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이 낳은 성범죄들
    [정지된 역사] 여자이야기 3
        2013년 06월 19일 10: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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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간 혹은 강간을 시도하는 행위는 엄중히 조사하여 처벌할 것이다. 이같은 행위에 대해서는 ‘그 행위의 경중을 따지지 않을 것’이며, 또 처벌에서도 ‘가슴을 살짝 쥐어박는’ 정도에 그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죄 아니면 무죄 둘 중 하나일 것이고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주한미군 최고사령관 하지 (1945년 8월 28일)

    “최근 헌병대에 대한 조사팀의 보고에 따르면 성병감염률은 높아지고, 과속으로 인한 교통사고는 증가추세며, 술취한 장교들이 저지르는 사고와 사병들의 깡패짓이 늘고 있다.” 주한미군 최고사령관 하지 (1948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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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위 : 로버트 카파 촬영, 1936년 9월 5일, “공화파 전사의 죽음”.(사진출처 : Heart of Spain : robert Capa’s Photographs of the Spanish Civil War, New York, 1998)

    아래 : “1950년 7월 5일, 16시 25분 경, 오산. 바주카포 부사수 케네스 셰드릭(Kenneth Shadrick) 일병이 16시 20분경, 적의 사격을 받고 사망했다. 셰드릭 일병은 남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첫 번째로 전사한 병사가 되었다.”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한 작은 마을(Skin Fork) 태생인 케네스 세드릭 일병은 8학년(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군에 입대했다. 19살의 나이로 한국전 참전 5일 만에 전사한 불운한 청년이었다. (사진출처 : NARA)

    로버트 카파라는 유명한 사진가가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의 한 빨치산이 총격을 당하는 사진은 굳이 포토저널리즘 연구자가 아니라도 한번쯤은 접해보았음직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고 있던 공화파들의 ‘대의명분’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

    상세한 내막은 필자의 관할(?)이 아니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사진 한 장의 위력을 설명하는 데에 종종 등장하는 사진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대부분의 역사적 사진들이 진위논란에 휩싸이는 운명을 피할 수 없듯, 이 사진 역시 마찬가지이고. 1950년 7월 5일, 16시 25분경, 오산-수원 간 국도가 내려다 보이는 야산의 참호 안에 나뒹구는 미군의 사진은 물론 ‘공화파 전사의 죽음’에 비하면, 사진 자체의 드라마틱함이나 사진을 둘러싸고 있는 컨텍스트의 역사성도 다소 떨어진다(?)고 하겠다.

    물론 모든 죽음은 존엄한 법이다. 정확히는 죽음을 존엄하게 기억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모르긴 해도 케네스 이등병의 사진을 촬영했던 미군 통신대의 사진병은 머릿속에 로버트 카파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촬영하고 있는 바로 그 죽음의 순간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미군의 숭고한(?) 대의명분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것도 품으면서. 뭐 한데 그런 일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다. 전쟁의 성격도 달랐을뿐더러, 사진 자체의 진위는 여전히 논란에 쌓여있다.

    로버트 카파가 그런 의심을 받았던 것처럼, 당시 미군 통신대 사진병이 하필이면 1호 전사자가 총격을 받던 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도 다소 의아스럽다. 또 미군의 공식전사가 기록하고 있는 첫 번째 전사자가 발생한 시간과도 오차가 나긴 하지만 한국전쟁 1호 미군전사자의 사진은 그 자체로는 흥미로운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한데 이 사진은 죽음의 순간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는 ‘공화파 전사의 죽음’을 떠올리게 할지 모르지만, 필자에게는 전혀 엉뚱한 사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똑같은 미군 이등병이었고, 한국에 주둔했으며, 몹쓸 일을 저질렀던 케네스(Kenneth)라는 이름을 가진 또다른 미군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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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위 :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의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씨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정에 입장하고 있는 주한미군 제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Kenneth Lee Markle). 주한미군의 성범죄로는 이례적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또 공분을 초래했던 사건의 주인공으로 ‘주한미군범죄 근절운동본부’가 결성되는 데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런 종류의 범죄 통계는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되는 1966년 이전에는 도무지 찾아볼 수도 없는 실정이다. (사진출처 한겨레 21)

    아래 : “부산-마산 간 국도의 부산 경계 부분에 세워져 있던 경고판. 1950년 9월 14일” 약식군법재판소(summary courts martial)가 미군들이 저지르는 경범죄를 열거해 놓고 경고문구를 써놓았다. 주한미군이 저지르는 가장 많은 범죄 가운데 하나는 과속이었고 주한미군사령부의 가장 큰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주로 지프, 트럭이 주범이었고, 2002년 미군 장갑차의 과실치사가 일어날때까지 이런 사소한(?) 미군의 범죄는 그다지 큰 뉴스거리도 아니었다.

