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 동아시아를 향한 고뇌의 연대
    [책소개] 『사상을 잇다』(쑨거/ 돌베개)
        2013년 04월 06일 1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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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나라가 아닌 고뇌를 단위로 연대를 기도해봅시다. 이를 위해 먼저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 기존의 이론을 소비할 게 아니라 관성화된 사고방식을 해체할 물음을 함께 빚어냅시다. 그리고 고민의 연대를 위해서라도 각자가 처한 현실에 천착하기로 합시다. 다만 표층에 머물지 않고 아주 깊게 자신의 현실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공통의 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섣부른 공감을 꾀할 게 아니라 고민의 번역을 시도합시다. 상대의 타자성을 희석시키지 않은 채 상대의 고민을 자기 안으로 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의 주체, 하나의 사회는 자기완결적이고 단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타문화를 매개해 해체되고 복수화되며 자신의 갱신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바로 고뇌의 연대, 그리고 진정한 동아시아의 연대가 움틀 것입니다.” 

    ― 『사상을 잇다』 중에서

    동아시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깊이 있는 사상적 모색

    동아시아는 격동 중이다. 분쟁의 화약고가 되고 있는 센카쿠 열도와 독도의 영토 문제, 해를 거듭하며 반복되는 일본 역사교과서 논란, 감정의 골이 깊은 일본과 과거 식민지 국가들 간의 갈등, 한반도와 주변 국가들을 긴장시키고 있는 북한의 핵실험.

    과연 우리는 격동하는 동아시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동아시아 사회가 직면한 위기와 갈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동아시아의 문제 상황 속에서 건설적 과제를 도출해낼 사상적 단초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동아시아 문제가 또다시 중요한 화두로 부각된 지금,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과 한국의 젊은 연구자가 동아시아의 ‘분단체제’를 넘어선 연대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사상적 모색을 시도한 책이 주목된다.

    쑨거

    『사상을 잇다』는 쑨거와 윤여일의 대담집으로, 문화와 세대의 차이를 극복하여 사상의 번역을 기도한다. 대담의 내용은 ‘동아시아 시좌’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론’, ‘맥락의 전환’, ‘역사 속의 현재’ 등의 문제를 아우르고 있다. 둘은 가르침-배움의 독특한 대담 형식을 취함으로써, 오늘날 분절된 동아시아 관계 속에서 사상 교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공저자인 쑨거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중국, 일본, 한반도 사이에는 일종의 ‘분단체제’가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뿌리 깊은 단절을 극복하는 것이 오늘날 자신의 사상적 과제임을 두 책을 통해 밝히고 있다.

    쑨거는 이 책과 함께 출간된 그의 선집 『사상이 살아가는 법』에서 그 뿌리 깊은 단절은 이미 조공시대의 ‘중심-주변’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분명히 한국과 북한 사이의 분단과는 다르지만, 어떤 의도적 단절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 단절의 현대판이 바로 냉전이며, 냉전구조가 동아시아에서 성립할 수 있었던 뿌리 깊은 역사적 기반은 오히려 조공시대의 ‘중심-주변’ 구조였다. 중심이었던 중국은 근대 이후 ‘근대화’의 위상에서 주변화되었다. 주변화 과정은 냉전 이데올로기와 합류해 중국 사회는 한국 사회나 일본 사회로부터 더욱 멀어져갔다. (『사상이 살아가는 법』, 8쪽)

    저자는 국가가 나선다고 이와 같은 단절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이 단절은 “문화의 벽”에서 발생하여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재생산되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절을 극복하려면 국가 단위의 발상을 해체해야 할 뿐 아니라 국가 간의 경계에 얽매이지도 않지만 그것을 경시하지도 않는 인식론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 과제를 위해 저자가 치열하게 사색하며 고투한 흔적을 담고 있다. 중국문학 연구자로서 일본 사상사에 천착하고, 이제 한국 사회로 새롭게 시선을 돌리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저자는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진정한 ‘동아시아 사상’을 일궈낼 수 있는 계기를 추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서구 중심의 아카데미즘을 넘어 ‘동아시아 원리’ 찾기

    『사상을 잇다』와 함께 출간된 『사상이 살아가는 법』는 이 책의 역자이자 편자이기도 한 윤여일이 쑨거의 논문과 평론을 모은 뒤 4부로 나눠 담은 것이다.

