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여자, '현 앨리스'
    역사의 파도에 실종된 여성들-2
    [오래된 서울]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여성
        2013년 04월 18일 03: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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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서울>(최종현, 김창희 지음/ 디자인커서 출판)이라는 책이 있다. 한국의 도시와 취락 역사를 필생의 연구 분야로 설정하고 전국을 발로 뛰며 눈에 담고 기록으로 남겨온 최종현 전 한양대 교수와 동아일보 국제부장, 프레시안 편집국장을 거친 김창희의 공동 저작이다. 두 사람이 서울이 얼마나 깊고 넓은 여러 층위들을 포괄하고 있는지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앵글로, 그 서울의 원형을 추적하는 책이다. 이 책에는 서울의 어떤 흔적들과 인연을 깊게 남긴 사람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여간첩’이라는 오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김수임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어’로 시작되는 <사슴>의 시인 노천명, 그리고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다 사라진 현 앨리스’라는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사연과 얘기를 <오래된 서울> 저자인 김창희 선생과 디자인커서 대표인 박강호 선생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글에서 언급되는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별칭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뜻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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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스 현, 남에서도 북에서도 설 땅을 못 찾다

    다음은 앨리스 현(1903~55?)이다. 그녀는 앞의 두 사람에 비해 일반인들에게는 훨씬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의 서촌에서의 행적을 살펴보기에 앞서 현대사에 해박한 고은 시인이 그녀에 대해 쓴 시를 한 편 보는 것이 좋겠다. <<만인보>>에 수록된 시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뭇 사나이들 머릿속 어지러웠다
    가슴속 너울 일렁거렸다

    1903년생
    식민지시대
    분단시대
    미국
    중국
    남한과 북한
    체코 등지를 망라
    지치지 않는 스파이의 삶을 살았다

    1910년 상하이에서는
    여운형
    박헌영의 친구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 공로자
    현순 목사의 딸
    하와이에서 태어난 첫 시민권자 앨리스 현

    컬럼비아대 졸업 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국 CIA 요원이 되었다

    앨리스와
    그의 아우 피터 현
    데이비드 현
    세 남매는
    1945년 매카서 사령관 비서였다
    1949년
    체코 경유
    북한으로 들어가
    박헌영과 합류했다

    그녀는 미국 스파이였으므로
    평양에서 처형된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의 몸에서는
    뭇 사나이들
    그 냄새에 빠져들어 헤어날 수 없었다 – <앨리스 현> 전문

    시인은 ‘대단히 매혹적인 여인상’과 ‘스파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교직해 앨리스 현을 형상화했다. 앞에 소개한 김수임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시는 한 편의 문학작품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사실 관계에서는 많은 오류를 담고 있다. 특히 김수임에 대해 ‘남로당을 위한 간첩’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앨리스 현에 대해서도 ‘미국을 위한 스파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아니, 최근 발굴된 자료들에 따르면 그는 스파이 행위와 관계가 없으며, 해방 직후 분단 상황에서 북한을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곳으로 보고 그 지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인물이었을 뿐이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앨리스 현이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의 가족사진. 중앙이 아버지 현순 목사, 그 왼쪽이 앨리스, 왼쪽 끝이 바로 아래 남동생 피터다. 1948년 9월 앨리스의 아들 웰링턴(오른쪽 끝)이 의학 공부를 위해 체코로 떠나기 직전 LA의 한 식당에서 가진 가족회식 자리였다.

    미국 시민권자인 앨리스 현은 1945년 12월 주한미24군 정보참모부(G2) 예하의 민간통신검열단(CCIG-K)에 군무원으로 배속됐다. 소위 대우였다. 아마 해방 이후 미군 군복을 입고 한반도를 밟은 유일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남동생 피터 현(1906~1993)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 육군부에서 일본어 전문가로 일했고, 종전 후 일본 도쿄의 연합통역·번역부대에서 잠깐 근무하다 한국으로 배속됐다. 그가 맡은 일은 한국인 민간통신을 검열해서 첩보를 얻는 것이었다.

    이 시절에 그는 옥인동에 주거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앨리스 현의 서울 체류 시절 거주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김수임과 마찬가지로 적산으로 징발된 옛 이완용의 대저택 ‘옥인동 19번지’의 일부에 살았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아버지 현순 목사가 과거 한국에 있을 때 사택으로 사용했다는 ‘옥인동 58번지’에 살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할아버지 현제창이 거주했던 ‘옥인동 92번지(이들 현씨 가족의 원적지)’가 오히려 더 신빙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모든 주장의 공통점은 옥인동이라는 점이며, 서로 멀지 않은 곳이다).

