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2013년 02월 18일 08: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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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동료 중에서는 재미있는 박사학위논문을 쓰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노르웨이에서의 부부 사이의 가족 재결합을 둘러싼 국가적 개입 과정에 대한 논문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부부가 되는 일 이상의 “사생활”도 없는 것이겠지요? 배우자 선택에 대한 부모의 간섭도 우리에게 구시대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더더욱 국가가 간섭한다면 이것은 아예 “독재 아니냐”는 의구심을 살만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동료 분의 연구를 발표해준 노르웨이 <계급투쟁>지라는 일간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이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는 국가가 합법적으로 (?) 간섭합니다. 선택된 배우자가 “외국인”이라면 말이죠.

    외국인과 결혼하는 거야 본인 자유지만, 그렇게 해서 배우자가 된 사람을 노르웨이에 데려오자면 국가적 “허락”, 즉 배우자 자격 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인에게 노르웨이 크로네 242.000 (한화 약 5천만원) 상당의 연간 소득이 없다면, 당신은 배우자를 데려올 자격이 없다는 것은 노르웨이의 “국법”입니다. 물론 말로는 이는 “일정액 이상의 소득이 없을 경우에는 가정을 통한 외국인의 사회통합이 어렵고 그 생활조건이 좋지 않는 등 인권 침해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방식으로 합리화되는데, 그 속의 논리는 명백합니다.

    주로 이민자와 하급 (비정규직) 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노르웨이 사회 하부 (약 5-10%의 빈민층과 준빈민층)에는 외국인과의 결혼의 자유가 없으며, 그들이 국가적인 복지 지원을 받는 만큼 국가의 사생활 개입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죠. 실업수당 등과 같은 소득은 일단 국제결혼 관련 문제에서는 “소득”으로 간주되지 않거든요.

    그리고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노르웨이 국가는 그런 방식으로 주로 가난한 비서구인 이민자의 “지나친” (?) 유입을 막는 것입니다. 배우자 자격 비자를 그 부인/남편에게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사람들을 보면 대개 고국의 애인과 결혼하려 하는 파키스탄, 소말리아 등지 출신자들이 많은 편이니까요. 이와 같은 조치를 지칭하는 용어는?

    맞습니다. “인종주의” 내지 “인종차별”이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노르웨이는 주로 가난한 비서구인들을 겨냥하면서 가정생활에의 국가적 간섭을 행하는 것입니다.

    Nazi-Demo zum 60. Jahrestag der Zerstoerung Dresdens

    독일 인종차별주의자들인 네오 나치들의 모습

    실은 그 간섭의 희생자 중의 한 명은 저의 학과 동료 한 분, 비정규직 중국사회 강사 분입니다. 중국 출신의 이 비정규직 교수 분의 남편의 전년 (!) 소득이 그 “마의 242.000 크로네”에 약간 미달했다고 해서 (남편도 그 때 비정규직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민청에 가서 “결혼비자 자격 미달, 중국에 가서 사세요!”와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피해자는 그 분 이외에도 약 4-5명이 있지만, 전체 피해자의 총수는 해마다 수천명에 이릅니다. 한데 이와 같은 국가적 만행에 대해서는 여러분들께서 한국이나 서방 언론에서 한 줄이라도 읽으신 적은 있으세요? 없으시죠? 노르웨이 언론에서도 <계급투쟁>지 이외에는 극히 소수의 언론, 매우 드물게 관련 기사를 냅니다.

    이유는? 노르웨이 안팎의 “통념”이란 평화상을 나누어주는 세계 최부국 (最富國), 모범적 복지국가 노르웨이가 인종주의적 인권 침해를 도대체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르웨이 정부가 실행하는 정책이라면, 노르웨이 정부가 행위자로 돼 있는 이상 그 정책이 인권유린일 수가 없다는 것도 세계의 “통념”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확인이 안되고 오보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김정일이 여성에게 자전거를 타지 말라고 금지했다”는 식의 뉴스는 노르웨이를 포함한 서방 세계에서는 “개인의 삶에 무조건 간섭하는 북조선 국가”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 한 때에 활용되었지만, 정작 노르웨이 본국에서 이루어지는 “사생활에 대한 간섭”은 그냥 논외로 남습니다. “북조선은 지옥, 노르웨이는 천국”이라는 “통념”이 대다수의 머리들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회의(懷疑)부터 시작한다”. 누구의 말인지 저는 지금 기억 못하지만, 이 이상의 진리도 아마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지배자, 지배체제가 우리에게 강요해온 각종 “통념”들에 대한 회의부터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산업화에 성공했다”와 같은 통념 말입니다. “우리”는 과연 누군가요? 지금 농성 중인 최병승과 정몽구가 과연 같은 “우리” 범위 안에 동등하게 속할 수 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자꾸 자녀들을 미국에 보내서 거기에 있는 가정 재산을 관리케 하는 한국 지배층의 풍토로 봐서는, 최병승과 정몽구는 아직까지 같은 언어를 쓰긴 써도 그 두 부류의 손자나 증손은 언어적으로도 서로 다른 “우리”에 각각 속할 듯합니다.

    그리고 “주류”로 “대표”된다는 “우리”는 “산업화 성공”을 이루어도, 그 “성공”은 예컨대 공장에서 산재를 당해 죽은 노동자의 유족이나 손 잘리고 다리 부러진 재해 노동자에게는 다 무슨 쓸모 있습니까? 한국의 산재 발생률은 산업화된 국가 중에서는 1위이며, 산재 이후 원직 복귀율은 불과 35% (참고로, 호주는 83%)입니다.

    손이 잘리고 뼈에 금이 간 사람은 원직 복귀 못한다는 것은, 평생 가난 속에서 그 아픔을 술로 달래야 하는 것이나, 벌이가 더 안좋은, 아마도 비정규직이 돼야 하는 자리에 옮겨야 했다는 것을 보통 의미합니다. 피해자들에게는 “우리”가 무엇이고 “성공”은 무엇인가요?

    자유의 맛을 아는 사람은 “통념”들을 회의하면서 세상만사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주변자, 피억압자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판단해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입장에 옭매이지 않는 이상, 예컨대 “저들”의 광명성 위성이나 “우리”의 나로호나, 똑같은 우주에서의 무기 (정탐용 위성) 경쟁이 아닌가, 단 “저들”을 (미국을 위시한) “세계”가 비난하면서도 “우리”를 계속 지원해줄 뿐이다, 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볼 것입니다.

    자유의 맛을 아는 사람에게는 “저들”의 문제보다는 “우리” 측의 악행들은 훨씬 더 양심에 걸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의 구성원인 이상, 그 악행을 막지 못한 데에 있어서는 “나”의 책임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윤리는 결국 책임의 윤리이기도 하죠. 한데, 언론이 지배하고 “통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매일, 매순간 엄청난 노력해서 쟁취해야 하는 것은 진짜 자유입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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