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노동이란?
    [에정칼럼] 탈핵동맹의 주체로서 노동자에 대한 생각
        2013년 02월 20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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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핵동맹을 위한 준비는 되어있는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한국에서도 광풍은 아니지만 ‘탈핵’의 바람이 조금씩 불고 있다. 그리고 탈핵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노동자들이 아주 중요한 동맹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동자들은 탈핵동맹이나 에너지전환을 위한 활동이 의미 있음에는 공감을 하면서도 선뜻 나서기는 힘들어 보인다.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노동의 문제를 푸는 것은 핵으로부터 자유롭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것만큼 이나 어려워 보인다.

    전기요금이 인상된다는 뉴스가 전해질 때마다 물가가 오른다는 둥 여론이 들썩인다. 최근에는 정부가 6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는 누진세의 수정안을 발표했을 때도 큰 화두가 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5년 동안이나 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이야기나 사측의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크레인에 올라간 한진중공업이나 삼성중공업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말이 없다. 미디어만 잠잠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 역시 먼 나라 이야기를 대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에너지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막상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것일까?

    자본주의라는 컨베이어벨트에 갇힌 삶

    찰리채플린이 컨베이어벨트의 속도에 맞춰 나사를 조인다. 휴식시간이나 화장실을 갈 때도 시간을 보며 안절부절이다. 그렇게 기계처럼 일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져 병원에 가게 되고 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시위대에 휩쓸려 유치장에 갇힌다. 약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지는 영화 <모던타임즈>의 채플린의 연기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묘하게 어딘가 아프고 기분이 이상하다.

    modern times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분명 75년이나 흐른 옛 영화인데 왜 이렇게 지금의 우리를 보는 것 같지? 어째서 세상은 변하지 않은 거지?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하고 크레인에 올라가야 하고 모든 삶을 내놓아야 하는 걸까? 이렇게 노동자들은 힘든데 왜 누구하나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 걸까?

    그것은 어쩌면 채플린의 영화에서 나오는 공장 컨베이어 벨트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자본주의라는 컨베이어 속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본은 공장의 속도보다 더 빨리 돌아가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컨베이어 벨트를 움직이는 사람들도 그 속도에 맞춰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상실한 채 기계처럼 움직인다.

    이제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부속품이 되어 버렸다.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 세상에 ‘노동자들’은 없고 ‘노동’만 남았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거리로 나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저 일상처럼 지나간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그저 임금을 더 받기 위한 일부 몰지각한 가난한 노동자들의 잘못된 만행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혀를 차며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한다며 비난을 하기도 한다. 어느새 부당하고 사람을 힘겹게 하는 자본주의라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는 불온한 것으로 읽히고 남은 사람들은 온전히 공장안에 갇혀 버리고 만다.

    여기엔 미디어도 큰 몫을 한다. 대부분의 보수언론은 이런 노동문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몇몇 노조간부들이 부추겨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조선일보>에 실린 한 칼럼에서는 절박한 노동 쟁의를 ‘죽음의 굿판’으로 취급해 버렸다. 희망을 잃고 목숨을 끊은 열사들에게는 ‘생명을 방패로 내세우는 피를 바라는 ’순교 코드‘’라고 까지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보수 언론의 심각한 편향 보도나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만을 탓하기에는 무언가 조금 빈약하다. 여기서 나는 최근의 두 번의 경험으로 우리가 자본주의 컨베이어벨트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유를 풀어보고 싶다.

    나는 노동자이다.

    코미디프로가 티비 방송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요즘에도 한 공중파의 주말 코미디프로그램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유행어를 따라하거나 혹은 주변에서 따라하는 것을 한번 쯤 봤을 만큼, 인기가 좋다.

    그중 요즘 내가 즐겨보는 코너는 한 단어를 사전에 나와 있는 뜻과 달리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여 알려주는 코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지만 이것이 여자 친구가 있는 남자에게는 ‘예수님 생일선물을 여자 친구에게 주는 날’로 바뀌어 해석된다. 어떻게 저렇게 각자의 상황에 맞게 잘 해석하고 표현했을까 공감하며 웃게 한다.

    그럼 과연 우리 각자의 사전에 있는 ‘노동자’, ‘노동권’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사는 게 힘든 사람,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할 권리쯤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을까? 사실 80년 이후 태어난 나 같은 사람에게 ‘노동자’나 ‘노동운동’은 참 먼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학생시절에 계급, 노동자, 노동권 같은 단어를 생각해보거나 배운 바가 없고, 아마 내 또래가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그저 공부만 잘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직장을 얻거나 기업의 사장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취업을 하고나면 노동절의 의미도 모른 채 노동절은 그저 쉬는 날로 기록된다.

    10여년 전쯤의 나 역시 노동이란 힘든 것, 하기 싫은 것 그리고 노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그래서 힘들지만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로 정의되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기꺼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노동’ 이란 내가 하는 일과는 다른 뭔가 특별히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고 ‘노동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내 주변엔 아주 많다.)

    나와 노동이 분리되고 노동자가 다른 계급으로 분리된 세상에서는 막상 내가 실직자가 되고, 비정규직이 되고, 산업재해의 피해자가 되어도 그것이 불합리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죽어도 지금껏 나와 다르다고 생각한 그들(노동자)중 하나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제대로 된 노동자 조직을 만들고 함께 동맹이든 전선이든 뭐든 만들고 엮으려면 끝끝내 ‘나는 노동자가 아니야’라고 이야기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먼저 자신만의 생각 속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것이 탈핵을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기계가 아닌 사람을 보라.

    왜 노동자들이 그리고 내가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 변해가는 것을 망각하며 살게 될까? 최근 들어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아주 단순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가끔 운전을 하는 일이 생기면서 나는 내가 운전을 할 때 인간성의 바닥을 드러낸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운전 중에 일명 ‘김여사’로 지칭되는 운전이 서툰 사람이나 초보운전으로 답답한 차들을 마주하게 되면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결코 재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온갖 욕을 내뱉는다. 특히 차가 막히는 날은 더 심해진다.

    하지만 몇 초 후 그 차 운전석에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나 어머니뻘의 아주머님이 앉아 계신걸 보곤 흠칫 놀란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운전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나를 제외한 모든 주변을 그저 불편을 주는 기계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욕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기계로 인식되면 나는 죄책감이라는 단어로부터 상당히 가벼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길을 걷다가 그 사람들과 부딪혀도 지금처럼 정신을 잃고 욕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점점 사람과 만나는 일보다 기계를 접하며 사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사람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져 버린다. 우리는 살면서 혹시 아무렇지 않게 노동자들을 공장이나 사무실 혹은 어떤 회사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곳에 사람이 있고 그들이 나이고, 나의 가족이라고 인식한다면 지금처럼 무관심할 수 있을까?

    오늘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상처 입고 거리로 나설 것이다. 그들을 인식하고 함께 그들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 그것은 노동의 문제, 한 사회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탈핵, 에너지전환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사회문제를 푸는 공동의 미션인 것이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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