    이런 미군 관련 이력이 그녀가 ‘미국을 위한 스파이’로 지목된 근거였을 것이다. 특히 주한미군의 정보관련 부서에서 일했다는 점이 그런 의혹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그녀가 근무한 민간통신검열단은 그런 정보기관은 아니었다. 한국 민간인의 일반 우편물과 통신을 필요에 따라 검열해 첩보를 얻는, 다분히 기능적인 일을 하는 곳이었다.

    이 무렵 앨리스 현의 행적을 보여주는 몇 가지 자료가 있다. 우선 당시 잡지에 실린 글이다. 해방공간에서 남한 사회의 대표적인 월간지였던 <<신천지>> 1946년 5월호에 ‘에리스·현’ 명의로 ‘미국의 여성’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아마 직접 글을 쓰기는 쉽지 않았던지 앨리스 현이 말한 내용을 기자가 정리하는 형식으로 작성된 이 기사는 미국에서의 이성교제, 성교육, 결혼 등의 양상을 소개하면서 전쟁을 계기로 여성의 독립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국의 여성들도 그렇게 지위가 향상되고 독립적인 위상을 얻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내용으로만 보면 정치적으로 특별하달 것이 없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 정보요원이었다면 이렇게 대중 앞에 버젓이 얼굴을 내놓고 잡지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 싶다.

    ‘신천지’ 1946년 5월호에 실린 앨리스 현의 ‘미국의 여성’ 기사.

    두 번째 자료는 미군정 당국이 1946년 6월 압수한 <<공산당 일지>>다. 여기에 앨리스 현이 세 차례 등장한다. 두 번은 박헌영과, 한 번은 여운형과 만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1946년 1월 11일 박 동지가 A. 현과 회견하다.
    1946년 3월 2일 오후 5시 30분 제플린, 노만, 클론스키, 현 앨리스, 정, 김과 이야기했다.
    1946년 3월 6일 오후 2~4시 여 씨의 집에서, 여 씨는 현 앨리스와 회견했다.(정병준, ‘현앨리스 이야기’, <<역사비평>> 2012년 여름호, 390쪽에서 재인용)

    앨리스 현이 박헌영과 여운형을 만난 것은,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중국 상하이에서의 인연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상임근무자의 일지에 등장하는 게 이 정도였다면 아마 그들의 만남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월 2일 회동에 등장하는 세 미국인의 이름이다. 이들은 미국 공산당원들로서 제대를 맞아 본국으로 귀환한다는 인사를 위해 박헌영을 찾았으며 그 자리에 앨리스 현이 동석했던 것이다. 이 무렵 앨리스 현은 국내의 좌익계 인사들은 물론 미국 공산당 관계자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무렵 세 미국인 중의 한 명인 로버트 클론스키에게 문제가 생겼다. 박헌영을 만나기 전날 그는 조선공산당이 주최한 삼일절 기념식에 참석해 미군 정보 당국의 주목을 받았고,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앨리스 현 오누이의 국내에서의 행적도 드러났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자료는, 그렇게 앨리스 현의 행적이 드러난 뒤 그의 상관인 정보참모본부장 니스트 대령의 1946년 8월 증언이다.

    “대령은 전 기간 동안 검열된 항목 수에 관한 도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2월에 특별히 급속한 하강이 있었던 점에 대해 당시 전쟁부가 한 여성을 고용해 한국에 왔는데, 그녀가 그들의 임무를 망친 악마로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38이북 출신인 ‘북에서 온 그녀의 친구들’의 대다수를 고용함으로써 CCIG-K의 임무를 파괴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그들은 그녀를 제공했고, 획득된 정보와 활동량은 차근차근 회복되기 시작했다.”(정용욱 편, <<해방 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 제2집(다락방, 1994), 32쪽)

    여기서 ‘악마’로 묘사된 여성은 바로 앨리스 현이었다. CCIG-K가 한국어 편지의 검열을 위해 영어 구사가 가능한 한국인 통번역자들을 구하는 과정에 그녀가 개입해 북한 출신 공산주의자들을 다수 취직시켰고, 그 결과는 니스트 대령의 표현대로 ‘CCIG-K 임무의 파괴’로 귀결됐던 모양이다. 이는 그녀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과 상당한 연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앨리스 현은 나중에 북한 당국이 주장한 대로 ‘미국을 위한 스파이’이기는커녕 ‘북한을 위한 공작원’의 성격을 가졌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다. 그녀는 결국 한국 근무 반년 만에 해고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옥인동 사람’ 현순-앨리스 현 부녀의 동행

