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권력 보는 세가지 방식
... 과학, 기록, 문학
    2013년 02월 25일 10:28 오전

Print Friendly

대한민국은 이제 재벌공화국 또는 재벌왕국이 된 것 같다. 삼성제국이라는 말도 있다. 삼성의 최고 지배자를 황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 사회를 재벌이 지배하고 있지만 그런 재벌 중 삼성이 더 압도적이고 더 횡포가 심하다는 뜻이다. 최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재임 시절 이제 국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실토할 만큼 이제 자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재벌 왕국과 민주공화국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재벌에 의해 대한민국의 민주공화 체제는 이제 파멸에 이르렀다.

삼성의 황제는 전제군주 체제하의 군주보다 더 권위적이고 더 폭력적이다. 전제군주시대에는 적어도 통치 윤리가 있었고 법질서도 있었다. 절대 군주도 통치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윤리와 법을 존중하였다.

삼성 제국은 법체계와 윤리를 파괴하면서 그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한다. 이런 삼성의 통치 방식에 대한 주목할 만한 세 가지 접근법이 있다. 이종보의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대한 연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 그리고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이 그것이다.

이종보의 저서는 사회과학의 이론에 근거하여 자본권력을 분석하는 학술서이고 김용철의 저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성의 비리를 고발하는 기록적 증언이며 조정래의 저서는 재벌이 지배하는 현실을 상상적으로 재현한 소설이다.

이종보의 저서와 김용철의 저서는 객관적 분석과 기록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삼성이 실명으로 나온다. 조정래의 소설에서 현실의 삼성그룹은 일광그룹이라는 허구적 명칭을 갖는다. 조정래의 소설에서는 일광그룹뿐 아니라 태봉그룹도 나오고 거상그룹도 나오기 때문에 삼성이 일광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일광, 태봉, 거상 모두가 삼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모두를 합친 것이 삼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 세 저서는 모두 2010년에 발행되었으며 자본권력을 다루는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함께 읽을 만하다. 발행 시기가 저술시기와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발행년도인 2010년 그 자체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러나 2010년을 전후한 시기는 7,80년대식 권위주의 정권이 쇠퇴가 사회의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경제민주화의 필요성 역시 회자되던 때였다.

이때는 또한 최고경영자를 자처하는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이 일치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들 세 저서는 모두 자본권력이 어떻게 정치권력 자체가 되거나 정치권력을 통제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본권력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이종보의 과학적 분석, 김용철의 증언 기록, 그리고 조정래의 소설은 각각 전통적 의미의 철학, 역사, 문학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삼성을 생각

르네상스 시대의 영국 비평가였던 필립시드니라는 사람은 철학, 역사, 문학을 함께 말하면서 이 셋 중에서 문학이 최고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사람에 의하면 철학은 인간에게 유용한 보편적 진리를 추상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잘 이해할 수가 없으며 역사는 구체적인 사실만을 기록하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를 전달할 수 없지만 문학은 보편적 진리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철학과 역사를 겸비하고 있는 셈이며 따라서 최고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문학이 최고라는 필립 시드니의 소박한 주장에 동조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같은 대상을 이해하고 또 이를 알리는 방식에서 철학, 역사, 문학이 각기 다르다는 필립 시드니의 설명은 수긍할 만하다. 삼성을 다루는 세 저서, 즉 이종보의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은 필립 시드니 식으로 말하면 각각 철학, 역사, 문학에 해당한다.