    강간, 살인혐의로 체포된 미군에게 가해진 한국법원의 선고형량으로는 가장 높았던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결국 만기를 다 채우지 않고 2006년 출소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케네스 마클 이병은 혈맹으로 맺어진 한미관계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던 사건이었다.

    사실 미군이 처음 남한 땅에 들어올 때부터 이런 종류의 사건, 그러니까 명백하게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은 충분히 예견되는 것이었다. 가해자건 피해자건 간에 이에 대한 경계심은 뚜렷했다.

    남한에 들어가서 패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 준동하고 있는 공산주의 세력을 조용히 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대부분 18~20세에 불과한 병사들”이 가장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성범죄는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해서 남한 진주를 앞둔 미군이 예하의 모든 지휘관과 사병들을 상대로 실시한 ‘오리엔테이션’의 주요 항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자를 조심하라”였다.

    물론 주한미군 사령관이던 하지(John R. Hodge)는 미군의 성범죄의 원인을 “우리 미군들은 너무나도 자상해서 종종 적국 국민이나 동맹국 국민들과 잘 지내는 것이 단점”이고 그래서 사이가 좋아지고 또 그렇게 저렇게 어째 저째 하다보면, 응, 뭐 그렇고 그런 일이 불가피하게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냐는 뭐 그런 식이었다.

    참 이분 세계관 한번 나이브하시다. 그들이 여성을 그렇게 쉽게 대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하고도 뚜렷했던, “분명한 역관계의 불균형”때문이었는데 말이지.

    이런 힘의 불균형은 보통 강한 자들보다 약한 자들의 눈에 더 잘 보이는 법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점령군의 진주를 맞이해야 했던 일본정부는 이를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와 관련한 훌륭한 국가적 전통을 갖고 있었던 터여서 해법도 비교적 빨리 그리고 명확히 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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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위 : 중국이 억류하고 있던 일본군포로 가운데 첫 번째 송환그룹 2,000명 가운데 한명으로 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일본군 남편을 반기는 아내. 일자미상 (출처 : NARA) 천황제가 지배하던 일본사회는 패전의 “허탈”을 견디지 못하고 각종 엽기적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특히 실종으로 처리된 남편 대신 미군 상대로 생계형 매춘을 해야 했던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엽기적 사건이 빈발했다.

    아래 : 1945년, 주문진의 일본인 임시수용소.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38선 이남에 약 50만에 달하는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이들을 부산, 주문진 등의 항구를 통해서 본국으로 귀환시켰다.(출처 : NARA) 하루아침에 ‘내지인’에서 ‘패전국민’으로 전락한 해방후 한국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이건 미군이건 소련군이건 모두 ‘약탈자’로 생각했다. 이러한 공포는 귀환을 앞둔 일본인들이 고국으로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는데, 초기 일본총독부나 일본군사령부와 접촉한 주한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에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무질서하고 약탈적이며 무절제”하다.. 뭐 이런.

    “(적군이) 일단 상륙하기 시작하면 여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차례로 겁탈할 것”이라는 공포가 일본 국적의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래서 불가피한 ‘강제적 충돌’을 막기 위해서 일본 내각은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인 8월 18일 미군을 위한 “특수 위안시설”을 만들 것을 비밀리에 지시했다.

    물론 추후 맥아더 사령부의 지시로 이런 사업에 일본정부가 직접 관여하지 못하게 되긴 했지만, 전체적인 ‘정책기조(?)’는 유지되었다. 소수의 여성을 모집해서 “선한 일본여성을 지키는 방파제”로 삼는다는 것 말이다.

    일본에서는 이 ‘인간 방파제’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남한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뭐 그런 법이다. 최고사령관이 우습게 보이면 아랫것들에게 영이 잘 서지 않는 법이다. 뭐 술김에 생판 모르는 처자 엉덩이 한번 움켜쥐는게 뭐 그리 큰 대수겠는가? 그런 게 전통 아니겠냐고 우기면 되지 않겠냐고? 실제 그 비슷한 일이 있긴 했었다.

