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달라져도 노동자 처지는 똑같아
[아빠의 현대사 42-2] 노동자에 대한 김대중 정권의 전쟁
    2012년 06월 18일 12:44 오후

Print Friendly

노동자에 대한 전쟁

왜 그랬을까? 민주노총은 2000년 5월 31일 총파업을 진행했었다. 주5일제 근무와 비정규직 문제해결, IMF 피해 원상회복 등이 주요 요구였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눈엣가시 같은 요구였다.

당시 의약분업문제로 인해 의사들이 폐업을 하는 등 어수선했다. 우리가 “의사한테 뺨 맞고 노동자에게 분풀이”한다라고 했던 이유다. 경찰 투입 전인 6월 27일 김대중 대통령은 노동자들을 향해 “법질서를 엄중히 지키도록 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가장 만만한 노동자들에게 곤봉과 방패를 휘두름으로서 사태 전환을 꾀했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으로 보자면 반값 등록금이나, FTA 반대 등과 같은 주요 사회 현안도 아닌 사업장안의 임금인상과 단체교섭에까지 경찰 폭력을 동원한 것이다. 노동자 편이 아니라 자본의 편임을 분명히 보여준 사태였다.

조금만 더 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IMF 외환위기를 가져 온 것은 노동자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리해고 요건 완화 등 모든 책임은 노동자들에게 전가되었다.

한국비정규투쟁의 전환점이 된 00~01년 한통계약직투쟁

김대중 정부는 포항제철과 한국중공업 등의 민영화, 공공부문에 대한 구조조정, 비정규직 확산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다.

“강성노조가 힘을 잃고 있으니 안심하고 투자해 달라”고 그해 9월 22일 일본에서 그(김대중대통령)가 한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그 전에도 이미 만도기계에 대한 파업 진압, 조폐공사에 대한 파업유도 사건 등 직접적인 탄압은 물론 공공부문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감사원 감사 등을 동원하고 있었다.

정부는 달라졌지만 노동자들의 처지는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 셈이다. 이런 정부의 방침에 맞게 롯데호텔의 신격호 회장은 민주노총에 대해 58억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뜨거운 여름, 명동성당 농성과 단식투쟁

민주노총은 즉각적으로 정부의 ‘공안탄압’에 대한 대응을 시작했다. 정부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7월 3일부터 명동성당에서 지도부 농성을 시작했다. 7월 11일에는 단병호위원장 등 지도부의 삭발에 이어 27일부터는 서울역에서 노숙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서울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동시에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7월 내내 전국적으로 100번이 넘는 집회에 10만명이 넘는 조합원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은 더욱 심하지만 당시에도 서울역에는 노숙자들이 많았다. 노숙자들은 때로 술에 취해 농성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하지는 않았다. 새한노조와 롯데호텔 조합원들이 지켜주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경찰폭력에 대한 생생한 사진을 전시하고 비디오 등을 틀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던 많은 시민들이 격려해 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8월 7일 경찰이 투입되었던 국민건강보험공단의사회보험노조 최진욱 경인지역본부 총무부장이 공단 앞 해방광장 집회참석을 위하여 화서 전철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던 중 전철고압선에 감전 사고를 당했다. 보통 깃대로 쓰이는 낚시대가 고압선에 닿아 전신 60%의 화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지금은 전태일 열사가 묻혀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다. 장례식날 아주 어린 아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픈 일이다.

김대중 정권의 노조탄압이 한 가정의 평화를 송두리째 부순 셈이다.

단병호 위원장의 무기한 단식투쟁은 롯데호텔노조의 투쟁이 끝날 때까지 27일간 지속되었다. 너는 잘 모르지만 땡볕에 하는 단식은 더 힘이 든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 그 자리에서 KTX 여승무원들이 민세원 지부장을 시작으로 단식투쟁을 했었다. 시간은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노동자의 처지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 셈이다.

투쟁의 승리와 근본적 변화를 위한 투쟁준비

롯데호텔노조는 8월 21일 교섭을 타결한다. 그 결과 입사 후 3년이 지난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113명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방중재 조항은 2년 뒤 자동 삭제하기로 했다. 임금도 10% 인상하고, 파업기간 중 무노동 무임금을 보존하기 위해 연말에 상여금을 지급하기로도 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전체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이룬 성과였다.

거대한 재벌과 정부에 맞서 싸운 지 54일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다. 힘든 투쟁이었지만 돌아보면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모두 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나로 모인 노동자들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이런 투쟁이 있었기에 95년 민주노총을 만들 당시 862개 노조 418,154명이었던 조합원은 그해 9월 현재 1,341개 노조 586,809명으로 16만명이나 증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김대중 정부의 정책노선을 바꾸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투쟁이 필요했다. 민영화도 막아내고,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모는 정책을 바꾸고, 주5일제를 쟁취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했다. 특히 반복되고 있는 경찰폭력에 대해서는 뭔가 단호한 조치가 필요했다.

당시 민주노총 조직쟁의실에는 내노라 하는 다부진 활동가들이 많았다. 특히 민주노총의 양대 산맥인 금속노조에는 한석호가, 우리 연맹인 공공연맹에는 김철운이 조직실장을 맡고 있었다. 네 중고교 동창인 신주엽의 아빠인 신언직도 민주노총 조직국장으로 함께 일할 때였다. 어느 날인가 경찰 폭력에 대한 규탄 집회를 마치고 행진하는 중에 경찰이 치고 들어와서 당시 민주노총 조직부장이었던 심동진이 크게 부상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 날이 아들 돌인가 백일인가 해서 대구로 내려가기 전 집회에 참석했었는데 심한 부상을 입었다.

경찰 중에는 우리가 ‘일빵빵 부대’라고 불렀던 100으로 시작되는 특수부대가 있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특수부대로 시위진압을 전문으로 하는 경찰들이었다. 그들은 롯데호텔 투쟁 내내 시위대를 위협하거나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았다. 전두환 정권시절의 백골단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진화한 셈이었다.

나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만이 아니라 웬만하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노동자들의 바램이다. 그러나 힘을 가진 사람들은 약해 보이는 사람에겐 더한 폭력을 가한다. 그에 대항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굴종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뭔가 준비를 해야 했다.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가지고, 야만적인 폭력에 주눅들지 않게 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다.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