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과거세의 인연
[파독광부 50년사] 어머니 모실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편지도...<검정밥 17>
    2013년 07월 11일 03: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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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갓집으로 이사를 한 후 나는 고향에 혼자 계시는 어머님을 내 곁으로 모시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썼다. 내가 외동아들로 독일에서 살게 되어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이곳으로 모시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몇 달 후에 외무부에서 연락이 왔다. 귀하가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내용을 검토한 결과 현재는 그러한 절차로 외국으로 보내는 법의 예가 없음으로 인간적으로 이해가 충분히 가나 유감스럽지만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외동으로 태어난 운명과 이 좁은 세상에 제 살고 싶은 곳에 살지 못하는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을 한탄했다.

그 후에 동삼동 진(중리)에서 사셨던 박 선생님의 편지가 왔다.

– 전략 –

정의 군이 고향에 홀로 계신 자당 때문에 너무 염려하는 것 같은데, 물론 영식된 도리로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그러나 지금은 …(중략).. 이전과 같은 고식적이고 협량적인 사고방식은 청산해야 하고 또 자당께서는 사랑하는 아드님이 만리타국에서라도 좋은 분과 결혼하여 애기 잘 기르고 안정된 생활을 하며 희망을 가지고 앞날을 바라보는 소식을 들으시면 적적(寂寂)하신 중에도 든든한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실 터이니 불효라는 죄책감은 깨끗이 없애고 매일 매일 충실히 보람 있게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정의 군이 서독에 가서 그곳에서 결혼하고 애기도 그곳에서 양육하게 되는 것이 모두 그러한 과거세(過去世)의 인연이 있어서 그리 되는 것이니 자당에 관하여 너무 염려 마십시오. 자당 일을 너무 걱정하여 생활하는데 정신적으로 지장이 되면 오히려 불효가 되겠지요. 자당께서는 사랑하는 아드님이 잘 살아가는 소식을 전하여 주는 것을 효도로 아시지 걱정하는 것을 효자라고는 아니 하실 것입니다.

– 중략 – 가족과 함께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복 많이 만드세요, 그리고 복을 아껴 쓰세요.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도록 하세요.

서울에서 박재갑.

박 선생님의 편지는 나에게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입장에서 내가 당하는 운명을 감수하는 것과는 달리 감정적이고 혈육적인 입장에서 직접 당하는 쓰라림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삶의 형태와 되어감이 ‘언제 어느 때의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은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았다.

원래 생사가 없는 것인데 우리가 미(迷)해서 생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윤회하며 고통을 받고, 있는 것(色)과 없는 것(空)이 없는데도 있다고 여기는 데서 고통이 온다고 한다면 나(自己)라는 존재 자체가 배척당할 수 있다. 나(自身)도 없는 것이라고 직관한다면 미(迷)를 깨뜨리고 진(眞)을 볼 수 있는 나(自我)는 어디에 두는 것인가? 그렇다면 미와 진도 없는 것이 아닌가? 헛것과 참된 것이 없다는 진리를 알려고 애쓰는 것은 없는 나를 있는 것으로 보는 미(迷)가 아닌가?

홀어머니를 멀리 혼자 두고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과 아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멀리 떨어져서 홀로 살아야하는 어머니가 과거세의 인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 생에서 아들의 어머님께 향한 그리는 마음과 주야로 아들을 그리는 눈물어린 어머니의 기도는 내세에 또한 무슨 인연의 결실을 맺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과거세의 인연으로 본다는 그 자체도 미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의 모습

박 선생님의 눈에는 현실에 미혹되어 허우적거리는 내가 가련(?)하게 보이겠지만, 나는 일어나는 일을 내가 모르는 어떤 과거세의 연분에 책임을 지우는 것 보다 어머님이 홀로 계시게 된 것은 내가 이 생에 독일에 살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내가 어머님께 가족을 데리고 가든지 어머님이 이곳으로 오시든지 하면 우리는 헤어짐의 쓰라림을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권세가 없는 나에게 외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없다”하며 거절하는 것을 과거세의 인연으로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너무도 나의 삶과 나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의 진리에 대한 앎이 너무 부족한 탓이라고 할지라도 나와 내 삶을 포기하기 싫었다. 비록 알지 못하는 진리 속에서 내가 살지라도 삶의 결정을 내 자신이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님을 모시는 일은 공부가 끝날 때까지 미루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떠한 인연이 있어서인가?

최 경순

하루는 난데없이 김 군이 들이닥쳤다. 부인과 다섯 살 먹은 딸아이 경희를 함께 데리고 왔다.

