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전노조 산개투쟁과 타결 과정
    [아빠의 현대사47] 봄날은 간다-2
        2013년 01월 14일 03: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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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투쟁은 나아가 한국노동운동의 중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민주노총은 그 동안 발전투쟁에 모든 책임을 다하려 애썼다. 이는 발전투쟁에 도움은 물론이고, 전체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됐다. 민주노총은 이제 발전투쟁을 끝까지 책임지고 승리로 이끌어냄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노동자의 대표조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야 한다.
    이는 한국에 민주노조운동이 전면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전태일 열사 이후 면면히 이어져 오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대중적 운동으로 발전해 온 민주노조운동의 승리를 뜻한다. 즉 노사협조주의, 개량주의, 어용적 노조운동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2002년 3월, 단병호 위원장 옥중 특별기고문 중에서)

    투쟁의 순간들

    처음으로 시도한 산개투쟁은 무수히 많은 뒷이야기들을 남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지에 있으면 안 된다는 거죠. 시골은 기지국에서 위치를 추적해 쉽게 잡아 가더라구요. 산개파업을 하면 무조건 도시에 있어야 추적이 안된다는 경험을 했어요. 저희는 강화도 민박집에서 자다가 추적당해 잡혔거든요.”(정택주, 인천화력지부)

    “사람마다 특색이 있어요.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아달라는 얘기가 많았어요. 3명은 성향이 맞는데 1명이 나이 먹은 사람인 경우 맞추기를 힘들어 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밤에는 PC방에 가고 아침에 자고 하니까 나이 드신 분은 혼자 밥먹고.. 제발 바꿔달라고 하기도 한 거죠” (김일, 서인천지부)

    “저는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제일 어려운 것은 부인문제였던 것 같아요. 그 전날 아주 괜찮았는데 아침부터 수심이 가득하단 말에요. 물어보니까 어제 밤에 집사람하고 통화를 했는 데 ‘안 들어오면 가방 싸겠다. 지금 대학 다니는 애들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책임지려고 이러느냐?’라는 전화를 받고나면 후유증이 며칠을 가더라구요.” (신현규 인천화력지부)

    모든 장기투쟁에는 희로애락이 있는 법이다. 특히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있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파업을 하고, 회사와 정부가 압박을 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지 105년만에 처음으로 진행한 파업이었다. 산개투쟁을 시작하자 정부의 공세도 강해졌다.

    신국환 산자부 장관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미 법으로 통과된 정책 철회를 요구하면서 파업하는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다. 발전소 가동에 문제가 없으면 2천명이든 3천명이든 해고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3월 4일까지 24명이 수배되고, 47명이 해임되었다. 수배자들에게는 500만원의 포상금도 걸었다.

    조선일보는 레이건 대통령 때 항공사 파업에 대해 48시간만에 11,350명을 해고한 것을 인용하기도 했다. 경찰은 3월 5일 오전 5시부터 2시간동안 서울, 수도권, 강원지역 등 숙박업소 1만 204곳에 경찰관 1만 352명을 동원해 일제 검색에 나서기도 했다. 경찰에 잡힌 조합원들이 ‘업무복귀 자술서’ 작성을 거부하면 업무방해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맹과 민주노총이 나서서 조합원들에게 머무를 거처를 제공하기도 하여 체포된 조합원은 많지 않았다. 성창일 사회보험 서인천지부 지부장처럼 부인이 아기를 낳은 상태에서 함께 산후조리원으로 가고, 그 집에 7명의 발전노조 조합원을 2주 동안 집에 머물게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민주노총이 없었더라면 산개투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성기업에서 어떻게 하냐면 조합원들이 거의 10여명이 넘더라고. 짐을 싸가지고 왔어. 아예 이사를 했어. 쌀, 먹걸리, 반찬, 신문, 물… 매일 점검 멤버가 들어와서 점검해서 계속 떨어지면 갖고 오는 거야. 연대집회도 유성기업 동지들 같이 결합해서 했었고.”(산청 조합원 구술 중에서)