    이 선집의 ‘상황적 사고’, ‘중국과 일본 사이’, ‘현재 속의 역사’, ‘동아시아라는 사유공간’이라는 네 개의 주제를 토대로 저자들은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파고들며 새로운 ‘동아시아의 원리’를 모색한다.

    저자들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동아시아의 상황이 격랑을 거듭해 왔음에도 동아시아 연구자들은 여전히 기성의 서구지향적 이론에 기대어 동아시아를 대한다고 아프게 꼬집는다. 동아시아인의 지적 생산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진단인 것이다.

    저자들은 중국의 아카데미즘이 처한 상황을 예로 들고 있는데, 중국 학계는 “겉보기에는 서구 지향적이지 않지만, 서구중심주의를 부정하는 형태로 서구 지향성을 노출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 상황에서 동아시아 연구는 원리성을 낳을 수 없다.

    이러한 비판은 중국 학계뿐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아카데미즘이 처한 위기에도 유효하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저자들은 인류가 공유할 사상 원리의 하나로서 ‘동아시아 원리’를 가다듬어가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있다.

    동아시아 사상 교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상을 잇다』
    일본을 매개로 한 중국 학자와 한국 연구자의 대화

    동아시아 사상의 교류는 어떻게 가능할까? 『사상을 잇다』는 쑨거와 윤여일의 공동 작품이다. 윤여일은 쑨거의 전작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번역하며 인연을 맺었고,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외국인 연구자 신분으로 체류하면서 쑨거의 수업에 참여했다. 『사상을 잇다』는 어느 중국인과 한국인이 일본에서 일본의 역사와 현실을 매개해 일본어로 진행한 네 차례의 대화를 모은 것이다.

    『사상을 잇다』는 윤여일이 서문에 밝히고 있듯이 애초에 쑨거 선집의 부록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인터뷰다. 따라서 『사상이 살아가는 법』과 구성상 병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은 문면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쑨거의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생생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윤여일은 쑨거가 자신의 글에서 밝힌 내용들에 관해 진전된 이해를 요구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논의의 풍요로움을 이끌고 있다. 또한 한국적 상황을 가져와 쑨거의 문제의식에 대입시킴으로써 쑨거의 사고를 한국적 상황과 접목하고자 한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 대화는 사상의 번역을 위해 세 가지 원칙 위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기존의 이론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관성화된 사고양식을 해체할 물음을 함께 구성한다는 것이다. 둘째, 각자가 처한 현실에 천착하되 표층에 머물지 않고 깊이 파고들어 공통의 과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셋째, 섣부른 공감을 꾀할 것이 아니라 고민의 번역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동아시아 사상의 교류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성별과 세대, 국적과 문화, 언어와 역사의 경험 모두가 다른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로서 만나 대화를 이어가고 사유의 교류를 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둘 사이에 ‘고민의 연대’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사상에는 국적이 없다”는 쑨거의 발언처럼, 그녀 또한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일본학자를 사상적 둔덕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다케우치 요시미는 열정적인 루쉰의 연구자였다. 루쉰으로부터 이어지는 동아시아 사상의 계보는 다케우치 요시미를 거쳐 쑨거로, 쑨거로부터 윤여일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쑨거는 누구인가

    국내 학계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는 쑨거는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본래의 전공은 중국문학으로 2000년 이전까지는 비교문학을 연구했고, 2000년 이후부터 분과학문의 벽을 넘어 일본에서 정치사상사를 연구하고 있다. 동시에 동아시아를 둘러싼 현실 사회의 문제를 주요 연구과제로 삼아왔다. 국내에는 중국 지식인 가운데 드문 동아시아 논자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쑨거의 책은 이미 한국에서 두 권 출간된 바 있다. 『아시아라는 사유공간』(창비, 2003)은 동아시아를 지리적 실체가 아닌 문제의식의 지평에서 사고하려는 한국 사상계의 수요에 조응하며 주목을 받았고,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그린비, 2007)에서는 서구적 근대성을 초극하는 아시아주의를 찾으려 했던 일본의 사상가 다케우치 요시미로부터 서구 근대주의와 동아시아 국민국가와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역사철학을 끌어내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 책은 이제 막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저자의 한국이라는 타자를 열어내고픈 바람을 오롯이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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