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전명 '봄날은 간다'-1
    [아빠의 현대사46]2002년 발전노조의 38일 파업투쟁 시작
        2013년 01월 07일 10: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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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가요 “봄날은 간다” 전문)

    명동성당에 그렇게 힘들여 들어갔지만 언제까지 피신만 할 수는 없었다. 어느 땐가는 정리를 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야 했다. 그해 8월 단병호 위원장, 이홍우 사무총장, 양경규 위원장, 그리고 공무원노조를 준비중이던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차봉천 위원장 등은 경찰청에 자진 출두한다.

    1999년 서울지하철 석치순 위원장이 명동성당에서 스스로 경찰 손에 넘어갈 때도 그렇지만 함께 싸우던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마음은 항상 아프다. 단병호 위원장은 형집행정지 취소로 감옥으로 보내지고, 양경규 위원장도 대한항공 파업 등과 관련 구속된다. 이후에는 사업장인 서울상공회의소에서도 해고된다.

    민영화인가 사유화인가?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있다.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출신으로 3번에 걸쳐 대통령에 출마도 했었고, 국회의원도 했던 권영길 위원장이 즐겨 부르는 노래다. 내게는 2002년 발전노조가 진행한 38일 동안의 파업투쟁을 준비했던 작전 이름으로 기억된다.

    누군들 봄날이 가는 것을 좋아하겠냐마는 특히 내가 ‘봄날이 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다. 2002년 초부터 38일 동안 진행된 발전노조의 파업은 전력산업의 민영화를 막기 위한 투쟁이었다.

    파업을 선언하는 명동성당의 당시 지도부

    민영화란 국가가 경영하던 국영기업체 또는 공법인(公法人)의 경영을 민간기업에 파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privatization이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국민의 소유가 아니므로 ‘민영화(民營化)’가 아니라 ‘사유화’(私有化)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언어로 국민을 기만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사유화’라고 쓰고 싶다.

    IMF를 핑계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일삼아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담시키던 김대중 정부는 주요 기간산업에 대해서 사유화를 시도했다. ‘가스산업 구조개편법’과 ‘철도산업 구조개혁법’ 등을 입법화하여 민간부문에 팔아치우고자 했다. 전력은 워낙 덩어리가 크니까 4개 발전회사를 별도로 만들어 사유화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싸울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밖에 없었다.

    전국철도노조, 가스공사노조, 한국발전산업노조, 지역난방공사노조, 한국전력기술노조,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노조 등 6개 노조는 2001년 10월 31일 [국가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라는 긴 이름의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이어 11월 25일 청량리역에서 1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정부에 대해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방침 즉각 철회, 공공부문 인력감축 중단 및 인력 충원, 노동조건 개선, 국가기간산업의 합리적 운영을 위한 합의기구 설치 등”을 요구하고, 김대중 정부가 사유화를 강행하려 할 경우 총파업으로 싸울 것을 결의한다. 사유화에 맞선 투쟁이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발전소에 대해 2002년 상반기 중에 하나를 매각하고, 하반기에 하나를 추가로 매각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발전노조가 가진 위기감이 더 컸다.

    투쟁 준비

    발전산업노조가 공공연맹에 가입한 것은 2001년 8월 14일이다. 그해 3월 주주총회는 사유화를 위해 한국전력공사에서 발전부분을 네개의 발전회사로 분할하는 것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한국노총의 전력노조에서 분리된 신생노조는 투표를 통해 민주노총을 선택한 것이다. 그 즈음 나는 다시 조직쟁의실장을 하고 있었다. 연맹과 발전노조는 비공개로 전술팀을 구성한다. 이 팀은 ‘봄날은 간다’라는 이름으로 파업을 준비하고, 역할 분담을 한다.

    공공부문의 파업의 경우 직권중재 등 법적 장애가 많아 대부분 불법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대학교 등 경찰투입이 어려운 곳을 선택해야 했다. 게다가 2002년에 3사 공동파업을 할 때만 해도 철도노조와 가스노조는 한국노총 산하였다.

