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 차별 약화 위한 정책,
오히려 카스트 구분을 강화해
[현대 인도인민의 역사] 불가촉천민 투쟁, 왜 좌파진영에서 배제되었나(1)
    2013년 02월 12일 10: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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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현대사에서 인민을 논하고 좌파의 역사를 논하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카스트 체계에서 최하층에 위치하는 불가촉천민에 관한 것이다. 불가촉천민은 그 자체가 오염된 존재이기 때문에 접촉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사회학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에서의 백정이나 일본의 부라쿠민과 비슷한 위치이나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그런데 영국 지배와 함께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불가촉천민과 그 바로 위의 위치를 차지한 슈드라가 카스트 상승 운동을 벌인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경제력을 확보한 일부 집단을 중심으로 일어난 현상인데, 그들은 카스트 체계를 깨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고, 그 안에서 더 높은 카스트로 이동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런데 그 신분 이동이라는 것의 최종 결정은 브라만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 인도의 카스트는 조선 시대의 반상제도와는 달리 정부가 규제하는 행정 체계의 일환이 아니다. 그래서 정부의 행정 행위에 의해 없어질 수 있는 그런 제도가 아니다 – 절대적으로 브라만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가운데 상당수의 불가촉천민들은 그 다수가 걸었던 길과 다른 길을 간다. 브라만과 적대적 관계를 표방하는 것을 들고 나온 것이다. 카스트 해방을 부르짖은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좌파 진영은 그들의 카스트 해방에 대해 그다지 큰 호응을 하지 않았다. 공산당 일부에서 그들과 연대를 하는 경우가 있긴 하였으나 그 운동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였다. 좌파는 왜 불가촉천민의 해방 투쟁에 냉담하였을까?

불가촉천민 해방 투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달리뜨(Dalit 문자대로 해석하면, ‘짓밟힌 자’) 운동이다. 달리뜨 운동은 1920년대 후반부터 나중에 독립된 인도 공화국의 초대 법무장관이 된 암베드까르(B.R.Ambedkar)의 기치 아래 인도의 서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적극적인 운동은 독립 이후에 이루어졌다.

암베드카르

불가촉천민들의 싯다르타라고 불리운 ‘암베드카르’

암베드까르는 불가촉천민제 철폐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카스트 힌두의 강한 저항 때문에 실패하고 결국 자신을 추종하는 불가촉천민 세력을 이끌고 1956년에 불교로 집단 개종하고 만다. 암베드까르가 정치적 운동은 펼치지 않았으나 그의 이런 저항은 훗날 불가촉천민들에게 정치운동을 하는 모태가 되었다. 암베드까르는 독립 후 회의당의 정부에 들어가 여당의 법무부장관을 지내기까지 할 정도로 거물이었으나 그조차도 카스트 차별의 그 엄청난 벽을 뚫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암베드까르의 저항은 첫 정부 여당의 정책에 크게 반영되었다. 정부는 그들을 차별적으로 우대하는 정책을 만들었으니, 바로 ‘보호를 위한 차별’ 정책이 헌법에서 채택된 것이다. 이에 따라 불가촉천민들은 공공 부문에 유보된 일정한 비율의 범위 내에서 자신들끼리 경쟁하여 직업과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쿼터(quota)제이다.

이후로 미리 지정해 놓은 카스트라 해서 그들을 지정카스트(Scheduled Caste)라고 부른다. 그들은 이제 법적으로 주 의회 및 연방 의회, 주 행정부 및 중앙 행정부의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방 선거나 중앙 선거에서 인원 동원을 노리는 일부 주요 정당과도 제휴하였다. 그런데 그 인구 수가 막강하다. 그들은 카스트 가운데 슈드라 다음으로 많은데 전체의 20~25% 정도를 차지한다. 그 결과 절대적으로 투표수가 많은 불가촉천민의 정치 권력은 이전보다 점차 커져갔다.

쉽게 말해 쿼터를 대거 확보한 불가촉천민들은 보통 선거제를 도입한 각종 선거에서 아주 유리한 고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이론적으로 말하면 25% 정도를 몰표로 차지할 수 있으니 과거 사회적으로 당했던 피해를 선거에서 표로 고스란히 되갚아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다 인도는 독립 후 보통 선거제와 빤짜야띠 라즈(Panchayati Raj)라는 지방 자치 제도를 도입하였다. 인도 헌법에서는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州)를 더 잘게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우리로 치면 면, 읍, 군의 세 층으로 나눈 후, 각각에 빤짜야뜨라는 자치 의회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각 단위에서 구성되는 이 자치 의회는 당연히 선거를 통해 선출되기 때문에 인구 수가 많은 불가촉천민과 슈두라의 하층 카스트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의 산업 현장이나 관공서에서의 승진 및 신규 직원 채용 등의 문제에서도 다른 요건보다도 그 대상자가 어떤 카스트에 속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의 카스트를 토대로 등장한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 정치의 기반이 카스트에 있기 때문에 카스트를 위한, 카스트에 의한, 카스트의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회 변혁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본질적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동안 전통적 체계 내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자신들의 카스트에 대한 자존심을 고양시키고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인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이들 하층 카스트들은 정부의 공직과 교육기관에서 일정한 비율의 좌석을 할당받는 지정 제도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몰표를 향해 매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카스트 체계를 폐기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체계를 활용하려 하였다. 그래서 자신들이 과거 억압받았던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 경제적인 이익을 최대한 극대화 하여 했다.

