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농업개혁, 미미한 성과
    정치적 의지와 지지세력 부족
    [현대 인도인민의 역사] 농업 개혁과 농민 저항 운동 (2)
        2013년 01월 14일 12:04 오후

    Print Friendly

    연방 정부를 이끄는 회의당의 사회주의적 이념에 따라 각 주 정부는 소작인을 보호하기 위해 소작 기간 보장과 소작료 규제 그리고 소작인이 토지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다양한 법률을 시행하려 했다. 하지만 각 지역에 포진하는 두터운 봉건 기득권자들의 방해에 막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다만, 초기에 공산당이 집권한 께랄라에서만 소작인들이 강력하게 투쟁하였고, 그것을 주 정부가 적극 지원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1977년 이후 정권을 잡은 공산당이 서벵갈에서 농민들과의 전면적 합작 전선을 형성해 성공하기에 이른다.

    인도 정부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토지개혁 외에도 농업과 관련된 많은 부문에서 개혁 조치를 단행한다. 농민에 대한 신용 제공, 농산물의 생산과 판매, 협동 농장의 운용, 주요 관개 시설의 운용 등이 그 주요 골자다.

    서남쪽의 케랄라와 동북쪽의 서벵갈이 공산당의 강세지역

    이는 식민 지배 종식 이후에도 농업의 봉건 체계가 여전함으로써 지주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변함없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하루 속히 그 제도를 개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장치의 개혁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지주의 고리대금업에 의한 착취였다. 고리대금업의 근절은 중개인(자민다리)의 철폐와 토지 보유 상한제와 더불어 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농업 개혁의 주요 목표였다.

    고리대금업의 근절은 협동조합과 같은 공공 기관을 설립하여 그것을 통해 농민들에게 신용을 제공해주는 방식을 통해 시도하였다. 특히 1969년에 공산당이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회의당에 연립 정부를 구성해주는 조건으로 국유화 된 주요 상업 은행을 통한 신용 제공이 크게 증가하면서 농민들의 고리대금업 사채 의존 비중이 상당히 감소하였다.

    하지만 효율적인 경작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려 한 소규모 비경제적인 토지 보유자들에 의한 협동 농장의 도입 또한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빈농의 경제적 조건이 향상되지 못하였다. 공공 관개 체제 또한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다.

    인도 농업은 불규칙한 강우량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정부는 관개 시설 개발에 투자를 시도했으나 이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인도 농촌은 극심한 빈곤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협동조합이나 관개 시설의 운용은 대체로 기반 시설이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뻔잡이나 하리야나 주의 농민 특히 그 가운데 부농층에게 큰 혜택을 줌으로써 빈곤한 농촌에서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어갔다.

    결국 1960년대 말까지의 인도 농촌은 토지개혁을 비롯한 여러 가지 농업 개혁을 시도하여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농업 생산량은 늘지 않고 농산물 생산 증대도 이루어지 않았다. 농산물 생산 증대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단지 경작지가 확대 되어서 일어난 결과일 뿐 개혁이나 기술 개발 등이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결국 식량 부족이 계속 이어지면서 외국으로부터의 식량 수입이 만성화되어갔다. 1969년 식량 부족과 곡물 가격 폭등은 나라 전체를 큰 혼란으로 빠트렸다.

    연방 정부를 주로 구성한 회의당은 비록 상층 카스트로 구성된 지주와 부르주아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본적으로는 –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 사회의 평등과 농민 노동자의 계급 지위의 상승을 꾀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책을 많이 실시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책은 지지층인 지주와 부르주아의 집요한 방해 때문에 거의 실패하였다. 그것은 연방 정부가 토지개혁의 여러 과정을 통해 보았듯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현해야 한다는 강력한 정치적 힘과 의지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고, 가난한 농민을 확실한 우군으로 확보하는 데에서 아직 준비가 되지 못한 정치 세력이 겪은 시행착오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경우를 보더라도, 좌파는 자신이 지향하는 이념으로 평가를 받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노동자 출신을 지지하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좌파성이 담보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 대부분은 그 후보가 진정성과 이념성을 갖추고 있다 해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정리되지 않은 정책들을 보면 그가 집권하면 이념에 따른 급진적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고 결국 그 결과는 수많은 인민의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된다.

    한국의 좌파 진영은 인도의 회의당이나 공산당이 자기들보다 이념적으로 좌향좌를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지 세력을 담보하지 않은 상태는 급진적 좌파 정책은 물론이고 온건한 자유주의 정책조차도 확보하기 어렵다. 보수 세력이 얼마나 강건함은 한국에서 18대 대선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배우지 않았는가?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농업 개혁 정책이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서 농업은 무기력한 침체에 빠지게 되고, 정부는 그 만성화 된 농업 문제의 해결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정부는 더 이상 지지부진한 제도 개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새로운 전략을 취하게 되니, 바로 신기술 체계의 도입을 통한 생산력 증대의 도모였다. 보통 ‘녹색 혁명’이라 부르는 신농업 전략으로의 전환이다.

