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윤창중‘들' 양산하는 사회
    '남근주의'가 양산되고 지배하는 사회
        2013년 05월 31일 05: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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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주 전에 ‘윤창중 사건’을 인터넷으로 알게 되었을 때, 제 머리에 스며든 첫 생각 중의 하나는, “이런 일들을 요즘 ‘사건’으로 보게 돼서 불행 중의 다행”이었습니다.

    윤창중

    실제로는 90년대 초반,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한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해서 가이드 일했을 때에, 저는 “윤창중”들을 수도 없이 거의 다달이 봤습니다.

    예쁘다 싶은 여성 가이드에게 반라나 내지 그 이하(?) 모습의 “사장님”들이 손을 대면서, “야, 너, 나하고 …하면 백달라 줄께!” 하는 것은, 그저 “일상”이었습니다.

    백인 앞에서는 “사장님”들이 약간 움츠려드는 버릇 비슷한 게 있어서 그런지, 고려인 안내자들의 피해는 가장 컸습니다.

    그들 중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몇 주 동안 더 일하면 한국학 공부는 물론 ‘한국’이라는 국호 자체를 더 이상 제 귀로 못들을 것 같다, 증오감이 너무 커져간다”고 하면서 떠나는 이들이 절대 다수였습니다.

    이런 일은 그저 일상일 뿐이었는데, 우리가 그것이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그 때는 하지 못했습니다.

    망가져가는, 세계 3위의 살인 발생률을 자랑하는(?) 나라에서는 성추행 정도를 “범죄”라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준핵심부로 진출한 대한민국의 “성공”(?) 앞에서 실패한 나라의 주민들이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열패감일까요?

    사실, 이건 매우 슬픈 이야기지만, 윤창중의 실수란, 대체로 짓밟아도 되는(?) 나라에 가서 그 부류의 남성들이 맨날 하는 짓거리들을, 주인나라에 가서 감히(?) 해봤다는 것입니다. 참, 습관만큼 무서운 것도 없네요.

    사실, 윤창중이 특별했다기보다는 너무나 전형적이라는 점이야말로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안에서는 그런 걸 눈치를 덜 챌 수도 있지만, 실제로 남근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남근”은 꼭 남성 신체의 특정 부분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그 “특정부위”와 연상되는 “가치”(?)들을 뜻합니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유치원이나 초,중학교를 생각해보시죠. 만연된 폭력에 남자아이가 피해를 보게 되면 학부모들이 자주 대응하는 방식은? “너는 왜 맞기만 하느냐? 너도 때려! 태권도 배워!” 정도입니다.

    모두들 다 태권도를 배워서 앞차기, 옆차기, 뒤로차기를 다 잘한다고 해서 학교폭력 문제가 해결될 일도 없는데, 일단 “나의 아이만이라도” “여자처럼” 참지 않고 남근답게 행동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셈입니다.

    물론 오늘날 한국 사회가 젊은 남성에게 주문하는 것은 단순한 “근육질”은 절대 아닙니다. 이종격투기 등 강남족들의 남성호르몬 분비를 돕고 “아찔아찔한 느낌”을 배부른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각종 야만적인 “시합”에 나서는 남성들은 주로 하층민 출신들이고, 그들의 남성성 개념은 중산층의 남성성과 대조됩니다.

    중산층의 남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몸을 가꾸어 적당히(!) 얼짱, 몸짱으로 자신을 디자인 (?)할 만한 기술과 돈, 유창한 영어, 외향적이고 원만한, 즉 적절히 순응주의적 성격 (고지식한 지사들은, 한국 중산층들의 입장에서는 “석기인”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필요할 때에 보다 쎈 남근에게 복종할 줄 알아야 한다는 특성에서도, 교육이나 직장의 현장에서 늘 동료와 경쟁해야 하는 불문률에서도, 저들 “모범적인 중산층 남성”들의 남근주의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경쟁주의 이상의 남근주의적 “가치”도 없는 거죠.

    한국 사회에서 남근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는 조직이라도 있을까요? 여대학원생이나 여조교로서 연구실의 문을 닫고 (남성) 교수님과 일대일 대화하는 것이 두려운 학교는 과연 남근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가요?

    여목회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교회는 어떤가요? 가장 진보적이다 싶은 장로교 기장 안에서도 여성 교역자의 비율은 8%에 불과하고, 그들 중에서는 거의 기아선이라고 할 1백5십만 원 이하의 보수를 받는 이들은 70%랍니다.(관련 기사 링크)

    불교는? 더하면 더합니다. 비구니 스님은 원칙상 조계장 종무원장 등 핵심 보직을 아예 맡을 자격(?)이 없으며 중세적인 “8경법”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예컨대 아무리 법랍이 높은 비구니라 해도, 무조건 비구스님에게 먼저 인사해야 한다든가 등등입니다. (관련 기사 링크) 다들 알고 있는 문제지만, “전통”이 세일 포인트인 불교에서는 “전통” 미명하의 폐습을 그 누구도 감히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여신부”라고는 아예 원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천주교는 어떤가요? 그러니까 저는 서울 거리에서 교회의 첨탑을 보기만 하면 왠지 커다란 남근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부자들이 그토록 선호하는 강남의 마천루들은 더더욱더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 모양이 됐을까요? 원래 유교사회도 남근주의가 심했지만, 전쟁과 박정희의 총동원식 병영사회는 결정적으로 대한민국을 여성 등 하위자에 대한 지배와 돈벌이를 향한 “남근”으로 단련시켜놓았습니다. 여기에다가 경쟁 위주의 신자유주의가 아주 자연스럽게, 유기적으로 잘 결합됐습니다.

    옛날의 “국력 신장 경쟁”, “체제 경쟁” 따위는 인제 개인 단위의 생존게임으로 변해버렸지만, “빨리 빨리”, “말 잘 들어!”, “하면 된다”, “입 닥치고 해!” 등등은 그대로 다 남아버렸습니다. 오히려 강화된 셈이죠.

    형식적인 “민주화”가 된지 20여년이 다 지나도, 모든 민주국가에 당연히 있는 대체복무제가 한국에만 들어올 수 없는 게 과연 이상한 일일까요? 모두들 돈벌이 전선의 군인이 돼야 하는 모범적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군인이 되지 않겠다는 남성이 근본적으로 (남근이 없는?) “외계인”으로 보일 뿐입니다. 글쎄, 정신병원에서 “나는 나폴레옹!”이라고 외치지 않는 사람이 당장 백안시 당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아닐까요?

    며칠 전에 저는 하시모토인가 하는 오사카 시장의 위안부 망언을 들으면서 도대체 이런 자가 민선 시장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너무나 위태로운 상태 아닌가, 분노를 느끼면서도 일본의 미래에 대해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위안부 등 약자, 피해자에 대한 망언이야 일본 우파들의 장기(?)지만, “남성의 성욕 해소를 위해서 여성이 마땅히 동원돼야 한다”는 남근 지상주의자 하시모토의 근본적인 사고 방식을, 과연 수많은 보수적인 한국 남성들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요?

    일본 우파의 작태를 당연히 단죄규탄해야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세계의 모든 인민들이 남근주의라는 자본주의형 가부장 사회의 기본적인 폐단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토의하고 협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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