불가촉천민의 정치세력화는 1957년에 세운 인도공화당(Republican Party of India)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인도공화당은 그 힘이 점점 커지면서 내부에 분열이 생기면서 당이 붕괴되었다. 그들은 1990년대부터 큰 세력화가 된 여타 후진계급이 나타나기 전에는 인도에서 가장 많은 유권자를 가진 집단이었다. 따라서 만년 집권 여당은 그들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였고, 그에 상응하여 많은 지도자와 그 지지자들이 회의당에 합류하였다.

그러자 젊은 세대와 호전적인 성향의 불가촉천민들은 그 합당을 거부하면서 달리뜨 표범단(Dalit Panther)이라는 이름 아래 이전보다 더 투쟁적인 성격의 사회 운동을 전개해 갔다.

그러면서 다시 대중 정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84년에는 대중사회당(Bahujan Samaj Party)이 창당되었다. 본격적으로 몰표를 통해 더 큰 정치력을 확보하려 하는 것이었으니 그 세력은 갈수록 커졌다. 급기야 1995년에는 대중사회당이 종교 근본주의 정당인 인도국민당과 연합하여 인도 최대의 인구를 가진 주인 웃따르 쁘라데쉬의 주수상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다.

불가촉천민에 대한 의석 유보 정책은 비(非)불가촉천민 특히 카스트 체계에서 불가촉천민 바로 위에 위치한 슈드라의 불만을 유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1978년 잠시 권력을 잡은 민중당 정부는 불가촉천민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회에서 후진적 위치로 억압당하고 있는 여러 계급들에 대한 조사와 정책을 실시하였고, 그것이 1980년 만달 위원회(Mandal Commission)의 보고서로 나타났다.

만달

만달(오른쪽)이 보고서를 제출하는 모습

만달위원회(Mandal Commission)란 인도 헌법 제340조에 의거하여 역사적으로 불평등한 차별 대우를 받아 온 하층 집단의 상황을 개선하는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1978년 당시 민중당(Janata Party) 정부의 수상이었던 모라르지 데사이(Morarji Desai)가 추천하여 대통령이 구성한 5인 위원회를 말하는데 위원장인 만달(B.P.Mandal)의 이름을 따라 보통 만달위원회라 부른다. 이 보고서는 정부가 ‘여타후진계급’(Other Backward Classes) 즉 불가촉천민은 아닌 나머지 후진 계급에게도 마찬가지로 공공 기관과 교육 기관의 취업자 수의 일정 비율을 유보할 것을 권고했다.

이 정책의 본질인 ‘보상적 차별’이라는 것은 불가촉천민과 부족을 제외한 여타 후진 ‘계급’ 혹은 ‘카스트’에게 특별한 우대 혜택을 주자는 것이었다. 여타 후진계급에 속하는 카스트들은 그 구성 및 지역적 경제적 차이 등이 극히 다양하고 잡다하지만 대체적으로 카스트 체계의 슈드라에 해당하는 범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그들은 카스트로는 낮게 위치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화 된 사회에서 그들이 반드시 최하층 계급이나 빈곤층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상당한 권력과 부를 확보하였다는 의미다. 결국 여타 후진계급의 지정을 두고 각 정당과 주 정부와 중앙 정부 사이에 이견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지루한 소모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소위 ‘여타’ 즉 그 나머지의 후진 계급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즉 카스트를 기준으로 정할 것인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로 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면서 10년 동안 방치되었다. 만달보고서의 내적인 결함과 더불어 여러 가지 정치적인 고려로 인해 1980년 12월 31일에 최종 보고서가 제출된 후 10년간 회의당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9년 민중당이 정권을 획득하면서 이 보고서의 내용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러자 일부 상층 카스트가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자신들이 상층 카스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더 잘 사는 것도 아니니 정부에서 보상을 해주려면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리하여 상층 카스트와 하층 카스트 간의 분쟁은 갈수록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일부 상층 카스트의 대학생들이 항의의 분신 자살을 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연립 정부를 구성하던 인도국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은 정부 지지를 철회하면서 연립 정부가 붕괴되고 말았다. 만달위원회 권고에 반대한 인도국민당의 주장은 소수에 대한 우대는 사회를 더욱 더 분열 시키고 우대로 인한 혜택은 소수 즉 여타후진계급의 일부 유복한 계층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만달 위원회는 1992년 인도 대법원에 의해 합법으로 판정이 났고, 이후 인도 정부는 그것을 실시하고 있다.

