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독일광산대학 입학
[파독광부 50년사] 소원이었던 공부를 독일회사 장학금 받으며 시작<검정밥-16>
    2013년 07월 02일 02: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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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경영

코리나는 이가 나기 때문에 아픈 모양이었다. 밤에 자주 잠을 깨어 울었다. 아기가 울기 때문에 아내가 밤에 자주 일어나야 했다. 아내가 일어나서 아기를 달래면 나도 함께 잠을 깨기 마련이었다.

아기 우는 소리에 한번 잠을 깨면 다시 잠들기가 어려워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어느새 잠이 들면 곧 자명종이 울었다.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야 했던 나는 항상 잠이 부족했다.

이렇게 부족한 잠과 싸우며 오전에는 땅속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나가자니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 고생 중에서도 야간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기 전에 처리해야 될 문제들이 있었다. 첫째는 아내의 직장 문제였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게 되면 아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아내가 직장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둘째는 아내가 직장에 나가면 아기를 맡겨야 하는 문제였다. 맡기기는 외할머님께 하면 되었지만 차가 없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버스와 전차를 갈아타면서 우리 도시에서 정반대 쪽에 있는 처갓집에 아이를 아침마다 데려가고 저녁에 또 데려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아침 일찍 아이를 할머니에게 데리고 가는 것은 시간문제이었지만, 자는 아기를 새벽에 깨우려니 안타까운 마음도 앞섰지만, 아기나 어른이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았다.

아내의 직장문제도 독일에는 각 직장마다 삼년 간 교육을 받은 후에 정식 사원으로 채용이 되어 지정된 봉급을 받을 수 있었음으로, 배운 직업이 없이 학교만 다니던 아내가 혼자 벌어서 온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좋은 직장을 얻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의 걱정은 대단히 컸다. 하고 싶은 학업을 눈앞에 두고도, 할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하니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사정이 허락되지 않는 것을 내가 원한다고 무리로 이끌고 나갈 수는 없었다.

지금의 처지를 가져온 장본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었다. 결혼하기로 결정할 때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미 생각했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다면 내가 살 수 있는 다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께 매달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도모는 사람이 하나 경영은 하느님께서 하신다’ 는 것을 체험했다.

처부모님은 4층 집을 소유하고 계셨는데 한 층은 처부모님이 사용하시고 다른 삼층은 세를 내었다. 아무리 그 집이 자기 것이라 하더라도 세 가정 이상 사는 집에는 몇 십 년을 한 집에서 세를 내고 거주한 사람들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부모님도 우리 때문에 다른 식구들에게 집을 내어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처갓집의 사층에 나이 많은 늙은 부부가 장인께서 태어나기 전부터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늙은 부부가 이제는 여든이 넘었음으로 사층까지 오르내리기가 힘들다고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기뻐 날고 싶었다. 우리는 여름에 처가 집으로 이사를 갔다. 아기를 맡기는 문제가 스스로 해결이 되었다.

또 장모님 친구가 처갓집 근처에 있는 <튀쎈> 제철회사에서 근무했는데, 옛날에 사업하던 사람이라 남편이 죽은 후에 상점을 다 처리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나 젊은 사람인 상급자 밑에서 일하기가 싫다고 하며 아내더러 자기가 하던 일을 넘겨받을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자기가 배운 직업이 없기 때문에 그 직장을 얻을 수 있을지 걱정했으나 장모님 친구께서 자기의 부장에게 잘 부탁한 덕택으로 한번 시험해보더니, 그 아주머니가 받던 봉급으로 직장에 나오라고 했다.

아내가 할 일은 그 제철회사가 하루에 소비하는 에너지의 소모량과 생산에 직접 사용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에너지 양을 매일 계산해 내는 일이었다. 아내는 일이 아주 쉽다고 하면서 월급도 몇 년 일하던 사원들과 동등하게 받는다고 좋아했다.

아내의 직장문제가 스스로 해결되었다. 이렇게 해서 문제는 저절로 풀려 나갔다. 나는 어디에서나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렸다.

아내는 여름부터 직장에 나갔다. 우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무슨 공부를 할까 궁리했다. 프라이부르크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알아본 후로 의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우선 장학금을 얻어 재정문제를 완전히 확보하기 위해서 광산회사의 본사로 갔다. 본사의 교육담당 책임자는 옛날 우리가 광산에 입사할 때 우리 회사의 교육담당 이사였다. 자기가 옛날에 근무했던 광산에서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반가워하며 자기가 도와줄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으니 장학금을 좀 대어달라고 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정신없는 소리를 내었거나 그가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태도였다. 그는 얼마동안 우리들 사이를 긴장으로 메우던 침묵을 깨뜨리고 무거운 입을 열어 천천히 대답했다.

“이정의 씨. 우리가 당신들을 독일로 데려온 것은 우리에게 노동력이 부족한 까닭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당신은 삼년 후에 계약상 귀국했어야 할 사람입니다.