    조합원들은 숨어 있지만은 않았다. 투쟁 중간 중간에 번개집회를 열고 다시 산개하는 등 동력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며 투쟁했다. 가족들도 가족대책위를 구성하여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시민사회단체도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를 엄호했다. 바야흐로 사유화반대에 대한 전국적인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3월 24일 연세대에서의 혼선

    정부와 발전회사는 3월 20일 최후통첩을 한다. “3월 25일 오전 9시까지 복귀하지 않을 경우 전원 해임하겠다.”고 했다. 이때까지 모두 763명을 업무방해와 노조법 위반으로 고소한 상태였다. 조합원 3,900여명을 대상으로 148억원의 가압류도 신청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는 3월 24일 연세대학교에 조합원을 집결시키기로 한다.

    연세대 집결 후 다시 산개투쟁에 나서는 발전노조 조합원들

    “3월 25일 즈음 회사 측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됐잖아요. 복귀하지 않으면 전 조합원을 해고시키겠다고… 생각을 깊게 한 조합원들은 ‘어떻게 4천명, 5천명을 짜르겠느냐’고 안 흔들렸지만 사람마다 다 같진 않잖아요. 특히 제일 흔들린 사람들은 나이든 조합원, 5직급 과정이었죠. 이 사람들에게 전화접촉을 많이 했어요. 전국적으로, 사업소별로 ‘5직급은 일단 월급이 많다. 고참들이니까. 이 기회에 너희만 짤린다. 쓸 만한 젊은 조합원들은 안 짜른다. 너희는 앞뒤 안보고 짜른다.’ 이렇게 되니까 3월 25일을 전후로 고참들이 전국적으로 짐싸들고 그냥…”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크고 작은 판단 차이를 겪은 나는 몇 번이고 방침을 확인했다. 모인 후에 다시 산개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원연행이라는 옥쇄인지를 결정해야 전술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 끝에 옥쇄전술임을 확인했다. 전교조가 그랬던 것처럼 한꺼번에 수천명이 누워서 끌려가는 모습을 TV 등을 통해 보이면서 일단 투쟁을 마감하자고 했다. 사측의 공세와 이로 인해 흔들리는 조합원들을 보면서 투쟁을 전면적으로 전환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을 한 셈이다.

    따라서 산개전술이라면 당연히 준비해야 할 퇴로를 준비하지 않았다. 우리를 도와주는 학생들과 연세대에 나가 있던 조직실 성원들에게도 그렇게 전달했다. 3월 24일 오후 6시 50분부터 연세대 진입이 시작되었다. 이후 화염병을 던진 혐의로 학생 5명이 구속되었다. 미리 화염병까지 준비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현장 지도부의 생각은 달랐다. 조합원들이 모인 가운데 찬반투표를 통해 복귀시한에 대한 조합원의 의사를 수렴하려 했다. 투표용지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혼란이 벌어졌고, 투쟁이후 처음으로 381명이라는 대규모 검거사태를 빚었다. 마침 연세대에서는 무슨 인기그룹의 음악회가 있었다. 산개방침이 조금이라도 먼저 나왔더라면 그들과 함께 섞여 나오는 방법 등을 통해 조합원들이 덜 연행되었을 것이다. 아니 미리 그런 방침이 있었다면 학생들과 함께 도망갈 수 있는 퇴로를 확보했을 것이다.

    발전노조 평가서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현장 지도부는 경찰 병력이 투입될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조합원 산개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동성당 지도부와 혼란을 빚어 다시 집결하도록 했다.” 아쉬운 지점이다. 이후 개인적인 평가이기는 하지만 마치 연맹이 경찰 동향에 대한 보고를 잘못해서 혼란이 생긴 것으로 쓴 사람도 있다. 더 아쉬운 부분이다.

    “혼선의 이유는 명동성당에 보고하는 보고 담당자들의 정세판단의 오류에 기인했다. 공공연맹이 맡고 있었던 보고 담당자들은 경찰정보망의 말만 믿고 침탈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보고를 명성에 보낸 것이었다…. 명동성당 지도부는 현장지도부의 의견을 따랐어야 했다. 지도부의 혼선으로 인해 3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연행되었고 이중 상당수가 복귀해버렸다.”

