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술자리 독기를 다스리는 황태탕
    [내 맛대로 먹기] "한겨울 극한 추위를 푹 고아내야 참 맛에 도달"
        2012년 06월 05일 04: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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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여름. 태안 바닷가 낭떠러지 위에 자리잡은 펜션으로 가는 길은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1년 강수량의 20%가 하루에 쏟아졌다고 했던가, 도로는 여기저기 물에 잠겼고 비탈진 곳에서는 토사가 콸콸 흘러내렸다. 대낮인데도 사방천지는 어두웠고 천둥 번개가 연달아 몰아쳤다. 엄청난 악천후 속에 처음 가는 길을 조심조심 살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굵은 빗줄기가 우리 눈높이를 가로질러 아래쪽으로 내려꽂히더니 넘실대는 파도와 한덩어리로 부서졌다.

    한 때는 한 지붕 아래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동지들이 저마다 다른 길로 흩어졌다가 옛정에 끌려 모인 자리였다. 술잔이 오가고 수다로 겨루고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면서 밤이 깊었다. 새벽은 금세 왔고, 폭풍우는 어느새 잦아들었다. 짧고 깊게 잠에 취했다가 다시 일어나자 동지들은 마냥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한나절만 지나면 제각각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그 새벽.

    나는 챙겨갔던 장바구니와 냉장고를 열어 몇 가지 식재료를 주섬주섬 꺼냈다. 황태 몇 마리, 무, 양파, 대파, 다시마 약간, 그리고 물. 어랍쇼, 물이 없네. 간밤에 다 써버렸구나.

    완성된 황태탕

    별 도리 없이 차를 몰고 가까운 마을로 가서 물을 사왔다. 그리고 황태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외딴 펜션에서 웬 황태탕이냐고? 오랜만에 만난 동지들을 위해 황태탕을 차려내고 싶었다. 간밤에는 기꺼이 즐겼을지라도 아침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게 술이라, 혹시라도 독기서린 모습으로 나타나면 황태탕으로 다스려 주리라.

    황태. 말 그대로 살이 노란 명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하 20도 안팎의 매서운 추위에서 언 명태가 겨울 내내 햇빛과 바람에 서서히 건조되면서(동결건조, Freezed Dry) 살이 도톰하고 노랗게 변한 것이다.

    명태를 그냥 말린 북어와는 달리, 황태는 부드러운 속살과 특유의 풍미로 더욱 인기가 있다. 원래 함경도 특산물이었다고 하는데 1960년대부터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 지역에 황태덕장이 많이 생겨나서 황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중국산 황태가 대량으로 나돌기 시작한다는 뉴스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전에 오로지 황태탕 하나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작은 맛집이 있다. 황태탕 한 뚝배기에 밥 한 그릇, 김치와 깍두기밖에 없는 조촐한 상차림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이 지나기 전에 준비된 음식이 모두 동나서 손님들을 더 받지 못하기 일쑤이다. 마치 설렁탕같이 뽀얀 국물과 입안을 뜨겁게 감도는 구수한 맛이 그 집 황태탕의 특징이다.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게 맛을 낸 황태 해장국이나 계란을 풀어넣은 맑은 황태국과는 자못 격이 다르다.

    그 비법이 뭔지 알고 싶어도 날마다 혼자서 음식 차리느라 여념없는 여주인에게 차마 묻지를 못했다. 요리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들기름에 황태를 볶아 밤새 끓이면 된다고 했지만 설마 그렇게 간단하랴 하면서 그냥 흘려듣고는 했다.

    어느 날, 한 동료가 바로 그 맛집과 흡사한 황태탕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했다. 내용을 듣고 보니, 맛있는 음식은 역시 비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좋은 재료, 단순하더라도 정성이 넘치는 조리과정, 그것이면 충분하다. 드디어 나도 황태탕 만들기에 성공했다.

    그 후로 황태탕은 순두부 다음으로 내가 소중한 인연들을 위하여 차려내는 대표적인 아침 식단이 되었다. 황태탕이 둘째로 쳐진 이유는 한가지이다. 순두부에 비해서 최소한 2배의 시간을 더 바쳐야 하는데, 그 시간을 단축하겠다고 꼼수를 부리면 맛이 영락없이 떨어진다. 음식은 역시 정직하고 정성스럽게 마련해야 하는 법이다. 황태국이 아니라 굳이 황태탕이라 부르는 까닭은 황태의 속살까지 파고든 한겨울 극한의 추위를 남김없이 푹 고아내야 도달할 수 있는 그 맛의 품격 때문이리라.

    태안 바닷가 펜션에서 황태탕의 제 맛을 함께 누렸던 동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재료>

    -황태 1마리, 무 300g, 다시마 약간, 들기름 3큰술, 양파 반쪽, 대파 1대, 물 3리터 이상. 새우젓 약간. 각각의 재료의 분량은 정확하게 계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들기>

    1) 황태 대가리를 가위로 잘라내고 몸통은 물에 적셔서 불린다.
    2) 대가리, (몸통에서 벗겨낸) 껍질, 무, 양파, 대파, 다시마에 물을 넉넉히 부어서 불에 끓여 육수를 만든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다시마는 우선 꺼낸다.
    3) 불린 황태를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4)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황태 조각들을 넣어서 볶는다.
    5) 적당량의 육수를 부어서 끓이고, 팔팔 끓으면 불을 약하게 해서 1시간쯤 곤다. 육수가 줄어들면 틈틈이 보충한다.
    6) 먹을 만큼 뚝배기에 덜어서, 대파를 썰어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어 먹는다.

    필자소개
    이성우
    전 공공연맹 사무처장이었고 현재는 공공연구노조 위원장이다. 노동운동뿐 아니라 요리를 통해서도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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