    왜 이런 불일치가 생긴 것일까? 그녀가 비록 미군에 소속되어 있기는 했으되 미군을 위해 일한다기보다는 북한, 남로당 또는 미국 공산주의자들과의 연계 속에서 이들을 위해 일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속속 발굴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녀는 그 시절 옥인동 인근에 살던 김수임, 노천명에 비해 연배로는 8~9년 위였지만, 따지자면 같은 이화여전 출신이었다. 정확하게는 1919년 3월 24일 4년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이화여전에 진학했으나 1920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상하이로 망명했기 때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앨리스 현은 바로 지척에 사는 두 사람의 후배, 그 중에서도 미군의 통역으로 근무하던 김수임과는 잘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학연과 지연, 그리고 그 시점에 점령군이었던 미군을 위해 일한다는 공통점으로 얽혀 있던 그들이 서로 몰랐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그런 인연들이 당시 이들의 움직임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도 궁금하다.

    이들 이화여전 동창생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지만 앨리스 현 본인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북한에 경도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여기저기 많이 산재해 있다. 그녀를 알기 위해서는 아버지 현순 목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옥인동 92번지를 원적지로 하는 현순-앨리스 현 부녀도 말뜻 그대로 동행자였기 때문이다.

    대대로 역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난 현순(1878~1968)의 일생은 유전(流轉)에 유전을 거듭한 역동적인 삶이어서 도저히 한두 마디로는 요약이 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상투를 자르고 독립협회의 모임에 나가는 등 개화파의 세례를 듬뿍 받았고 관립영어학교에도 다녔다. 1903년에는 두 번째 출발하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들을 위한 통역자로 동행했다가 1907년 귀국했다. 그때 임신한 상태에서 동행했던 부인은 하와이에 도착한 지 두 달 뒤 앨리스 현을 낳았다. ‘미국에서 태어난 첫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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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순이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한 직후의 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원 대한민국 원년 10월 11일’이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앞줄 오른쪽부터 현순, 안창호, 신익희

    현순은 귀국한 뒤로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배재학당의 학감, 상동청년학원의 원장 등을 지냈고, 1911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해 정식 목사로 안수를 받고서는 1914년 정동제일교회의 두 번째 조선인 담임목사가 되어 1년 가까이 시무했다.

    정동제일교회에서 사임한 뒤 전국을 순회하며 주일학교를 조직하는가 하면 그의 부흥사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중에 또 한 번의 유전이 일어났다. 1919년 2월 19일 기독교 계열 인사들이 3·1운동을 준비하는 모임에 참석해 상하이 지역의 연락책임자로 선정된 것이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미리 받아 상하이로 비밀리에 건너간 뒤 현지에서 이광수 등과 함께 이를 영어로 번역해 미국 대통령 등에게 발송했고, 임시정부 조직에도 참여해 외무차장, 내무차장 등을 역임했다. 그 다음 해에는 임시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의 연락 업무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의 부장서리, 특명전권공사로서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이 무렵 대사관 설치 문제로 이승만 임시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1922년 초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동양 민족혁명단체 대표회의’에 파견해 소련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현순은 실제 레닌, 트로츠키 등과 만나기도 했다.

    그 뒤 1923~40년 기간에는 주로 하와이 지역에서 여러 한인교회의 목사로 사역하면서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자금을 모으는 등 제2선의 역할에 머물렀지만 그의 왕성한 활동력은 목사 퇴임 후 다시 한 번 발휘됐다.

    그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중국 내의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관계자들과 연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큰딸 앨리스와 큰아들 피터를 미군에 입대시켜 일본과의 막바지 전쟁에 가담시키고 그 자신도 미군 측에 일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김규식, 김원봉, 지청천, 신익희, 최동오, 유동열 등이 중국에서 중간파 및 진보적 인사들의 통일전선체로 조직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해 1944년 하와이지부 총서기를 맡았다. 이 무렵 현순의 활동은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말로 설명된다.

    해방 직후 그는 미군 당국에 한국으로의 입국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입국 목적은 김규식, 김약산 등과 만나 한국의 미래를 재조직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의기가 꺾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존재’의 가는 길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하와이에서 태어난 앨리스 현은 1907년 귀국해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한 아버지를 뒤따라가기까지 국내에서 정동, 옥인동, 서대문 근처 등에 살며 이화여전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뒤 1930년 미국에 정착하기까지 10년 동안은 상하이와 일본에서의 교육, 일본 유학 중 만난 한국 남성과의 결혼과 이혼, 조선-일본-상하이-블라디보스톡 등을 잇는 공산당 계열의 연락 업무 등으로 아버지만큼이나 영일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 중에서도 상하이 시절에 박헌영과의 만남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박헌영이 상하이에 머문 기간은 1920년 11월 망명으로부터 1922년 4월 국내에 재입국할 때까지였다.

