화된 정체성으로서 ‘성적 다양성’은 ‘성적 지향’과 구분되는 담론으로 채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적 지향’이 정신병리학의 산물이라면 ‘성적 다양성’은 문화적 가치를 드러낼 뿐 아니라 성적 경험 인정을 개념화하는 것”

    동성결혼 이슈에서도 멕시코 운동은 유사한 전략을 구사했는데, 600개가 넘는 단체로 구성된 ‘동거인 사회 네트워크’를 조직하면서 시민결합이 단지 동성 커플 뿐만 아니라 ‘인간연대, 상호 이해, 친밀성의 결합에 기반한 공동생활을 꿈꾸는 누구나’ 필요한 요구임을 내세우게 된다.

    나가며

    멕시코에서는 2006년 성-젠더 저항(Sexual-Gendered Dissidence) 기치 아래 일련의 그룹들이 새로운 전지구적 다양성 가치화가 상품화 및 비정치화가 될 위험에 반대하며 모였다.

    이 연맹은 급진적 학생 그룹, 폴리아모리스트, vestidas, 성노동자들을 묶었고 ‘마르코스(Subcomandante Marcos)’, ‘Delegate Zero’ 등 의회 좌파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치아파스 지역의 일부 의회를 장악한 이후 마르코스 그룹과 사파티스타 해방 군대는 섹슈얼리티 및 젠더 다양성에 대한 방어를 함께 하였다.

    멕시코나 브라질이나 오랜 독재를 벗어나 민주화 절차를 밟은 국가이며 나름 페미니스트, 진보 운동, 진보 정당, 국가 관료 등과의 다양한 협상과 동맹, 경합을 통해 LGBT 운동 나름의 성과를 쌓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두 국가에서 LGBT 운동이 채택한 담론이나 전략은 꽤 다른 편이다. 이러한 차이를 낳게 된 데에는 의회 정치로의 진입 장벽, 정당 정치의 차이 등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어떤 단위와 어떤 동맹과 연대 전략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LGBT 운동의 영역이나 범위도 다양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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