    이와는 다른 조합원들의 판단도 함께 기록으로 남겨둔다. 투쟁의 과정에서 잘못된 결정을 하면 결과적으로 조합원들이 피해를 입게 됨은 물론 이후 전개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다.

    “3월 25일 잘못된 판단으로 다 무너져버렸어요. 거기만은 옥쇄파업을 했다면 이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3월 25일날 연세대에서 했으면 사실 파업파괴자나 이런 부분이 적어질 확률이 컸었거든요……저는 연대에 못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다 열 받아서 옥쇄인줄 알고 들어갔는데 또 산개하라고 하니까 우리들이 산개하라고 했다는 생각은 안하고 ‘민주노총에서 산개하라고 했다. 그래가지고 이 파업을 자기네 멋대로 조종한다.’ 이러는 거지”

    “조합원들의 의식은 뭐냐면 결정적으로 그날로 거기서 옥쇄하면서 마무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차 산개하고도 또 들어온 거예요. 대부분 조합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간 거고, 또 일주일을 끌고 가다보니까 굉장한 혼란이 생겼어요.”

    투쟁이 끝난 후 한참 후 조합원들이 들려준 얘기다.

    회사의 압박과 민주노총의 대응

    25일이 지나자 발전회사는 “오후 2시 현재 조합원 5,591명 중에 33.5%인 1,875명이 업무에 복귀했다.”고 발표한다. 물론 모두 진실은 아니었지만 동요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어 “해고 조치된 197명, 해고절차 진행 중인 404명, 오전 9시 미복귀자 3,912명에 대한 예외 없는 해고절차에 착수한다.”고도 했다. 또한 29일에는 3차 징계대상 노조원 233명을 대상으로 미복귀자 150명을 해임한다.

    민주노총도 3월 26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2월 26일에 이어 두 번째로 4월 2일 전면총파업을 결의한다. 검찰은 4월 1일 민주노총 연대파업 시 양경규 위원장을 포함하여 연맹 간부 7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서겠다고 발표한다.

    회사와 정부의 최후통첩과 민주노총의 총파업, 바야흐로 두 번째 전면대결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나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수배가 되는 셈이었다. 사실 나는 한번도 수배를 당한 적은 없었다. 바로바로 잡혀서 구속되었으니까. 따라서 수배생활동안 어떻게 지낼 것인지를 준비해 두었다.

    4월 2일 총파업투쟁을 앞두고 공공연맹은 “이번 투쟁에 예외는 결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될 것”이라는 양경규 위원장의 담화문을 발표하고, 조직에 만전을 가했다. 3월 25일부터 산하 56개 노조위원장들이 정부의 강경 대응을 돌파하기 위해 단식투쟁에 돌입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4월 2일 오후 1시를 기해 연맹 산하 164개 사업장 조합원 27,097명이 파업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바로 전날 열린 6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총파업 돌입과 함께 총파업 투쟁본부로 전환하기로 했었다.

    민주노총도 산하 6개 산별연맹 416개 사업장 185,026명이 파업을 결의하고 “4월 2일 총파업을 앞두고 정부에 마지막으로 묻는다.”라는 성명을 냈다.

    드디어 4월 2일, 종묘에서 열린 예정이었던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끝나면 양경규 위원장을 빼돌릴 사람들을 배치하고, 나도 일단 피할 준비를 했다. 그걸 우리는 ‘잠수탄다’고 한다. 양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오전에 여의도에 있는 지적공사와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차를 한 대 빌려두고, 묵을 숙소도 알아두었다. 물론 비상시 연락할 수 있는 핸드폰은 소수만 연락가능하게 만들어 두었다.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갑작스런 합의타결 소식과 혼돈

    오후 1시 파업을 10분 앞두고 갑자기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맹 서형석 사무처장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당시 교섭권은 연맹을 넘어 민주노총이 직접하고 있었다.