나는 잃었던 친구를 만나게 되어 한없이 기뻐하면서 그를 반가이 맞아들였다. 서로 보지 못했던 날들을 아쉬워하며 건강한 몸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김 군은 지나온 일들을 대략 알려주었다.

그는 독일에 와서 일년도 채 못 되어 혈혈단신으로 함부르크로 도망가서 배를 타게 되었다. 배에서 등급이 제일 낮은 일부터 시작했다. 선원들의 심부름과 갑판 닦는 일을 했으며 식사시간에는 선원들의 밥상을 차려야 했다. 처음에는 칼, 숟가락, 포크가 어디에 놓아지는지를 몰라 모두 수북하게 식탁 복판에 놓았다가 야단을 맞기까지 했다고 웃으면서 지난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언제나 화를 내지 않고 친절한 그는 곧 모든 선원의 신임과 사랑을 받게 되었고 몇 달 후에는 선원의 취급을 받으면서 돈을 모를 수 있었다. 그는 선원들 사이에 <헨리>라고 불렸고 선장들은 서로 자기 배에 태우려고 했다.

한 이년 남짓 타면서 다른 사람의 인정과 신임을 받았고 또 그 사람들이 돈벌이하는 방법도 배웠다. 배를 타고 지구를 돌면서 여러 나라를 거치는 동안 어디에서는 무엇이 유명하고 어디에서는 무엇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동시에 그는 세상살이를 몸소보며 체험했다. 제법 돈을 모았다고 했다.

그래서 부산에 간 김에 고향에 가서 아내와 딸을 다리고 독일로 돌아왔다. 처가(처가)는 재일교포로서 모두 일본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었고 아내와 딸은 고향 외조부 댁에서 지나다가 드디어 서로 만나게 되어 앞으로는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독일로 왔다.

김 군은 글자 그대로 칠전팔기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웃음이 깃들이지 않은 그의 얼굴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카츄샤 부대에서 근무해서 돈을 재미나게 벌었다고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제대 후에 고향에서 조그만 병원을 차리고 의사를 채용해서 병원장으로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병원경영에 경험이 없던 그는 의사에게 속아 끝내는 병원을 팔아 빚을 청산하고 서울 어느 구청에 계시는 형님의 주선으로 독일에 광부로 왔다.

이제는 배를 타지 않고 함부르크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김 군을 떠나보내면서 그가 성공할 것을 빌었다.

그동안 Z형도 옛날에 살던 집을 나와서 독일 사람이 정원과 채소밭에서 주말을 보내기 위해 지은 원두막의 단칸방 집을 얻어 한국 간호원과 살림을 차렸다. 단칸방이라고 해도 목욕실과 화장실이 붙어 있는 약 이십 평 되는 둘이서 살림하기에 비좁지 않는 집이었고, 독일 사람의 이웃이 가까이 없어서 생활하기가 편했다.

Z형이 고향에 아내와 아들 둘을 두고 왔기 때문에 다른 여인과 살림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내가 형님뻘 되는 분에게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국에 계시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져버리지 마시라고 했다. Z형은 내 말을 잘 알았다고 하셨고 나는 거기에 대해서 더 언급하지 않았다.

며칠전 김 군이 왔을 때 그가 서울에서 Z형의 처갓집을 찾아간 이야기를 하다가 지난 여름에 Z형의 둘째 아들이 한강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김 군과 나는 이 말을 Z형께 하지 않기로 했다. 살길을 찾아 독일까지 왔다가 자기가 없은 동안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신할 것 같아서 도저히 그말을 할 수가 없었다.

Z형과 함께 사는 여인은 안동사람으로 최경순이라고 했고 학교에 갈 나이가 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친정어머님께 맡겨 두고 왔다고 했다. 여기에서 제법 먼 도시에서 근무하다가 Z형과 사귄 후에 우리 동네로 이사와서 산파로 일을 했다. 한국에서 산파로 일하던 사람이라 경험이 많기 때문에 얼마 되기 않아 독일인들의 인정을 받았고 산화 병동의 책임자가 되었다.

최경순과 나의 사이는 처음에는 달갑지 않았다. 나는 가시나가 어디 붙을 때가 없어서 Z형에게 붙었느냐고, 아내와 아들이 있는 사람을 유혹한 죄를 그에게 씌우고 그를 경명했다. 나는 최경순을 볼 때마다 “나도 첩 하나 구해주소” 했다. 내 말의 뜻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아는 최경순은 날 보기를 지겨워했고, 제가 무엇인데 참견하는냐는 식이었다. 그러나 서로 타향에서 외로움 속에 사는 사람끼리 윤리도덕만 따지며 살아갈 수가 없었다.

