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 세익스피어 있다면
    조선에는 연암이 있다'
    [책소개]《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박수밀/ 돌베개)
        2013년 07월 27일 11: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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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당대에 이미 문장가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후배 문장가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특히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이에겐 글쓰기의 본보기가 될 만한 문학적 스승이나 선배가 있게 마련인데, 많은 이들이 연암을 그 대상으로 지목했다.

    19세기의 문장가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글쓰기의 모범으로서 연암을 평생 흠모했다. 홍길주는 어린 시절 연암의 처남 이재성(李在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생전에 연암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홍길주는 <연암집>을 처음 접하고서 마치 절경(絶景) 속으로 들어가는 황홀함을 체험했다. 이후 연암의 글은 홍길주 자신이 되었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연암의 문장은 퇴계와 율곡의 도학(道學), 충무공 이순신의 용병술과 더불어 조선의 세 가지 최고라고 하였다. 김택영은 말하길, 연암의 글은 사마천의 글을 쓰려 하면 사마천의 글을 썼고 한유나 소식의 글을 쓰려 하면 한유나 소식의 글을 썼다고 하면서 천년 역사 가운데 그 탁월함은 우리나라 문장가 중에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구한말의 문장가인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우리나라 문장가들이 입만 열면 성명(性命)을 말하고 성리학을 베끼는 폐단을 보였지만 오직 연암만이 여기에서 벗어났다고 칭송했다. 역대로 수많은 학자들은 연암의 문장에 매료되었고 연암을 우리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연암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의 <열하일기>는 세계 최고의 기행문으로 일컬어지며, 한 연구자는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조선에는 연암이 있다고까지 자부했다. 고전문학을 통틀어 그 작품에 대해 가장 많은 논문 편수를 보여주는 이를 꼽으라면 단연 연암이다.

    연암에게는 중세와 근대, 탈근대의 모습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연암은 ‘그때’의 구조 속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구조를 성찰하고 구조의 너머를 바라본다. 그는 모든 인간들이 ‘그때 저기’를 향해 갈 때 ‘지금 이곳’을 이야기하자고 한다. 지금 이곳이 과연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묻고 불합리한 세계와 치열하게 대결한다. 그와 같은 고심과 인문 정신은 지금 현실에서도 여전히 쓸모 있다. 그가 남긴 멋진 자산들을 지금 이곳에서 실제로 활용하기 위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상생과 공존을 이야기하는 연암의 글쓰기

    “그대는 신령스런 지각과 예민한 깨달음이 있다고 남에게 잘난 척하거나 사물을 업신여기지 말게. 저들이 만약 약간이라도 신령스런 깨달음이 있다면 어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겠으며, 저들이 만약 신령스런 지각이 없다면 잘난 척하고 업신여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냄새나는 가죽 부대 속에 문자를 갖고 있는 것이 남들보다 조금 많은 데 불과하다네. 저기 나무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땅속에서 지렁이가 소리 내는 것이 시를 읊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초책楚?에게 주다」

    이 책의 저자 박수밀 선생은 연암 글쓰기의 본질이 창작의 영감을 자연 사물로부터 받은 데 있다고 보고 있다. 물론 자연 사물에서 문학의 근원을 발견하려는 태도는 연암만의 생각은 아니다. 전통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자연과 문학의 친연성(親緣性)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불교, 노장 사상에도 자연과 문학, 자연과 사회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전통 성리학자들이 바라보는 자연사물은 이미 실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道)가 체현된 이상향일 뿐이다. 그런데 연암이 자연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자연사물의 원리를 들어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함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연암은 자연에 대해서는 창조와 변화의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인간과 사회는 모순되고 병들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사물의 생태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인간 사회를 고발하고 교정하는 데 활용하려 한다.

    오늘날 생태에 대한 관심이 인간과 문명의 폭력성과 잔인함에 대한 반성으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연암의 자연 사물에 대한 접근 태도는 오늘날 생태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바가 있다.

    저자는 연암 글쓰기의 주요한 특성을 ‘생태 글쓰기’라고 명명한다. 생태 글쓰기는 오늘날 도구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글쓰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으며,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리는 언어의 회복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글짓는 법

    연암의 글쓰기는 전략이다

    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연암은 평생에 걸쳐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과 단순 모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면 진부하지 않은 글, 판에 박히지 않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고민은 연암의 창작 활동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그가 진부한 글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어떤 방침과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진심(眞心)의 글을 쓰라

    “글이란 뜻을 드러내면 그만일 뿐이다. 제목을 앞에 두고 붓을 들 때마다 옛말을 떠올린다거나, 애써 경전의 뜻을 찾아내 그 뜻을 빌려 와 근엄하게 만들며 글자마다 무게를 잡는 자는, 비유하자면 화공을 불러서 초상화를 그리게 할 때 용모를 가다듬고 화공 앞에 앉는 자와 같다.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옷의 주름은 쫙 펴져 있어 ‘평상시 모습’을 잃어버리니,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도 그 ‘참됨’을 얻기는 어렵다. 글을 쓰는 것도 또한 이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공작관문고 자서」

    연암은 서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글이란 뜻을 드러내면 그만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뜻을 드러내다’라는 말의 원문은 사의(寫意)인데, 직역하면 ‘뜻을 쏟아낸다’는 뜻이다. 연암이 창작의 요체로 설명하는 사의(寫意)는 연암 글쓰기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내 진심을 표현하면 그뿐이다. 진심을 표현한다는 것은 내 품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글의 본질은 닮는 데 있지 않고 멋있는 표현에 있지도 않다. 작가의 내면세계가 저절로 드러나 있는 글, 대상의 평소 자연스런 모습을 잡아내는 글이 좋은 글이다. 비속어나 일상의 말도 내 진심을 드러내는데 소용된다면 의미가 있다.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쏟아내면 평범한 말도 저절로 새롭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연암이 생각한 글쓰기의 본질이다.

