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음모다
- 노동계급의 문학작품 읽기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노동문학에 더 관심과 애정을
    2013년 10월 21일 10: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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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현실을 모방한다거나 반영한다는 말이 있지만 문학은 현실을 모방하거나 반영하지 않는다. 문학은 거짓된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거짓된 현실은 노동계급의 독자에게 거짓된 가치를 심어 노동계급을 우롱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문학을 읽는 대부분의 노동 계급 독자가 이 우롱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사건이 너무나 많고 이 많은 사건들은 거의 서로 관계없이 일어난다. 또한 현실의 나는 과거에도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고 앞으로도 가난할 것이다. 부자들은 옛날에도 부자이고 지금도 부자이고 앞으로도 부자일 것이다. 힘 있는 자들이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현실의 세상은 좀체 변하지 않으며 모순은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에서와는 달리 문학의 세계에서는 사건들이 서로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고 또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문학의 대표적 갈래인 소설에서는 모든 사건이 인과 관계에 따라 짜여 있다. 소설의 앞에 일어난 사건은 필연적으로 뒤에 일어날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아무런 의미나 결과 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모든 인물은 우호적 관계이든 적대적 관계이든 보조적 관계이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제기된 문제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은 해결된다. 설사 해결되지 않더라도 해결의 실마리가 소설의 끝에 제시된다.

소설에서 나오는 사건과 인물들이 이렇게 문제의 해결을 향해 서로 인과관계로 짜여 있는 것은 소설가가 그렇게 꾸며냈기 때문이다. 이를 소설의 구성, 또는 이 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그대로 따와서 플롯(plot)이라고 한다.

소설의 구성은 여러 방식이나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의 구성은 대개 처음에 그 소설에서 다루는 중요 문제가 갈등이 제기되고 그 문제가 확대되다가 그 문제에 관련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고 문제가 차근차근 풀리는 단계를 거쳐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소설의 구성이 작가의 기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 제기된 문제는 사실상 소설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해결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런 소설을 읽어가는 독자는 그 소설가가 제시하는 해결을 소설의 결말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독자는 소설의 처음에 제기된 문제에 대해 초조하게 궁금해 하면서 소설을 읽어가지만 사실은 소설가의 독자를 사로잡는 계략에 이미 빠져 있는 것이다. 잘 짜인 소설의 구성이란 결국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의 뛰어난 계략의 다른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작가의 전략적 결과물

소설의 이야기를 짜는 방식을 뜻하는 영어의 플롯은 기본적으로 해를 끼치는 일을 뒤에서 꾸며내는 행위, 즉 우리말의 음모를 뜻한다. 소설의 구성은 독자에 대한 소설가의 음모이다. 소설가는 소설적 음모를 통해서 현실에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해결이 가능한 것처럼 보여준다. 소설가는 또한 해소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를 해소될 수 있는 다른 문제로 바꾸어서 소설에서 제시하기도 한다.

돈 많고 잘생긴 현실의 남자는 예쁘지도 않고 배운 것도 없는 나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남자이지만 소설에서는 그런 남자가 나와 같은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해결이 안 되는 신분과 계급의 갈등이 소설에서는 해결되는 것으로 제시된다. 현실의 돈과 계급의 문제는 소설에서는 흔히 사랑의 문제로 바뀐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것이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문제 해결 방식이다.

소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소설의 인물과 독자를 동일시하는 효과에 의해 이루어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는 대부분 주인공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감정을 이입한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해결이 안 되는 세상만사를 잊고 주인공이 겪는 문제를 같이 경험하며 주인공이 해결하는 문제를 같이 해결하며 주인공이 도움을 받을 때 같이 도움을 받는다. 주인공은 나의 화신이 된다.

노동계급의 독자가 박경리의 <토지>를 읽을 때 그는 노동자의 신분을 잊은 채 이 소설의 주인공인 서희가 된다. 남성 노동자라면 서희와 결혼을 하게 되는 길상이가 된다.