    우리 연맹은 철도노조와 가스공사노조에도 수년에 걸친 노력을 하고 있었다. 먼저 규모가 크고 한국노총의 골간이라 할 수 있는 철도노조의 민주화 추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합원이 대의원을 뽑고, 그 대의원이 위원장을 뽑는 3중 간선제를 바꿔야 했다. 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게 되었듯이 위원장을 조합원의 손으로 뽑는 것이 중요했다.

    마침내 조합원 직선제가 쟁취된 이후 연맹은 철도노조 민주화를 위해 사업장 당 10만원 이상의 모금운동을 통해 이를 지원하고, ‘철도노조 선거 공정 감시단’을 공동으로 조직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철도노조는 민주화에 성공한다.

    2001년 5월에 처음으로 진행된 직선 투표에서 김재길 후보가 62.7% 지지로 당선된 것이다. 가스공사에도 박정규 동지 등 서울지하철 해고자들이 결합했다. 이런 준비과정을 거쳐 투쟁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연맹은 발전노조는 물론 철도와 가스 노조에도 사람을 파견하거나 대학교 진입 등에 대비해 별도로 전술을 만들었다.

    핸드폰이 문제다

    보통 이런 파업을 하게 되면서 핸드폰을 별도로 만들었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핸드폰에 대한 도청은 경찰등 관계기관에서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특히 대규모 사업장의 파업을 앞두곤 더 했다. 핸드폰은 연맹 조직실간 통화용, 해당 노조와 통화용, 지도부와 통화용 등 모두 별도로 관리했다. 그 범위를 넘는 통화는 제한했다.

    따라서 어떤 때는 핸드폰을 4~5개를 가지고 다녀야 하기도 했다. 철저하게 그 용도로만 통화해야 하는 데 간혹 어떤 사람이 잘못해서 비선전화기로 일반적인 통화를 한 경우 수십개의 핸드폰을 모두 폐기하고 다시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이를 ‘감염되었다’라고 표현했다.

    발전노조 투쟁과 관련해서는 TRS(주파수공용통신)라는 핸드폰처럼 통화도 되는 무전기를 특별히 구입하기도 했다. 긴급한 연락이 많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매번 해 본 일이지만 단위노조와 연맹이 함께하는 사업은 어려움이 많았다. 99년 서울지하철 파업 때도 그랬었다. 서로 혼돈을 피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처음으로 연맹을 경험하는 대공장과의 사업은 힘들었다. 파업 현장에 연맹 조직담당자들을 같이 배치하여 판단을 공유하고, 심지어 나는 명동성당 천막에서 같이 잠을 자면서 상황을 종합 판단하는 조치를 했었다.

    그렇지만 막상 복귀명령을 내릴 때는 연맹도 모르게 해서 당시 서울지하철노조 사무국장이었던 임성규형과 멱살잡이까지 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특히 대학교에 진입한 경우 경찰이 투입될지 여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다. 아무리 오랜 기간 노조를 했더라도 전체 투쟁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 분야에 있어선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서울지하철이 서울대에 머물던 때에도 경찰이 조금 강하게 위협을 가했을 뿐인데 경찰이 투입된다고 잘못 판단하여 야간에 관악산을 넘어 도망가다가 다리가 부러진 조합원도 있었다. 우리는 ‘위협’이라고 얘기했지만 현장 지도부는 우리를 믿지 않았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야 했다.