    아프고 가렵게 하라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과정록>

    연암이 생각하는 저술의 의미는 도덕과 인륜에 있지 않고 뜻을 펴지 못한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를 발분저서(發憤著書)라고 한다. 뜻을 얻지 못한 일을 당하고 나서 그 속상함의 에너지를 글로써 풀어내는 것이다. 연암은 위선적인 유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많이 썼다. 「허생전」, 「호질」, 「양반전」, 「마장전」 등에는 특히 그와 같은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연암 자신이 유학자임에도 자기 내부의 부조리를 비판한 것이기에 연암의 글을 싫어하고 불쾌해하는 유학자들이 많았다. 연암의 글은 독자를 아프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화나게 하고, 깨우치게 하고, 움직이게 했다.

    지금 눈앞을 담아내라

    “한 점의 먹을 찍는 사이는 하나의 눈을 깜박이거나 숨을 한번 내쉬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눈 한번 깜빡이고 숨 한번 내쉬는 사이에 벌써 작은 옛날, 작은 지금이 이룩된다. 그렇다면 하나의 옛날과 하나의 지금도 역시 크게 눈 한번 깜빡이거나 크게 숨을 내쉬는 순간이라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일신수필 서문」

    찰나의 순간에 작은 미래는 지금이 되고, 작은 지금은 과거가 된다. 순식간에도 현재와 과거는 겹쳐 있는 것이며,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고 부르는 시간은 단지 차이일 뿐 가치의 경중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면, 훗날에는 그것이 훌륭한 고전이 되는 것이다. 연암의 ‘조선풍’(朝鮮風) 선언은 이러한 논리에서 연유한다. 연암은 제자 이덕무가 지금의 글을 썼다는 이유로 세간의 비난을 받자, 무관은 조선의 사람이고 현재에 살고 있으므로 지금 조선의 방언을 글로 적고 그 민요를 노래하면 저절로 문장이 이루어져 참된 본[眞機]이 드러날 것이라고 격려했다.

    흠과 결점을 보여 주어라

    “옛사람은, ‘얼굴이 둥글면 모난 데를 그리고 얼굴이 길면 짧은 부분을 그린다’라고 했거늘, 사마천의 열전과 한유의 비문이 읽을 만한 건 이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고 종이 가득히 진부한 말과 죽은 구절만 채워 넣고 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렇게 해야만 법도에 맞고 충실한 글이 된다’라고 한다. 나는 모르겠다. 이게 무슨 글 쓰는 법인지?” -<과정록>

    연암은 흠이나 결점을 쓰라고 말한다. 연암이 말하는 흠이나 결점은 세상과는 다른 삶의 방식과 태도이다. 세상과 다른 행동과 방식은 세상의 잣대로 보면 흠과 결점이지만 역설적으로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진솔한 자의 모습이다.

    연암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연암이 그리는 인물들의 흠과 결점은 연암에게 있어선 그 인물이 진실하고 자유로우며 욕심 없이 살았음을 증명하는 표지가 된다.

    연암이 묘사하는 인물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대체로 기이하거나 모자라거나 한쪽으로 치우쳐 보인다. 예덕선생 엄항수, 거지 광문이, 발승암 김홍기 등이 다 그러한 인물들이다. 혹은 입전(立傳)하기엔 적합해 보이지 않는 그 인물만의 소소한 습관이나 자유분방한 행동도 흠과 결점의 한 종류이다.

    연암은 인물들의 흠과 결점을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생동감 있고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었다.

    글쓰기의 과정, 글쓰기의 요령

    “글을 잘 쓰는 자는 병법을 아는 걸까? 비유하자면 글자는 군사이고, 글의 뜻은 장수다. 제목은 적국이고, 고사(故事)를 끌어들이는 것은 싸움터의 보루다. 글자를 묶어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모아 문장을 이루는 일은 대오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 운(韻)에 맞춰 소리를 내고 문채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날리는 것과 같다. 조응(照應)은 봉화이고, 비유는 유격병이다. 억양반복(抑揚反覆)은 맞붙어 싸워 모조리 죽이는 것이고, 글의 첫머리에 제목의 의미를 밝히는 파제(破題)를 하고 마무리를 하는 것은 성벽에 먼저 올라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김은 늙은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군대를 정돈하여 개선하는 것이다.……방관(房琯)의 수레 싸움은 앞사람의 전법을 본받았으나 패하였고, 우후가 부뚜막의 수를 늘인 것은 옛 전법과 반대로 하여 승리했으니, 상황에 따라 변화시키는 묘는 역시 맥락[時]에 있지, 고정된 규칙[法]에 있는 것은 아니다.” -「문단의 붉은 기에 쓴 머리말」

    연암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병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무언가와 싸워 이기기 위해 글을 썼다.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연암은 이것을 ‘요령’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요령’이란 오늘날 작문 교육에서 말하는 ‘전략’이란 개념과 동일하다고 본다.

    그는 언어를 무기로, 공격 대상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글쓰기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작가였다. 분명 그는 글쓰기에서 고정된 형식을 거부하고 지식을 새롭게 ‘구성’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특히 연암은 자연사물의 원리를 창작 활동과 연결시켰다. 그는 사물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현실 비판의 논거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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