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해빙의 계절들
    북-일 민중연대의 망각된 가능성을 찾아서
        2013년 02월 27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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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제 반핵 반전평화 운동의 흐름이 동아시아에서도 있었다. 일본의 진보세력들과 북한도 한 때는 그런 기조와 방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연대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은 핵 무장으로 나아가고, 일본의 진보세력은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일본의 흐름에 의미있는 비판과 견제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연재는 북한과 일본 진보세력 사이에서 연대를 모색했던 과정, 그것이 실패하고 좌절되었던 과정을 돌아보려 한다. 그 돌아봄이 과거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고민이고 모색일 수 있다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필자인 임경화 선생은 지금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고 진보신당 당원이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 선집>의 역자이기도 하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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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엉뚱한 ‘제재’ 조치와 좌파들의 이상한 침묵

    지난 12월 중의원 선거에서 의석의 60%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고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일본의 아베 자민당 정권은 북한의 이번 3차 핵실험을 “일본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자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현저히 깨뜨리는 것으로 단연코 용인할 수 없다”고 비난하고, 유엔 안보리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와의 공조 하에 발 빠르게 대북 제재 조치의 수순을 밟고 있고, 또 독자적인 추가 제재 조치를 단행하고 있다.

    이에 보조를 맞추듯 강도 높은 비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일본의 전통적인 좌파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사민당이나 일본공산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 핵실험에 관한 한 일본 전체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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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3차 핵실험에 대한 항의 결의안 채택(13. 2.15)

    그런데 이러한 강렬한 여론에 뒷받침되어 감행되는 일본의 대북 제재 조치는 북한과 일본 사이의 사람, 물건, 돈의 흐름을 실질적으로 끊는 것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 제재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일본 내의 재일 조선인 사회로까지 미치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문부과학성은 “조총련의 영향하에 있다”고 하여 2010년부터 실시된 고교무상화의 대상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들도 줄줄이 북한 핵실험의 대응조치로서 조선학교에 지급되어 왔던 보조금을 동결하기로 결정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에 대한 책임을 조선학교에 전가시켜 ‘제재’를 단행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국적에 관계없이 아동이 민족교육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약속인 국제인권규약이나 아동권리조약을 위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북한 내 강제수용소의 실태나 납치 피해자, 북송사업에 동행한 일본인처, 탈북자들의 인권 침해 상황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본이 왜 자국에 의한 인권침해 실태에는 이토록 둔감한 것일까.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것은, 조선학교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이러한 국내용 ‘제재’ 조치에 대해서, 일본의 좌파 세력들조차도 거의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좌파 정당들이 이에 대한 의견이나 성명을 발표했다는 소식은 어디에도 없다. 사회의 격차와 불평등에 맞서 계급과 성별, 인종, 민족의 차별을 극복하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좌파 세력들이 왜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까.

    적어도 조선학교에 대한 ‘제재’에 대해서도 일본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상한 침묵인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심상치 않은 상태이다.

    위기를 반기는 세력들의 핵을 둘러싼 적대적 ‘연대’

    확실히 북한의 핵무장은 동북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일본사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남한에 사는 우리는 이러한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라면 사재기하느라 이리저리 뛰고 군대에 보낸 아들 걱정하느라 가슴 졸이는 데에 이미 이골이 나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반도의 불안은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약 400만 명의 희생자를 낸 한국전쟁의 기억은 반도의 주민들에겐 생생하다. 물론 단 800g의 우라늄이 폭발하여 십여만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겪은 열도의 주민에게는 이 불안은 남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동북아에서의 어떠한 도발 행위도 우리는 역사의 이름으로, 이 땅의 주인의 이름으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

    한데, 자세히 살펴보면, 반도의 불안을 환영하며 이용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국방을 위해 더욱더 비싸게 무장해야 한다며 불안을 조성하고, 공포의 도화선을 당기고, 그것을 확대재생산해서 먹고사는 세력이다. 불안과 공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은 우리들의 지갑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국내의 불만과 모순을 외부로 돌려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이와 같은 상황을 벗어나려는 일체의 운동을 억압하려고 하는 세력들이다. 북한의 독재체제가 핵무장을 원하는 것도 가난과 고립으로 고통받는 자국민들에게 군사적인 우위를 어필하여 단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는 바이다.

    한데, 우리는 이러한 ‘내정의 외교화’를 북한의 전매특허로만 보려고 하지만, 한국이나 중국을 제쳐두고 일본만을 보더라도, GDP 세계 3위이자 세계 최대 채권국의 체면을 무색하게 하는 내정의 중대한 곤란함을 그들은 안고 있다.

    바로 2011년에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그것이다. 3기의 원자로가 동시에 멜트다운을 일으켰고 대기중에 방출된 세슘의 양만 해도 IAEA에 보고된 것만으로도 히로시마 원폭 170발분에 상당하는 인류사상 유례가 없는 이 사고는, 후쿠시마의 광대한 땅을 무인지대화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방사능에 노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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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수상 관저 앞 데모

    약 2년이나 전에 일어난 일이라 한국에서는 많이 잊혀졌지만, 실은 지금도 고농도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로 흘려(관련 기사) 자국의 주민들은 물론 지구 규모로 피해를 입히고 있으면서도 언제 어떻게 종식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현재진행중인 극히 중대한 사고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정권은 물론 기업, 언론, 학계로 이루어진 원전추진 세력들이 당초부터 주민들의 생명을 돌아보기보다는 국가의 부조리한 에너지 정책이나 핵을 둘러싼 이권을 지키느라 사고의 심각성을 축소, 은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에 의해 전후 최대의 반핵 데모가 일어났던 것은 우리의 기억에도 생생하다.