이 소설에서 서희는 한국의 봉건사회의 양반 계급이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변신하는 인물이다. 독자가 서희에게 감정이입하여 서희와 동일시될 때 그 독자는 한국 사회의 봉건적 양반계급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가 계급으로 변신하며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역사적 변화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 소설의 주변 인물들은 서희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서희 중심의 질서를 재구성하는 하는 데 기여한다. 비천한 출신의 길상이는 몰락 직전의 양반 계급에 속하는 서희를 도와 자본가로 변신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노동계급의 독자가 길상이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독자는 신분 차이로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길상이와 서희의 결합을 마치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주인공인 서희와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소설의 중심 세계에서 배제된다.

<토지>의 귀녀, 가장 노동계급적 인물

소설에서는 또한 독자가 동일시의 대상으로 설정되지 않는 인물도 있다. 예를 들어 <토지>에서 신분 상승의 욕망으로 주인공 서희의 아버지인 양반 최치수를 죽게 함으로써 전형적인 악인으로 등장하는 귀녀는 그녀가 갖고 있는 양반 계급에 대한 증오로 인하여 독자의 동일시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렇지만 <토지>에서 귀녀는 노동계급과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하나이다. 독자는 서희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봉건 질서가 자본주의적 질서로 재편되는 역사적 과정에 동참하지만 귀녀와는 거리를 둠으로써 귀녀가 갖고 있는 하층민의 계급의식으로부터도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다. 독자가 서희 중심의 세계에 공감하고 귀녀의 가치를 거부할 때 이 소설이 지향하는 새로운 시대의 자본주의적 질서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은폐되면서 공고해진다.

이런 갈등의 해소, 또는 해소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독자의 호감에서 배제시키는 소설적 동일시의 효과는 이 소설이 소설적 구성, 즉 음모를 통하여 현실에 존재하는 갈등을 봉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소설이 소설적 음모를 수단으로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가짜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를 은폐하고 현실의 갈등을 봉합하는 이유는 소설가가 대부분 그 스스로 지배집단에 속하거나 지배집단과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소설가들은 자본의 가치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그 자본의 지배 질서를 엎어버리는 데 관심이 없다.

소설가들이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 예를 들어 사랑, 가족, 예술, 미, 자연 등을 소설적 음모를 통하여 옹호하려 할 때 현실에서 절대적 힘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힘은 더욱 더 공고해진다. 소설은, 더 나아가 문학 일반은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

소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현실의 질서를 공고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문학사에 기록되는 고전들은 더욱 더 그러하다. 수많은 문학작품 중 명작이라고, 고전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배 집단에 속하면서 고급 교육을 받은 비평가들이기 때문이다.

구성이 돋보이는 잘 짜인 문학, 가난과 같은 현실적 문제보다도 사랑이나 인류의 구원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종류의 문학은 노동자들을 위한 문학이 아니다. 이런 문학은 사회의 기득권층을 위한, 기득권층의 문학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 많은 사람을 보지 않고 살 수 없듯이 또는 사장님 사모님이 나오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듯이 이런 문학을 노동자들도 읽어야 하고 또 읽게 된다.

노동자들의 이야기, 노동자 문학에 관심을

그러나 이런 문학을 읽을 때는 자신이 노동계급에 속한다고 믿는다면 이 작품의 음모에 농락당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면서 전투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렇게 읽어야 이런 문학에 숨어있는 기득권층의 농간을 읽을 수 있고 또 그런 농간을 부리는 기득권층의 문학 생산자들에게 맞서 대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문학 작품이 현실에 존재하는 지배질서에 기여하지는 않는다. 투쟁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직접 쓰는 시, 산문, 현장 일기, 격문, 통신문 등은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 싸움, 투쟁 전략 등을 기록한다. 이런 문학은 문학 비평가들이 좋은 문학 작품이라고 읽기를 권하는 문학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시나 소설 같이 잘 짜인 글만이 문학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모든 이야기가 문학이고 모든 글이 문학이다. 그런 모든 글 중에서 노동자라면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는, 노동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노동자 문학을 찾아 읽을 필요가 있다. 노동문학이 많이 위축되었지만 아직도 노동자들은 혼자서, 그리고 노동자 모임을 통하여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노동계급에 속한 독자들은 이런 글들을 찾아 읽으며 노동자들끼리 공감하고 또 연대를 다져야 한다.

세상사가 그렇고 세상 사람들이 그렇듯 문학에도 우리 편이 있고 저쪽 편이 있다.

작은책

필자소개
민교협 회원,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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