    나는 대개의 경우 장기투쟁이 끝나면 교섭내용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투쟁 전술에 전문가가 있는 것처럼 교섭에도 전문가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들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결 내용을 받아 적으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사화합을 바탕으로..” “발전소 민영화에 대한 교섭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등의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정부와의 교섭에만 빠져 전체적인 투쟁 흐름을 놓친 셈이었다. 그렇게 투쟁은 끝이 났다. 이후 민주노총 임원전체와 연맹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민주노총은 “총파업 돌입을 앞두고 교섭중단의 최종시한을 고수하지 못한 집행상의 오류가 있었고, 잠정합의가 된 시점에서의 파업유보 결정은 이미 많은 현장에서 파업에 돌입한 상태라는 현장 조건을 감안하지 못한 것” “조합원 동지들의 투쟁을 민주노총의 자랑스러운 투쟁으로 받아 안지 못한 과오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성명서를 내고 임원전체가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연맹 양경규 위원장도 “4월 2일의 노정합의는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을 훼손하고 현장에서 끊임없이 실천하는 동지들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잘못이었음을 먼저 고백하고, 조직의 책임자로서 동지 여러분의 어떠한 질책도 달게 받겠다”며 사퇴한다. 38일간의 치열한 투쟁은 마지막 순간의 오류로 인해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당시 감옥에 있었던 단병호 위원장은 특별 서신을 통해 “만약 이 같은 운동에너지를 현실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도 이를 현실화시키지 못하면 우리 운동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되레 위기에 빠짐을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라고 썼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민주노총이 돈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한다.

    “인천에서 이번에 ‘민주노총이 이사를 가는 데 지원이 많이 간다’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민주노총 고위직에서 일했었다는 사람이 이번 합의문이 20억 짜리래요”

    그렇게 참으로 허무하게도 2002년 봄날은 갔다.

    남동 발전소 매각 저지와 그 이후

    발전회사는 파업기간 중 3차에 걸쳐 348명을 해고 했다. 업무방해로 894명을 고소했고, 노조와 조합원 3,172명을 상대로 469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급여를 가압류했다. 조합원들은 A,B,C 등급으로 분류되고, 개별감사를 당하고, “이번 파업에 대해 깊이 반성하며, 다시는 파업에 참가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반성문도 강요받았다.

    발전소 매각 반대 민주노총 포스터

    그러나 한번 투쟁을 겪은 노동자들은 그들 표현대로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현장투쟁을 통해 모든 방해 책동을 막아냈음은 물론 투쟁 직후 산업자원부가 7월에 발표한 “남동발전소 매각” 방침을 실사저지 투쟁 등을 통해 막아낸다.

    2003년 3월 28일 산업자원부는 공식적으로 매각철차 중단 선언을 한다. 비록 당장의 투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투쟁으로 사유화를 저지한 것이다.

    과거 유공을 사유화함으로서 지금 LG 칼텍스, SK 등 대기업들이 정유사를 운영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다. 기름값은 오르기는 잘 오르지만 내리지는 않는다.

    한국통신이 KT로 사유화되면서 지금처럼 높은 통신비를 부담해야만 한다. 그리고 수익금은 모두 주주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KT의 경우 배당 성향이 사유화 이전에는 평균 15%였으나 사유화 이후 연평균 51%로 증가했다는 통계도 있다. 2011년 연간 가계동향 조사결과를 보면, 월평균 통신비는 무려 14만 2천9백 원에 달한다.

    한 때 65,000명이 넘던 KT의 정규직 노동자는 이제 31,000명에 불과하고, 사유화 직전 KT에서 근무하던 비정규직 노동자 7천여 명을 해고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SK와 LG등 대기업이 사유화로 인해 혜택을 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촛불집회로 확인된 사유화 반대라는 국민 여론에 놀라서 공공부문을 민영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임기 말에 KTX 사유화를 위한 관제권 환수, 인천공항 면세점, 청주공항, 의료 및 물, 가스등의 사유화를 추진했다. 이제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공공부문 민영화에 가속도가 붙을까 그게 걱정이다.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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