    그 무렵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책임비서였던 박헌영은 현순 가족과는 소풍을 함께 갈 정도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피터 현은 회고록 <<만세>>에서 상하이 시절의 박헌영에 대해 ‘점잖으면서도 친절한’ ‘젊은 혁명가들의 지도자’였으며 자신의 우상이었다고 소개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는 박 선생(박헌영을 지칭)이 나의 매형이 되어주길 바랐다”고 쓸 정도였다.(Peter Hyun, <<MAN SEI! : The Making of a Korean American>>(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6), p.108, p.172.) 앨리스 현이 박헌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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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스 현이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22년 ‘정준’이라는 유학생과 만나 결혼한 뒤 별거-재결합-이혼을 거치는 과정에서 1927년 10월에 낳은 아들 웰링턴과 함께 찍은 사진.

    앨리스 현은 그 뒤 1930년대 중반 미국의 뉴욕에 있는 헌터 칼리지 등에서 공부했으며 다시 아버지가 있는 하와이로 돌아가 미국공산당원으로서 노동운동가들의 그룹 속에서 활동했다. 이 정도라면 앨리스 현이 미군 내에서 펼친 활동의 맥락이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아주 특이한 존재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정병준 교수의 설명이 아주 설득력이 있다.

    “이들(앨리스와 피터)은 (…)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미국 시민이었으나, 이들의 인생행로가 이끈 실질적 정체성과 정신은 미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동양계 이민으로서 한국인이었다. 이것이 이들의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 되었다. 존재는 미국 사회에 속한 미국 시민이면서도 그 정신은 한국의 해방을 지향했다.

    문제는 이들이 한국을 택했을 때 발생했다. 남한 혹은 북한에서도 이들은 동화되기 힘든 특이한 존재였다. 한국인들의 눈에 이들은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미국화된 동양인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한국을 지향하고 소원했으나, 남과 북은 이들의 고향이나 이상향이 될 수 없었다.”(정병준, 앞의 논문, 384쪽)

    앨리스 현은 주한미군에서 사실상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간 뒤 LA에서 아버지 현순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던 재미조선인민주전선의 서기로서, 조선민족혁명당의 미주총지부와 관계를 맺고 있던 주간지 <<독립>>의 ‘이사부 서기·상무위원·편집부원’으로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이들의 미국 내에서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면서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한행이었다. 미국 내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북한으로 ‘귀국’할 뜻을 전했다. 프라하에 유학 중인 앨리스 현의 아들 웰링턴도 그렇게 편지를 보내는 루트 중의 하나였다.

    결국 이들 그룹 중의 이사민과 앨리스 현이 1949년 10월경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의 김약산과 김두봉이 초청했다는 설과 박헌영이 비자를 내주도록 했다는 설이 있다.

    ‘사상의 조국’으로 돌아간 앨리스 현은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상하이 시절의 인연을 따라 박헌영의 지근거리에서 일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문제는 6.25전쟁 중에 터졌다. 앨리스 현의 ‘특이한 존재’가 빌미가 되었다. 1955년 박헌영이 미국 간첩 및 정권전복 음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을 때 그녀가 ‘미제국주의자들과의 연결고리’로 지목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박헌영에 대한 기소장에만 등장했을 뿐 재판정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앨리스 현은 그 뒤 북한의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녀가 그 무렵 사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서촌에 연고를 가진 또 한 명의 여인의 잔혹사는 일단락되었다. 자신의 경험과 신념이 가리키는 바에 따라 쉽지 않은 길을 개척해 가고자 했던 한 명의 여인이 스러진 것이다. 그 뒤 앨리스 현은 고은 시인의 손에 의해 다소 부정확한 신화화의 길로 들어섰다.

    하긴, 죽고 나서야 삶의 디테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그녀의 신화 중에서 ‘매혹’은 남기고 ‘스파이’는 지우되 그 자리에 ‘의지’를 끼워 넣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녀의 길이 외관상 극단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도 ‘없는 길’을 만들어서 걸었다는 점에선 앞에 소개한 이여성-이쾌대 형제(다음호에 게재)와 사실상 다르지 않다. 그 길이 거대한 물리력 앞에 더 이상 뻗어갈 수 없었던 것뿐이다. 누가 그녀에게 ‘실패자’의 낙인을 찍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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