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참교육의 함성으로
[산하의 오역] 1989년 10월 어느 날의 기억
    2013년 10월 25일 05: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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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운동권이었느냐는 질문을 들으면 대개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과거를 은폐(?)하려는 수작이 아니다. 운동권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기에는 나는 너무나 게을렀고 ‘리버럴’했으며 투철하지 못했고 각성하지도 못했다. 조국이든 노동자든 뜨겁게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89년 가을에는 꽤 열심히 데모했던 기억이 난다. 전교조 싸움 때였다. 조국통일이건 노동해방이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모토였지만 (내 피부는 좀 두꺼워서 닿아도 모를 수도) 전교조 싸움은 달랐다.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손칼을 올려부치던 선생님들의 말은 바로 내가 겪은 일이었고 듣고 본 일이었고 느끼고 통감하는 바였고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 일생 최대의 명연기로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대한민국 학교 다 좃까라 그래”라는 울부짖음에 대한 선생님들의 최선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도 뜨거웠지만 나도 나름 뜨거웠던 89년 가을을 되짚으면 떠오르는 풍경이 몇 개 있다.

89년 10월 하순이었다. 아마도 오늘 10월 25일쯤 되었을 것이다. 당시 전교조 이름이 붙은 집회는 문화제든 강연회든 무조건 원천봉쇄였다. 심지어 학교 안에 경찰이 들어와 행사 참가자들을 홀라당 엮어 가기도 했다.

교문 앞은 장학사들로 득시글거렸다. 이들은 학교 정문 앞까지는 진출 못한 경찰을 대신하여 행사에 참여하려는 중고생들과 교사들을 솎아내는 임무를 맡고 있었고 경찰도 아닌 주제에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며 돌아다녔다. 나는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상소리를 쏘아대는 생애 첫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이값을 해. 이 개새끼들아”라고. 잘한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후회는 없다.

장학사들과 다투는 와중에 갑자기 클랙슨 소리가 쩌렁 울렸다. 놀라서 바라보니 몇 명의 여중생들이 무단횡단을 해 교문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경찰 그득한 학교 앞 지하도를 건너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입술을 꽉 깨물고 학교로 달음박질치던 여중생들의 표정은 참 길게 마음에 남았다. 아이들이 교문에 들어섰을 때 박수를 쳐 준 수십 명의 대학생 오빠들 사이에서 쑥스럽게 내밀던 귀여운 혓바닥과 함께. 그렇게 선생님을 찾으러 온 아이들과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선생님과의 ‘문화제’도 경찰은 허용하지 않았다.

“무조건 학교 친다.”는 성북경찰서의 전언이 있었고 행사장에서 가까운 법대 후문에 페퍼포그가 수백 명의 전경과 함께 등장했다. 이미 정문은 전쟁터였다. 그때 정문은 기독교 학생 연합회, 불교 학생연합회 등의 동아리연합회 종교분과가 주축이 된 학생들이 막고 있었는데 그들은 성스러울 지경으로 열심히 싸웠다. 머리 속에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애들이랑 선생님은 우리가 막아 줘야 된다.”

가까스로 협상이 됐다. “지금 당장 행사를 종료한다면” 무사귀가를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환호했고 교문 앞에 두 줄로 늘어서서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배웅했다. 절박한 벼랑 끝에서 가까스로 뚫은 혈로였지만 웃음이 넘쳤고 노래도 유쾌했다. 그때 부른 동지가의 가사는 그야말로 리얼감 충만이었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 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도로 저편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백골단 몇 명이 여학생들과 그들과 함께 하던 선생님들을 덮친 것이다.

그때 많은 이들이 그랬겠지만 내 눈도 돌았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들었다. 화염병에 불이 붙여졌지만 나는 던지지 않고 그냥 들고 뛰었다. 가장 근접한 곳에 가서 면상에 그냥 부어 버리리라는 살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격노’는 국정원장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한 덩치 큰 학생이 전경들 사이에서 맨주먹으로 치고받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아는 후배였다. 언젠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을 먹는 모습을 보며 웃어제끼기도 했던 소심한 친구였다. 그 역시 미친 듯이 분노해서는 아무런 무기 없이 황소처럼 날뛰며 울부짖었다. “이 개새끼들아~~~~” 녀석은 울고 있었다. 아마 나도 그랬을 것이다.