여타 후진계급에 대한 보상을 위한 정책은 인도 사회에서 그들이 당해 온 불이익을 고려하고 인도 정부가 갖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책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출발이 민중당에 의해 더 많은 표를 확보하기 위한 즉 정치적 이해 관계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 이 정책을 만신창이가 되게 만들어버렸다. 카스트 차별을 약화시키기 위해 도입한다는 ‘만달 정책’이 카스트 구분을 오히려 강화했다는 점이 매우 아이러니하다. 만달위원회는 인도 사회를 카스트로 다시 분할하고 정부가 앞장서서 카스트 구조를 존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준으로 카스트를 범주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이 글을 보내준 이광수 교수에게 몇가지 궁금한 점을 질문하고, 이에 대해 이 교수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질문 내용과 보충답변을 싣는다.<편집자>

첫째 궁금한 점 ‘대중사회당’이라는 진보적일 것 같은 정당이 힌두교 근본주의 종교정당인 국민당과 연정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로지 정권 획득을 위한 전술이지요. 대중사회당은 말로는 ‘사회당’처럼 보이지만, 전적으로 불가촉천민당입니다. ‘사회주의’ 의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고, 오로지 불가촉천민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종교 근본주의와 같은 다른 의제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전술이 먹혀 두 당이 웃따르쁘라데시에서 정권을 잡았고, 대중사회당의 당수가 주 총리까지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렇게 권력을 잡은 후 그 정당의 힘이 급락하게 되고, 불가촉천민의 사회적 지위 향상 또한 사회적 이슈가 아닌 권력 이슈로 바뀝니다. 지금 불가촉천민의 지위 향상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은 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대중화로 인한 몰락이지요. 제가 사석에서 대학교 시간강사 문제 해결만 해준다면 새누리당과도 손잡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런 주장이 틀렸다는 역사적 증거이지요^^.

둘째, 78년 잠시 권력을 잡은 민중당 정부라고 나오는데, 민중당이라는 이 당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인디라 간디가 1975년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야당들이 모여 만든 연합정당입니다. 사회주의자들도 있지만, 인도국민당의 전신 정당도 들어갑니다. 오로지 반국민회의당으로 모인 거지요. 그리고 총선에서 승리하여 인도에서 처음으로 비국민회의당 정권이 탄생합니다. 우리로 치면 반한나라당을 목표로 모든 정당이 모여 새로운 당을 만든 겁니다. 그렇지만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권력을 잡은 뒤 화학적 결합에 실패하여 데사이 수상이 사임하고, 우파 민족주의/종교 근본주의 세력이 지지를 철회하면서 그 후임 짜란 싱 수상 때 연정이 붕괴되어 다시 총선을 치릅니다. 그리고 이들 반국민회의 연합세력이 대패하여 다시 국민회의당 정권이 들어섭니다. 한국에서 미국 민주당식 무지개 정당을 만들자는 의견의 허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야당이 권력을 잡기 불가능하다는 것도 간과할 수는 없고…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거지요.^^

셋째, 만달위원회는 어느 정당 정부에서 추진한 것이며, 또 그 위원회는 주 단위인지 전국 단위에서 구성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78년 민중당 정부의 수상이었던 데사이가 추천하고 대통령이 구성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주 정부인지 전국 정부인지 궁금한 것이죠

만달위원회는 데사이 집권기 민중당이 과감하게 시작한 겁니다. 약 2년에 걸쳐 위원회 활동을 하였지만, 조사 보고서가 마무리 되어 보고서를 제출하는 시점은 정권이 다시 넘어가 국민회의당의 인디라 간디 재임기인 1980년 12월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진에 나오는 보고서를 접수하는 분은 자일 싱(Zail Singh)이라는 분으로 인디라 간디 정권에서 연방 내무부장관을 하던 사람입니다. 지금 수상인 만모한 싱이 아닙니다. 같은 시크교도라 복장이 비슷한 거 뿐이지요.

만달위원회는 연방 정부 차원의 일이고, 그만큼 그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인디라 간디 정부는 그 ‘권고안’을 받아 시행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다시 민중당(데사이의 민중당의 후신)에게 권력이 넘어간 뒤 전격적으로 그 권고안을 시행하지요. 그러면서 사방천지에서 반대가 일어나고, 정국이 요동칩니다. 나중에 대법원 (우리로 치면 헌법재판소)에서 시행하라는 최종 판결을 받아 전면적으로 시행을 합니다만, 아직도 시행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필자소개
이광수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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