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요망진 마농처럼
[작가들, 제주와 연애하다 13]제주 마농과 해남 마늘이 한 바다를 맞들고
    2013년 03월 12일 03: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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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의 두뇌를 20년간 멈추어야 한다.”는 유명한 판결문과 함께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이 유명한 경구는 로맹 롤랑의 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그람시가 요약한 것입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600명이 넘는 주민, 평화활동가들에 대한 연행, 구속, 투옥, 벌금 사태 뒤에는 불법 공사 상황이 있습니다, 주민 협의를 거치지 않은 강제 과정, 전쟁을 도발하는 안보 기지, 민군복합항이 입증되지 않은 설계도, 환경문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공사, 인권 유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 요인에 대해 제주 도지사를 중심으로 제주 주요 언론은 입을 다물거나 사실을 왜곡해 왔습니다.

제주해군기지는 미 해군 설계요구에 의해 미군 핵항모가 입항할 규모로 설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2012년 9월, 장하나 국회의원이 밝혀냈습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시인과 작가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후 대정, 세화 성산에 공군기지가, 산방산에 해병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제주도가 최전선화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대한민국 곳곳의 요지를 미군에게 내어준 형편임에도, 비무장 평화의 섬 한 곳 확보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조국은 무력한 나라인가에 대해 다만 슬퍼합니다.

군함에 의해 오염될 서귀포 바다와 기지촌으로 전락할 제주도의 고운 마을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제주도민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 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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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내내 안개가 깊습니다. 정월(正月) 바다에서 몰려온 안개는 성미가 차갑습니다. 얼음 비늘 돋은 물고기들 같습니다. 쓰레기를 태우느라고 그 안에 비집고 서있자 금세 어깨가 시렸습니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저녁까지 붉은 호마이카 상(床) 앞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책 읽는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광목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습니다. 창 밖에는 종아리를 바다에 담근 마늘밭이 있습니다. 지금 마늘밭 슬하의 바다는 송사리만 한 새끼 숭어들이 자라는 시기입니다.

마늘, 제주에서는 마농이라 부르지요. 겨울 해풍 맞고 여무는 해남 마늘과 제주도 마농이 한 바다를 맞들고 풋풋하다 생각하면 딛고 선 땅이 부쩍 미덥습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엽엽한 해남 마늘들은 도요새랑 산비둘기를 동무하며 자라고, 제주 해안 밭 요망진 마농들은 잉크빛 심해에서 솟는 숨비소리를 마시며 자랍니다.

강정포구로 가던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쿵쿵 구럼비 부수는 소리에 무연히 걸음을 멈추고 서계시던 마농밭 앞. 제 마음은 자주 거기에 있습니다.

펜스와 철조망과 전투경찰들로 둘러친 길에는 경찰 버스 열세 대가 종일 공회전 매연을 내뿜었습니다. 뜨겁고 더러운 열기에 밀려 마농들이 생기를 잃은 채 흔들렸습니다. 염치없는 군사 폭력에게 마농밭도, 백합이나 한라봉 밭도, 제주의 미래인 제주 아이들마저도 희생될 것이라는 예고였습니다.

강정78

노순택 사진. 노순택은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평화유배자들’의 기록을 담은 책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공동 저자

두 개의 그림을 떠올립니다.

미국 군인과 중국 군인이 서로 총구를 겨눈 자리에 한 아이가 미국 편에 서서 중국에 총을 겨누는 그림1과 미국 군인과 중국 군인 사이에 앉아 꽃을 심는 아이가 제 동무들을 계속 불러들여 화단을 늘여가는 그림2입니다.

미국을 거절할 수도 중국을 적대할 수도 없고, 1과 2의 위험 수준이 동일하다면, 우리는 비겁와 공포를 버리고 2번 그림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평화 지향 정도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테니까요.

사람이 죽으면 물을 건너 저승으로 간다고 합니다. 이어도 가는 길.

카약을 저어 구럼비로 가던 새벽에 저도 그 길을 보았습니다. 비현실적으로 맑은 바다가 허공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새가 된 느낌이었죠. 인간 정신이 극도로 고양되어 보여주는 황홀한 맑음이 있다면 그 새벽의 제주 바다와 같을 것입니다.

그곳이 지금은 해군기지 공사장이 토하는 흙탕물과 시멘트 냄새로 혼탁합니다.

정말이지 전쟁은 죽음과 파괴 외에 아무 것도 약속해주지 못합니다. 아, 밤이 되자 해남에는 바람이 거셉니다. 바람이 안개를 몰아낼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뒷산 당포 광산에 오르면 멀리 추자도가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핵 항모가 정박하는 해군기지. 산방산 아래 해병대, 대정, 세화, 성산에 공군기지가 있는 제주도. 군 관련 파시에 따라 기지촌이 흥청거리고, 뒷좌석에 제주의 딸을 매단 미군 병사 오토바이가 평화로를 달리는 제주도의 미래는 내다보고 싶지 않습니다.

근접 방어용으로 미 군함에서 발포되는 열화우라늄탄은 제주 전체를 방사능 피폭지로 만들 수 있는 변형 핵무기입니다. 그 피해는 쓰나미처럼, 후쿠시마 핵 재앙처럼 갑작스러울 것이라고 합니다. 미.중 양국에 갈등이 생길 경우, 중국은 미국 본토, 혹은 일본을 먼저 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 당사국 중 가장 약한 한국, 그중에서도 미국이 기지로 사용하는 제주도를 우선 공격하겠지요. 그 위험을 피할 방법은 군사기지가 되지 않는 길뿐입니다.

평화로 엮은 그물만이 평화를 건져 올릴 수 있습니다.
평화로 엮은 그물만이 전쟁마저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풀들은 자라고 싶은 곳에서 푸르러집니다. 새들은 날고 싶은 곳으로 한껏 비상합니다. 제주도가 꽃피울 미래는 거기 뿌리박고 살아갈 젊은이들이 선택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우선권은 그들에게 있습니다.

제주 젊은이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나요? 어떤 제주도에서 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싶은지.

세계 정상들이 맨발로 마주앉아 평화를 약속하는 섬인지.
등 뒤에 미사일 과녁을 단 채 비상 대피 훈련을 받는 섬인지.

제주가 평화를 선택할 때, 바다 너머 해남에서 저는 마농밭 찾아온 산비둘기 한 쌍이 얼마나 곱고도 장엄한 빛깔을 가졌는가에 대해 새로운 편지를 쓰겠습니다. 부디 평화 속에 거하시기를 빕니다.

* 조정: 시인. 1956 전남 영암 출생. 2000 한국일보. 2011 거창평화인권문학상.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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