전교조 집회라면 빼놓을 수 없는 노래가 “참교육의 함성으로”다. 독일의 노동가요의 첫 머리를 살짝 표절했던 이 노래는 89년 가을의 주제가와도 같았다. 솔직히 가사는 좀 ‘꼰대’적이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굴종의 삶을 떨쳐 기만의 산을 옮기고….” 이게 노래 가사냐 문건의 한 대목이냐 말이다. 하지만 그 퍽퍽한 가사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함락시켰다.

89년 전교조 선생님들을 응원하던 학생들의 모습 자료사진

89년 전교조 선생님들을 응원하던 학생들의 모습 자료사진

11월 초 쯤 학교에서 열린 대규모 연합 집회에서도 그 노래는 불리웠다. 전교조 선생님들, 대학살이 진행된 뒤라 ‘해직’자가 교사 앞에 붙어 있던 그 시대의 스승들이 무대에 올랐다. 장비를 챙겨 드리느라 무대 근처에서 그들의 노래를 지켜 보는데 역시 <참교육의 함성으로>가 울려 퍼졌다.

흥얼흥얼 따라 하며 건성건성 팔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노래가 2절로 옮겨갔다.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이제 교육 동지 뜻 모아 단결 전진한다….” 음악 선생님들이 끼었는지 노래를 꽤 잘하셨는데 다음 대목에서 나는 한 선생님에게 눈길이 꽂혔다. “함께 가세 이 길 아이들의 넋이 춤추는…..” 이 대목을 부르다가 마이크에서 입을 떼시고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것을 본 것이다. 선생님은 그 후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눈물을 참느라 이만 악물고 계시다가 무대 뒤로 내려가셨다.

가사의 ‘아이들의 넋’이란 지금처럼 흔하게 학교 옥상에서, 아파트 자기 방에서 떨어져 죽었던, 바위 같은 중압감과 공포스러운 외로움에 바스라졌던 수많은 아이들의 넋이었다.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라고 중얼거리며 마지막 별을 바라보고 “내 책가방에는 무엇이 들었길래 이렇게 무겁니”라고 한탄하던 아이들에 대한 마음을 담은 가사였다. 그 가사에 걸려 선생님은 노래를 끝맺지 못했다.

하지만 그 끝나지 않은 노래는 세상 어떤 노래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눈물이 고마웠다. 그 답답한 고딩 감옥에서 석방된 지 2년도 안된 청년이었던 나는, 아이들을 생각하던 선생님들이 학교장 눈 밖에 나서 어떤 꼴을 당하는지를 봤던 증인이었던 나는, “돈 없으면 학교 나오지 마라.”는 불화살같은 말이 친구들의 가슴에 박히는 것을 봐야 했던 나는 그 눈물이 눈물날만큼 고마웠다. 자신의 삶을 걸고 죽어간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자신의 천직을 걸고 학교를 수렁에서 건져 내겠다는 분들 앞에서 불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렀다. 사반세기다. 전교조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고 변하기도 변했고 늙을만큼 늙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떨어져 죽고 있고 공교육은 이미 끝났다는 저주 섞인 탄식 앞에 더 치열해지고 더 지독해진 입시경쟁의 들머리에서 전교조는 그렇게 유력하지 않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전교조라는 조직 자체는 우리 역사가 빚어낸 하나의 성채라고 여긴다. 전교조가 한 일이 무엇이 있느냐는 항변도 있겠지만 전교조가 없었더라면 하는 가정이 나는 더 끔찍하다. 기간제 교사들의 비극 앞에서 “정의감 세우기보다는 연금 타먹을 욕심만 그득한 귀족 노동자들”이라는 독설도 일리가 있겠지만 단 몇 명의 해고자 조합원 때문에 수만 명을 법외로 몰겠다는 정부의 억지에는 만분의 십만분의 일의 일리도 없다.

무엇보다도 전교조는 경찰 아저씨들과 장학사 개기름들의 저지를 뚫고 마른 다리를 놀려 무단횡단을 감행하던 여중생들과 죽어간 아이들을 기리는 노래 가사에 입을 틀어막혀 눈물로 노래를 맺어야 했던 선생님들이 만들었다. 전교조가 지켜져야 하는 이유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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