    ‘녹색 혁명’은 미국의 지원 아래 인도와 같은 제3세계의 나라들이 곡물 생산의 증대를 목표로 새로운 농업 기술을 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기술 체계는 주로 밀과 쌀을 대상으로 하는 다수확 품종, 화학 비료와 살충제의 대량 사용, 광범위한 관개 시설 이용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기술의 개발은 미국이 2차 대전 직후 제3세계 국가에 대해 잉여 농산물을 무상으로 원조해주는 방침을 기술과 자금 지원을 통한 농업 개발을 지원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미국 정부는 자국의 다국적 기업의 확장을 돕기 위해 새로운 투자 시장을 찾고 판매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미국 자본의 인도 시장 진출과 인도의 사회 불안 요소 제거 및 자본주의의 확충을 꾀하는 제3세계 지배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1965-66년에 걸친 인도의 한발과 식량 부족으로 인한 기근 사태는 결국 인도 정부로 하여금 미국의 요청을 수용하게 만들었다. 결국 인도의 녹색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이자 ‘밖으로부터의 혁명’이었던 셈이다.

    녹색혁명을 실시하기로 한 인디라 간디의 회의당 정부는 멕시코와 필리핀에서 개발된 많은 품종의 종자를 보급시키고, 이와 동시에 화학 비료와 관개 시설을 대규모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67년부터 1968년까지 년 간 농업 생산은 26%로 급상승했고, 국민 소득은 9%로 상승했다. 이로써 인도는 연간 2%를 넘는 인구 증가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식량 자급자족의 목표 달성에 바짝 다가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 녹색혁명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외적으로 단기적인 성장이 있었을 뿐 꾸준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농업 생산량은 1970년에 1억 톤을 기록한 이래 한 번도 그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기에는 우선 인도의 농업이 여전히 불안정한 몬순 비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나아가 그 효과는 농민에게 관개 시설이 갖추어졌는지 혹은 고수확 품종을 재배하는 기술을 갖추었는지에 따라 결정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지역에 따라 그 정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농업의 구조가 어떻게 서 있는지, 행정이나 금융의 제도가 얼마나 잘 받쳐주었는지 등에 따라 달리 나왔다. 그래서 지역에 따른 편차는 물론이고, 개인에 따른 편차가 매우 크게 달라졌다.

    결국 녹색혁명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효과를 볼 수밖에 없었다. 밀의 경우 새로운 종자를 관개 시설을 갖춘 규모가 큰 농장에서는 쌀에 비해 훨씬 많은 생산의 증가를 보였지만, 새 품종 쌀은 인도의 토지에 적당하지 않아 대체로 작은 규모의 농지에서만 경작되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밀 재배를 주로 하는 뻔잡 지역은 녹색혁명을 성공리에 완수하여 이후 대규모 밀 곡창 지대로 성공하였지만, 벼 농사를 주로 하는 벵갈과 중부 지역 등은 관개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성공은커녕, 도리어 농업이 크게 후퇴하였다.

    그래서 녹색혁명은 국가 차원에서 볼 때 전체 생산량의 증가는 가져 왔지만, 그 안에서 지역별 편차가 심해졌고, 각 지역마다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하는 부농과 소농 및 농업 노동자 사이의 빈부 격차가 더욱 심화되었다.

    ‘녹색혁명’은 토지개혁과 함께 독립 후 인도 정부가 취한 가장 중요한 2대 농업 정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관되게 농업의 자본주의적 재편성을 향하는 것이었다. 녹색혁명은 토지개혁이 이룬 두 가지의 주요 결과 즉 식민 시기의 지주를 농업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농으로 전환시키고, 소작농을 대부분 농업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것 위에 기초하여 진행되었다.

    녹색혁명의 효과가 큰 지역에서는 부농과 중농의 생산 투자가 증가되고, 그 결과 그들이 고수익 계층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그들 부농과 중농의 기반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로 인해 농민층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국가 차원의 생산량이 늘어나지만 빈부 격차가 심해진다면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는 비단 농업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수출량이 늘면서 국내총생산이 증가하는데,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면서 극단적 사회 현상이 늘어나는 것을 국가 경쟁력 강화라고 하고,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 도시 서민에게 사회 안전망을 만들어주는 것을 사회 비용의 과도한 지출로 인한 국가 경쟁력의 약화라고 하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념을 버리고 공감으로 하는 정치, 과연 그것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이 바뀌면 진보 운동 방식도 바뀌어야 하는데,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알 수 없어 답답할 뿐이다.

     

    필자소개
    이광수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