나와 Z형과는 특별한 친한 사이었기 때문에 자주 찾아가고 만나게 되니 최경순과도 정이 들고 서로간에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최경순과 형님이 살던 집은 이웃에서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냄새나는 한국음식을 끓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집에 갈 때는 가끔 시장에 둘러서 청어 한 바구니를 사 들고 갔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귀한 청어가 여기는 참 흔하고 값도 쌌다. 우리는 숯불에 청어를 굽고 밥을 상치에 싸서 먹으면서 고향을 잊기도 했다.

하루는 그 집에 가니까 형님은 공휴일 작업에 나가셨고 최경순이 혼자서 있었다. 보기에 무척 고단해 보였다. 내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니 며칠 전부터 뼈마디가 쑤셔서 못 견디겠다고 했다. 한국에서부터 류마치스 병증이 있었는데 습기가 많은 독일에서 힘든 일을 하니까 악화된 것 같다고 했다. 저축한 돈은 없지만 제 몸을 위해서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서, 어느 곳에 가도 자기는 직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는 걱정은 없지만 귀국해도 갈 곳이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이 기회에 최경순을 형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사정이 그렇다면 고향에 있는 우리 집에 가라고 했다. 어머님이 내가 보낸 사람이면 추호도 의심 없이 아들을 보는 것처럼 기뻐하시고 아들처럼 반기면서 함께 살 것이다. 거기서 살면서 차츰 다른 방도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한국에 가려면 우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최경순도 나의 제안을 듣고 반가워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나더러 자기가 부산으로 간다는 것을 형님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해서 나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며칠 후 최경순은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어머님께 편지를 써서 최경순이라는 사람이 간다는 것과 제가 원하는 대로 어머님 곁에 두시하고 했다.

최경순은 독일과 Z형을 떠났다. 최경순을 한국에 보낸 후에 나는 형님을 보고 후회했다. 갑자기 혼자 사는 형님이 불쌍했다. 외모도 전과 같이 깔끔하지가 못하고 좀 추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밥맛이 없다고 하면서 최경순을 그리워했다. 제가 아파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애처로워 귀국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하면서, 최경순이 귀국하면 자기가 어디에 사는 것을 알리지 않을 터이니 자기를 찾지 말라고 부탁하고 갔다고 했다.

나는 목에 무엇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말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독일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는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비밀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떨었다.

몇 주 후에 어머님과 최경순에게서 편지가 왔다. 최경순은 자기가 어머니 곁에서 친딸처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과 어머님과 아기자기한 생활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고 했고 어머님은 걔 곁에 있던 사람이 어머님 곁에 사니까 나를 보시는 것 같다고 하시며 처음에는 내가 비록 독일여인과 결혼을 했어도 어느 한국여인과 정을 붙여서 아이를 밴 후에 어머님께 보냈다는 누이들의 추측에 동의하고 그렇게 믿었다고 하셨다. 그렇지 않다는 점이 어머님을 더 기쁘게 했다고 첨부하셨다.

나는 어머님과 최경순이 서로 이해하면서 함께 산다는 것이 기뻤다. 또 몇 달 후에 최경순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떤 중년 남자와 제주도 서귀포에서 정답게 앉아서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 남자에 대한 최경순의 설명은 간단했다.

최경순이 부산에 있는 독일기술학교의 책임자와 다방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어느 사람이 자기는 무역하는 사람인데 최경순이 독일말을 잘 하는 것을 보고 도움이 필요해서 말을 걸었다고 하면서 자기의 무역회사의 용건을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사귄 사람으로 약혼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편지는 기쁨과 즐거운과 행복으로 그득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의심이 갔다. 한국의 중년남자가 무역상사를 한다면서 아직 독신으로 있다는 그 사실부터 믿을 수가 없었고 그러한 사람이 최경순이가 올 때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절세미인이나 여걸이 아닌 최경순을 보자마자 반해서 약혼을 하고 결혼을 계획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고 대뜸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어디에서 보고 듣던 이야기 같았다.

그래서 나는 최경순에게 사람을 사귈 때는 완행을 타라고 했다. 지금 나이에 급행을 타듯 인간을 옳게 보지도 않고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까지 급행을 탈 수 있는 젊은 최경순의 마음이 또한 부러웠다.

몇 주 후에 또 최경순의 편지가 왔다. 그 남자는 자기가 한국에 가져갔던 얼마 되지 않는 돈마저 빌려 가고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했다. 왜 자기에게 완행이야기를 일찍 해주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쓰디쓴 패배의 잔을 마셨다고 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어머님의 주선으로 자기의 부모님과 화해를 하고 아들도 만나서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즐거워 보인다고 하면서 아마 부산을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이 과거세의 인연이라면 최경순의 전생의 삶은 어떠했을까? <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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