    “1945년 10월 17일, 부산에 사는 영어에 능숙한 미스터 박이 미군들을 결혼식에 초대했다. 미스터 박은 미군정에서 통역을 맡고 있던 사람으로 미군들과 교유가 많았다. 초대된 미군들, 한국인 신랑신부, 그리고 하객들이 함께 어울려 술을 거나하게들 마셨다. 그러던 중 갑자기 두 명의 미군 병사가 신부와 하룻밤을 보내야겠다고 말했다. 미스터 박이 한국인들의 윤리 기준으로 그런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렸지만, 이들은 화가 나서 미스터 박을 권총으로 죽여버렸다.” 1945년 11월 경, 한국인의 편지 가운데서.

    아마 술에 취한 미군 병사들은 신혼 첫날밤에 신부를 공유하는 것을 지네들 전통이라고 우겼을지 모르겠다. 뭐 에스키모 원주민 출신이 한명 끼어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확실한 것은 이 사병들은 누구처럼 몇 달동안 잠수를 타면서 버티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아무튼 불과 한달 전만 해도 “한국사를 통털어 한국 땅을 밟은 외국군대 가운데 이렇게 열렬한 한국인들의 환영을 받은 군대는 없었을 것”이라며, 미군 스스로도 격찬했던 이 한국인들을 대하는 그들의 행태가 썩 좋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랴, 전쟁에 승리한 군대가 점령한 지역에서 여성들은 ‘잠재적인 전리품’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일종의 ‘경험적 진리’에 속한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어떤 서방의 스터디 그룹은 소련군이 동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강간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집단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연구가 순수한 학문적 동기 이외의 다른 이념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두말하면 잔소리다.

    미군이 영국에 상륙한 이후 독일이 항복하던 1945년 5월 1일 무렵까지 유럽주둔 미군군사법원에서 다뤄진 성폭행 사건은 256건에 불과(?)했다. 이 중 87건은 미성년에 대한 강간사건이었다. “야만적인 적군(red army)”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젠틀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을 점령한 소련군과 미군 역시 비슷한 관계였다. 미군이 관계된 성범죄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언제나 빠트리지 않았던 것이 늘 소련군과의 비교였다. “소련군에 비하면 양반”, 뭐 이런 식이었다.

    상대적으로는 나았을지 몰라도, 숫적으로 적었을지 몰라도 이러한 종류의 사건이 갖는 상징성은 무시될 순 없다. 그러니 이 불보듯 뻔한 사태를 걱정하신 미군 최고사령관께서 무엇보다 먼저 미군들의 ‘도덕 재무장’을 ‘일본군 무장해제’보다 앞서서 강조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의 말마따나 “높은 도덕기준과 자유롭고 문명화된 사회의 후손으로써 세계에 군림”하는 미국의 군대가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때보다 미군 사병들의 일탈행위를 단속할 헌병대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이 해방직후의 상황이었다. 한데 앞서도 잠시 본 것처럼 그 헌병대의 대장이라는 사람은 타의 모범을 보이기에 여러모로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게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긴 것처럼 단순한 인사의 실책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스러웠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주한미군의 사령관이 “미군의 성병 감염률이 높아지고 장교들의 비행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탄한 것은 미군이 남한을 통치한지 3년째 접어들고 있던 무렵이었다.

    처음부터 그 기준이 뚜렷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들기는커녕 미군의 성범죄가 높아지고 도덕기준이 땅에 떨어진 것은 무언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의미였다. 반공과 국가안보가 앞세워지면 그 어떤 법률적, 윤리적 일탈행위도 용납되고 심지어 권장되는 사회, 바로 엊그제까지(?) 우리가 익숙했던 그런 ‘패륜적 반공체제’라 부를만한 구조야말로 이런 종류의 문제적 인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던 괴물이었다.

    다소 식상한 감도 있지만, 아는 것도 별로 없이 시작하는 바람에 쌩똥을 싸고 있는 ‘여성’편을 빨리 끝내고 다음 주제인 ‘첩보이야기’로 구렁이 담넘어가듯 연결해줄 수 있는 인물, 김수임과 베어드 대령의 이야기로 넘어가보자.(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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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위 : 베어드대령 보고서의 표지에 실린 샌프란시스코 뉴스지 1950년 7월 5일자 기사.(사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아래 : 드라마 ‘제5공화국’의 녹화장면 (사진출처 : 보도사진연감 1996년)

    필자소개
    역사연구소의 연구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했고 현재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사 못지 않게 좋아하는 것이 야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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