    다행히 당시 연맹에는 숱한 투쟁의 경험을 한 조직실 멤버들이 있었다. 철도노조 해고자였던 남진우, 김명환은 물론 이상훈, 정용재 등 공공부문 파업투쟁을 진행해 본 경험자가 많았다. 각자 역할에 따라 누구는 발전노조와 가스공사노조와 함께 서울대로, 또 누구는 철도노조와 함께 건국대로 진입을 안내하고 투쟁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빨간 모자다

    민주노총은 2002년 2월 24일 여의도에서 조합원 3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전국노동자대회를 연다. 주된 요구는‘노동법 개악 저지, 주5일 근무제 도입,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저지, 단병호 위원장 석방’이었다.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국노동자대회가 끝나가는 4시 무렵부터 철도노동자와 발전노동자들은 움직였다. 행진물결을 뒤로 하고 ‘빨간 모자’를 뒤따랐다.
    “어디로 가는 걸까?”
    “파업선언 대기를 위한 집결지!”
    그것밖에 모른 채 지하철을 탔다. 다들 빨간 모자만 바라봤다. 혹시 낙오하지 않을까. 오후 5시 무렵 낙성대역에 내렸다. ‘서울대였구나!’ 학생들이 도로 양쪽을 막아 차량을 통제했다.“
    ([가자! 총파업 투쟁으로-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발전소매각 저지투쟁 백서] 65쪽)

    빨간 모자를 쓴 채 대오를 안내했던 사람들은 당시 투쟁 중이던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이었다. 대학교 진입투쟁은 과거 전국노동자대회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에 하나 사전에 정보가 노출되어 소수의 경찰이라도 검문을 하게 되면 조합원들은 쭈뼛거리고 감히 들어갈 엄두를 못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해서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고, 만약에 대비하여 화염병 등 물리력도 준비해 두어야 했다.

    서울대 노천극장에 집결한 공공 노동자들

    다행히 큰 마찰없이 조합원들은 서울대학교에 무사히 들어갔고, 비슷한 시간 지도부는 명동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발전노조 전체 5,600여 조합원 중에서 밤 10시경 4,700여명이 모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것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결속력이었다.

    한 조합원은 이렇게 말한다. “발전소 정문을 바리케이드 막아 정문을 아예 폐쇄했어요. 특공대를 조직해서 한쪽으로 경찰과 간부들을 유인한 다음에 담을 넘어서 나왔어요.” 그렇게 조합원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가스공사 조합원 1,900여명도 같이 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는 3개 사업장의 조합원 1만4천950명이 명동성당, 서울대, 건국대, 부산대, 충남대, 순천대, 연주철도운동장 등 7개 거점에서 파업전야제를 가졌다. 특히 사회보험노조는 전국에서 5천여명이 상경하여 집회를 마친 후 마포의 건강보험공단에서 1천여명이 비상대기하고 있기도 했다.

    이 날 저녁 명동성당 근처 호텔에서 방용석 노동부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던 막판 교섭은 “민영화 철회는 교섭대상이 아니다”라는 정부의 입장 고집으로 인해 결렬되고 만다.

    방용석 노동부장관은 70년대말 80년대 초 원풍모방이라는 민주노조의 전통이 된 노조 지부장 출신이었다. 한 때는 같이 싸웠던 노동운동의 선배가 이제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방침만을 강변하는 처지로 만나게 된 셈’이었다. 방용석 노동부장관은 뒷날 사태 해결은 고사하고 호소문이라는 것을 통해 ‘노동운동의 선배’를 운운하며 복귀를 종용하여 욕을 먹기도 한다.

    교섭이 결렬됨에 따라 다음날인 2월 25일 오후 4시 철도, 발전, 가스노조의 공동파업선언문이 낭독됨으로서 역사적인 파업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철도노조 15명, 발전산업노조 12명, 가스노조 10명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것으로 답한다. 그 후 가스공사노조는 파업 선언 후 8시간만인 낮 12시 단협 잠정합의와 노정합의문을 채택하고 파업을 종료한다. 타결내용에 대해 조합원들이 반발해서 결국 노조 집행부는 책임지고 사퇴한다. 철도노조도 한국노총에 교섭을 위임하여 27일 오전에 합의한다. 결국 민주노총만 남게 된다. 뒤의 얘기지만 두 노조는 이 투쟁이후에 공공연맹과 같이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안개처럼 사라진다. 산개투쟁

    민주노총은 26일 103개 사업장 13만여명이 참가한 연대 총파업을 진행한다. 특히 금속금속산업연맹은 “발전, 철도 ‘민영화 저지 투쟁‘을 적극 지지하며, 연대 총파업으로 엄호한다”는 성명서와 함께 금속노조를 비롯해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현대미포조선, 모비스, 아폴로 산업, 한라공조 노조 등이 참여한 가운데 오후 1시부터 4시간 경고 파업에 돌입하기도 했다.