당신은 특별히 독일 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독일에 계속 체류할 수는 있으나, 당신을 우리 광산에서 계속 써야할 의무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또 우리 광산은 우리가 쓸 사원들을 양성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 사원이 필요 없습니다. 거기에다 우리 회사는 외국인 노동자가 공부하는데 장학금을 준 역사가 없습니다.”

나는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어느 누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식으로 성큼 돈을 주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뻔 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돈을 받기 위해서 왔다. 씨름이 시작되었다.

“이사님. 당신의 말씀은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표현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한 회사에 일하는 사람은 모두가 회사를 위해서 삶을 바치는 운명공동체로서 피부나 국적의 차이가 없습니다.

내가 일하는 막장에는 독일인과 한국인이 서로 떨어져서 제각기 하나의 동발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한 동발을 세웁니다. 사고로 죽을 때도 독일사람 따로 한국사람 따로 죽지 않고 한 자리 한 시간에 같은 죽임을 당합니다.

당신들이 노동력으로 데리고 왔던 나의 동료 중에는 팔다리를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고 이국의 천길 땅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사람이 공부를 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운명공동체의 일원인 인간으로 보지 않고 계속 노동력으로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한 운명공동체에서 민족을 가려서 따로 오려내려는 모순을 보입니다.

내가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은 학문과 지식을 더 쌓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공부하고 나서 당신들의 회사에서 사원으로 일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싶다고 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사님께 묻고 싶은 것은 왜 사원은 독일 사람이라야만 된다는 원칙이 세워져야 합니까? 노동자는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좋지만 간부는 독일 사람이라야 된다는 해석은 민족주의요 인종차별이 아닙니까?

당신이 이러한 안견에서 내가 공부하는 것을 반대한다면, 나는 오늘 당신께 온 것을 후회할 뿐만 아니라 오늘 처음으로 독일에 온 것도 후회합니다.”

나는 그를 반박했다. 그는 내가 이차대전 후 독일인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민족주의를 들어서 대항하는 말을 듣고는 말문이 막혔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 후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정의 씨. 만약 내 말이 당신에게 인종차별적으로 들렸다면 용서하십시오. 나는 절대 인종차별이나 민족주의적인 견해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 말이 당신에게 그렇게 들렸다면, 그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양해하십시오.”

그는 계속 난처한 표정으로 무엇을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잠깐 밖에 나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누구와 전화를 걸었는지, 한 반시간 후에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

“이정의 씨, 광산학을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장학금을 주겠습니다.”

돈만 대어준다면 죽으라는 학(學)도 할 판이었는데 광산학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꼭 의학을 해야 된다는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공부라도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었다. 나는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장학금의 문제가 이렇게 해결되었다. 나는 하느님께 또 감사를 올렸다.

본사의 요청대로 복훔이라는 도시에 있는 광산대학(Fachhochschule Bergbau) 광산기술과에 입학신청을 했다. 입학 전에 외국인에 대한 언어시험이 있었는데 실제로 나는 독일의 대학입학자격증명서를 가졌기 때문에 언어시험이 필요 없었지만 외국인에 대한 언어시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서 그 시험장에 들어갔다.

보쿰의 광산박물관 모습(위키피디아)

보쿰의 광산박물관 모습(위키미디어)

나는 그 시험방법이 참 효과적이다 생각했다. 시험장에 들어가니 시험관이 세 사람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앞에 있는 책상 위에는 두꺼운 책들이 여러 권 놓여 있었고 책상 옆에는 시험경과를 기록하는 기록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니까 무슨 공부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내가 ‘광산 기술과’ 라고 하니 한 사람이 앞에 놓인 책 중에서 한 권을 내게 주면서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으라고 했다. 나는 책의 중간쯤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틀리지 않게 읽느라고 정신을 차려 읽고 나니 방금 읽은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처음 읽는 전문서적을 틀리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가다듬어 읽었는데, 읽는 것에 정신을 집중시키느라고 내용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내용이 나에겐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읽는데 정신을 집중했기 때문에 내용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나 내 생각에는 이러이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고 난 후 시험관이 언어시험에 합격했다고 했다.

그러한 시험방법은 일거삼득(一擧三得)의 결과를 노리는 것이었다. 누가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쉴 때는 쉬면서 읽는 억양을 들으면 그 읽는 사람이 독일어 문장구성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짐작할 수 있고 또 읽은 후에 그 내용을 설명하면 그 사람이 읽은 내용을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그의 이해력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표현능력도 알 수가 있었다.

입학허가서를 받은 후 나는 새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6년 동안 그 더운 땅속에서 땀에 석탄먼지를 비비던 그 하루하루 위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회사에 퇴직서를 내고 9월 말에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본사에서는 숙련광부(Hauer)의 월 평균 노임을 월급형식으로 장학금으로 주겠다고 했고 또 연말에는 광부들이 받는 성탄절 보너스도 지불하겠다고 했다. 기뻐서 날고 싶었다. 나는 1970년 10월부터 꿈에도 소원이었던 공부를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야 독일회사의 장학금을 받으며 시작했다. <다음계속>

필자소개
파독광부 50년사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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