    하지만, 사태를 풍화시키려는 원전추진 세력들의 선전도 맹렬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바로 센카쿠열도 국유화(2012.9.11) 같은 강격책으로 중일간 영토분쟁을 촉발하여 스스로가 ‘벼랑끝 외교’의 당사자가 된다든지 혹은 심각한 경기침체 문제를 부각시키는 등, 원전사고로 극명하게 드러난 사회의 심각한 모순을 영토분쟁이나 경제문제로 그 쟁점을 바꿔치기하고 있다. 최대의 원전 추진 세력인 자민당이 지난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것은 그 성과의 일단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고 자체는 우민화 정책만으로 덮고 가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것이다. 자민당의 압승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지난 선거도 내용을 들여다 보면, 60%에도 미치지 못한 전후 최저의 투표율에 전체 유권자에 대한 자민당의 지지율은 20% 정도에 머물렀다(관련 글). 자민당의 압승은 결코 민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원전사고로 실추된 ‘경제대국’의 명예를 회복하고 핵을 둘러싼 이권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지배층에게 북핵 위기와 반도의 불안은 너무나도 절실하다.

    예부터 대륙세력이 열도를 공격한다는 상상력 자체는 근대국가 일본을 성립 유지시키는 데 있어서의 최대의 불안이자, 일본이 대륙진출을 통해 제국주의 열강으로 거듭나는 최대의 구실이기도 했다. 그 흐름을 잇는 세력들에게 반도의 불안은 지금도 ‘위기이자 기회’인 것이다.

    누락된역사

    국가는 내부의 위기를 잠재우고 결속을 도모하고자 할 때 적을 찾는다. 적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은 법이다. 일반적인 일본인이 일본을 공격할 개연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것은 북한이다.

    일본에서 정권이나 언론에 의해서 살포되어 유통되고 있는 일반적인 북한 인식은, 대개 지하철에 독가스를 뿌려 무차별살상 테러를 감행했던 옴진리교 같은 신흥 사이비 종교단체가 국가의 형태를 띤 나라 정도의 이미지이다.

    즉 내부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세뇌된 국민들이 빈부격차와 기아상태에 허덕이는 ‘생지옥’에 살면서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대형 매스게임 등에 동원되어 김씨 세습왕조를 찬양하는 나라, 외부적으로는 핵무기를 개발하여 ‘국제사회’에 위협을 가하는 예측불허의 음침한 깡패나라이자 미국 공인 ‘악의 축’ 쯤으로 요약될 것이다.

    그들의 ‘북한 때리기’는 ‘내부의 적’ 색출로도 이어진다. 재일조선인이 그들이다. 조선학교는 공작원양성소이고 졸업생들은 잠재적 테러리스트이며 조총련은 북한의 국가예산을 웃도는 자금을 송금하거나 군사물자를 제공할 수도 있는데다가, 그들은 언제라도 일본인 납치에 조력하여 ‘만경봉호’에 실어 보낼 수 있는 세력으로 선전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선동주의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려 하는 사람은, 자칭 ‘애국자’들로부터 ‘국적(國賊)’이나 ‘매국노’로 매도되기 일쑤이다. 조선학교 ‘제재’ 문제에 대해 일본의 진보 정당이나 조직, 지식인들이 침묵하는 데에는 그간의 이러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열도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하는 세력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그들이 확대재생산해내는 북한 이미지에는 북한이 왜 국제적인 고립 속에서 핵무장을 하고 벼랑 끝에 서게 되었는지, 재일조선인들이 왜 민족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는지와 같은 기원을 이해하려는 어떠한 역사적인 인식도 결여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서 ‘북한 편들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원인을 알지 못하면 같은 일은 계속 반복되는 법이고, 상대를 이해하고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노력이 없다면 상대는 무기를 내려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에 평화가 멋대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북핵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탈핵운동은 그 성패를 같이 하는 것이다. 불안을 반기는 세력이 평화를 부를 리는 없다. 아베 정권은 이번 일미정상회담에서 중국과의 영토문제에 대해서는 대화에 의한 관계개선을 선언했지만,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는 오로지 압력과 제재의 강경책 일변도이다. 이러한 자세는 조선학교에 대한 조치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일본의 교육제도 속으로 들어오면 무상화를 적용하겠다”는 그들의 태도는 민족교육에 대한 전면부정을 의미한다. 아이덴티티를 부정당하면 반발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아이덴티티를 인정하지 않는 조직에 대해 신뢰감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곳에서 평화와 신뢰는 싹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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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데, 일본의 주민들과 북한 사이에는 과거에 서로가 달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같이 앞을 바라보는 연대의 가능성을 품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들은 반제, 반핵, 반전평화운동 등에서 서로 뜻을 같이 하기도 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누락시켜 버린 역사 속에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북한의 모습이 있다. 반대로 이러한 연대의 가능성의 좌절과 고립의 심화가 지금의 북한의 모습을 낳은 한 원인임에는 틀림없다.

    이 연재에서는 과거 북한과 일본의 진보 운동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연대의 가능성을 찾아보고, 그러한 움직임들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또 어떻게 종언을 고했는가 하는 과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당시에 부상한 문제들은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되고 있는데, 고투의 역사만이 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연대의 가능성들은 왜 좌절되었을까, 그 문제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동북아의 불안과 고립은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현재의 시점에서 항상 요동친다. 우리는 미래를 위한 역사상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은 어떠한 강요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모습 그대로 서로 나누며 평화를 누릴 권리가 있다.

    필자소개
    <나는 사회주의자다:고토구 슈스이 선집>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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