    누구도 발전노조의 파업이 그토록 장기적으로 진행될 것이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투쟁을 시작하면서 길어야 “일주일이면 정부가 손들 것”이라는 노조의 이야기를 믿었었다. 전기의 특성상 전력공급이 중단된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파국을 몰고 오기 때문이었다. 한번 생각해 봐라. 전기가 끊기면 국민들의 불편은 물론 공장과 심지어 주식시장도 마비된다. 그러나 계절적으로 전기를 상대적으로 덜 쓰는 봄이 오고 있었다.

    서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발전노조 조합원들의 집회

    게다가 우리 조합원들이 착해도 너무 착했다. “파업 전에 비상상황에서 대처하는 비상매뉴얼도, 응급조치 요령도 다 가르쳐 줬어요.”라고 국내외의 스카우트 대상이 될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조합원이 투쟁이후에 고백했다.

    이런 경우는 매우 많다. 노동자들은 회사를, 나라를 지나치게 생각하고, 우려한다. 돈이 안되면 매몰차게 공장을 팔아버리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자본가들과 다른 점이다. 전기가 차질없이 공급되는 가운데 투쟁은 길어져 갔다.

    연맹의 대부분은 서울대학교와 명동성당 등 현장에 배치되었다. 나는 연맹 사무실에서 주로 상황을 종합했다. 38일 동안 집에 들른 것은 이삼일 정도였으니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네 동생 은수를 혼자 돌봐야 했던 것은 여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투쟁에 들어간 첫날 새벽부터 서울대에 들어간 현장 지도부와 마찰이 생겼다. 원래 계획은 ‘경찰이 침탈하면 소극적으로 저항하다가 제2거점으로 이동하여 다시 모인다.’는 것이었지만 현장에 있던 지도부는 ‘경찰이 들어오면 학생회 건물 등을 점거하고 전원연행을 불사한 투쟁을 하는 것이 맞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새벽 4시경 비선통화를 통해 의견을 조정하고자 했지만 잘 안되었다.

    특히 명동성당에 있는 이호동 위원장 등의 지도부, 서울대에 있는 현장 투쟁가들과 3자 의견조율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투쟁 내내 반복된 문제이기도 했다. 결국 조합원들의 분임토론에 따라 선택한 전술이 ‘산개투쟁’이라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우리 생각에는 3일 동안 서울대에서 춥고, 배고프고 해서 산개가 좋았거든요. 조합원의 대부분은 산개를 원했어요.”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어요.”

    “우리 조합원의 정서로는 ‘이길 수 있다. 회사로 안 들어가면 발전소가 막 트립(TRIP, 전기가 차단되는 것) 될 꺼다.’ 막 그럴 줄 알았거든요”

    일주일 정도 복귀하지 않으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도 있었다. 굳이 연행되고 풀려 나와 다시 집결 투쟁할 필요도 없고, 옥쇄투쟁으로 장렬하게 산화하지 않아도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이런 조합원의 정서를 반영하여 명동성당에 있던 발전노조 이호동 위원장은 ‘파업에 참가한 자랑스런 발전노동자들과 위원장과의 약속’이라는 형식을 통해 “위원장의 명령 없이는 절대로 복귀하지 않는다.”라는 등 5개항을 약속하고, 서울대에서 파업투쟁 농성 중이던 5천여 조합원들에게 산개 투쟁지침을 내린다. 당시 연맹 홈페이지에는 “공공연맹이 투쟁을 하기 싫고, 자신이 없으니까 조합원을 산개시켰다.”라는 비난성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만큼 처음 해보는 투쟁 전술이었다. <봄날은 간다-2 계속>

    필자소개
    이근원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을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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