이종보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에서 이종보는 80년대 이후 소위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현대 민주국가에서 통용되는 인민주권의 원칙이 자본권력에 의해 왜 더욱 더 파괴되는 지를 사회과학의 이론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종보는 민주화 시대에 자본권력에 의해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과정이 삼성이라는 자본권력이 취하는 민주적 체제와의 전략적 접속에 기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교한 이론적 틀과 적절한 데이터 분석을 겸한 이 사회과학 저술은 자본권력에 대한 뛰어난 분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저서를 일반적인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파급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다. 전문적 학술서적이 갖는 한계를 이 저서는 그대로 갖고 있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법을 수호하는 검사였던 저자 김용철이 삼성의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자본권력의 하수인으로 자신이 어떻게 전락했는지를 고백하는 참회록이며 동시에 그 시절에 알게 된 삼성의 국가 질서 파괴 행위를 비판하는 증언록이다.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저자는 자신이 직접 본 것, 행한 것, 겪은 것만을 기록한다. 독자들은 <삼성을 생각한다>에 나오는 여러 사건이 자신들이 직접 겪지 않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저서가 독자들에게 끼치는 파급 효과는 이종보의 저서와 같은 학술연구서에 비해 훨씬 크다.

그러나 이 증언록은 저자인 김용철이 재직하였던 삼성에 대해서만, 그리고 삼성 비서실의 불법 행위만을 기록하지 다른 재벌이나 재벌 일반에 대해서는 별로 진술하지 않는다.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은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읽을 수 있는 사실적 기록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구성 한 것이다.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에서는 구체적으로 삼성이라는 자본권력이 등장하지만 <허수아비 춤>에서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광그룹이 등장한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난 후 <허수아비 춤>을 읽게 되면 이 소설의 소재 대부분이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빌려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허수아비 춤>의 소재가 설사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직접 온 것이 아니라고 해도 김용철의 증언 내용이 상당한 정도 <허수아비 춤>의 소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저서 형태의 <삼성을 생각한다>가 아니더라도 김용철은 이미 삼성의 비리를 고발하는 양심고백을 2007년 10월 이후 여러 번 했었고 또 김용철의 증언을 바탕으로 삼성의 비리를 규탄하고 수사를 촉구하는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의 기자회견이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여러 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은 김용철이 증언하는 삼성의 이러한 비리의 기록에 근거하여 일광그룹이라는 허구의 재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자본의 횡포를 보여준다. 자본 권력은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여 그 비자금으로 국가 권력과 문화 권력을 매수한다.

이 소설의 자본권력인 일광그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로 현실의 어디에든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가능성은 이 소설에 나오는 일광그룹이 자본권력 일반을 대표하는 재벌임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박재우가 태봉그룹을 배신하여 일광그룹으로 옮겨와서 자본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또 다른 주인공 강기준은 일광그룹을 배신하여 거상그룹으로 옮겨가 일광그룹에서 했던 것과 유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 소설이 보여주는 파렴치한 기업의 세계가 자본의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임을 보여준다. 개인 자본이든 기업 자본이든 자본은 그 자체의 확대를 위해 자본의 가치 이외의 모든 가치를 무력화 시킨다.

허구로서의 <허수아비 춤>은 현실의 기록으로서의 <삼성을 말한다>가 보여주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삼성을 말한다>는 부패한 자본과 그 부패한 자본에 의해 매수되는 각종 권력의 실태를 보여주지만 그 부패한 현실을 극복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

허수아비 춤

현실의 기록인 <삼성을 말한다>와는 달리 허구인 <허수아비 춤>은 암담한 현실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전인욱 변호사와 허민 교수는 경제민주화실천연대라는 시민단체를 이끌며 자본권력에 의해 무너진 법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물론 이 소설 속의 경제민주화실천연대는 현실에 존재하는 참여연대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의 시민단체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순전히 허구적 존재만은 아니다.

그러나 조정래는 소설적 재구성을 통하여 암담한 현실과 그 암담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을 같이 보여준다. 이는 허구로서의 소설이 현실에 작용하는 치유 효과를 실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이 쓸모가 있다면 그 쓸모는 현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현실을 극복하게 하는 전망도 동시에 보여주는 데에 있을 것이다.

—————————–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000여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이다. 87년 창립된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다.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는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월요일에 게재한다. 이 칼럼은 민교협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올라간다.<편집자>

필자소개
민교협 회원, 중앙대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