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 잘 가라.
    세상의 모진 꿈만 꾸다 가는 그대.
    [봄비의 마음치유 이야기 14] 다시 못 보는 그 깊은 눈망울
        2012년 12월 28일 03: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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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진중공업 고 최강서 열사는 봄비의 마음치유 과정에 함께 했던 동지입니다.  좀 힘들고 그래서 마음치유 과정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최강서 동지의 말이 봄비에게는 계속 자책으로 남는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내면서도 마음이 무겁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 떠나지 않도록 마음을 나누는 것, 함께 싸워나가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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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다.

    그를 보내는 마음이 아프다.

    젊고 푸르른 사람, 강단 있고 든든했던 사람.

    훤칠한 키, 서글서글한 눈매, 위트 넘치는 발언, 솔직하고 담백했던 순간순간들.

    한진 사랑방 3기, 첫 만남 때 그를 만났다.

    뜨악한 표정으로 뭐하는 곳인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던 그.

    첫 만남, 자신의 소중한 무엇이라고 여기며 배게뺏기를 할 때

    “난 악착같이 뭘 하고 싶지 않다”며 심드렁하게 반응하던 그.

    그에게 다가가 내가 말했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짝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 ‘이게 뭔가’ 싶어도 짝지를 위해서 같이 해주면 좋겠는데 ~”

    그러자 슬슬 몸을 움직였던 그. 그리고 상대를 위해 몰입해서 힘을 써주던 그.

    급한 성격과 두려움을 버리고 싶다던 그,

    느긋한 마음과 여유, 행운이 자신에게 있었으면 한다고 말하던 그였다.

    가끔 피곤한 얼굴로 지친 듯 보여 “힘드냐?”고 물으면 “‘아니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 씩 웃어주던 사람.

    바다 앞에 서면 ‘저 바다를 이기고 싶고’ 산에 오르면 ‘뭔가를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고 자신의 의지를 다독이던 사람이었다.

    가족의 달이라는 5월이 지금은 제일 싫다고, 한진에서 해고되고 나니 가족들이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게 속상하고 내가 미안해야 하는데 날 미안하게 쳐다보는 게 아프다던 사람.

    젊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인데, 용돈를 줘도 자신이 어른들께 드려야 하는 나이인데, 예전엔 그렇게 드리면 “고맙네.” 하고 받으시던 어른들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오히려 자신을 챙겨주는 게 너무나 싫다고 힘들어 하던 속 정 깊은 사람이었다.

    한진 투쟁을 할 때 가족 누구도 “왜 하느냐고, 그만 하라고”하는 사람이 없는 자기는 행복한 놈이라고, 하나님 같고 부처님 같은 엄마를 둔 자기는 진짜 행복한 놈이라고.

    다른 사람이 꾀면 절대 안 넘어가지만 엄마가 한마디 하면 그냥 쑥 젖어서 다 받아들이게 된다며 엄마 이야길 할 때 소년처럼 얼굴이 발그레해지던 그.

    엄마가 건강하기만 하시면 자신은 고민 없다고, 다 이길 수 있노라고, 그 마음에 하늘처럼 엄마를 품고 살던 그였다.

    마음치유 과정이 끝날 때 개근 선물을 받는 최강서 열사

    27일 열린 ‘노동탄압 분쇄! 정리해고 철폐! 손배가압류 철회! 악질한진중자본 규탄! 최강서열사 정신계승 민주노총 영남권 결의대회’(사진=노동과세계)

    첫 눈에 반해 젊은 나이에 결혼해 다람쥐 같은 두 아들을 둔 그, 어린이날 모처럼 아이들이 원하는 장난감을 사주었노라고 사진을 찍어와 보여주며 자랑하던 꼭 아이 같던 그.

    아이들과 주말에 놀러나갔는데 아이들에게 짜증을 많이 냈다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못하게 자꾸 막는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고 속상해하더니 지금 심정이 어떠냐는 말에 “더 잘해줄게 ~”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주던 그.

    부모님에게는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될거예요.” 이야기 하고 싶다던 그.

    아내에게는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해주고 싶다던 그.

    집 밖 사람들에게는 잘해주면서 제일 잘해줘야 할 아내에게 곧잘 짜증을 내게 된다고 미안해하고 아쉬워하던 사람이었다.

    힘든 과정을 아내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고, 아내는 자신보다 그릇이 더 큰 사람이라고 은근히 자랑하던 사람.

    지금껏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아내가 있어 살아낼 수 있다던 사람.

    마음은 한가득 미안하고 고마운데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라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모르는 나쁜 남자라고 말하던 사람.

    우리가 옆에서 전화해보라고 부추키자 쑥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걸어서는 “고마워, 사랑해~” 이야기하고 혼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사람. 아내와 둘이 주고받는 술자리가 참 고맙고 편안하다고 이야기하며 눈가가 촉촉해지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과정에서 사진작업을 하는데 기저귀를 찬 어린아이가 힘겹게 큰 차를 밀고 있는 사진을 골라, “이 아이가 나 같아 보이고 내 아이 같아 보이기도 하네. 우리 아이들이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한진이 이렇게 되고 나니 기운 빠지고, 난 지금 아무 것도 없이 밀고만 있는 것 같아. 여력은 안 되고 힘은 빠지고 밀리고 있는 느낌이 들어.” 라며 약해진 마음을 내보이던 사람.

    “노동조합 하는 사람들, 참 힘겹게 살아왔던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 양심이라는 거, 이 자리를 지켜주는 이 사람들을 보며 나는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끝까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잘 될 거라는 생각을 갖고 끝까지 버텨주었으면 좋겠어. 그 끝자리에 내가 있을 거야. 끝없이 다시 시작하는 거고 일단 결정했으니까 지키는 거고, 잘 될 거야. 무조건 잘 될 거야. 안 되는 건 없어.”

    텐트농성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 과정에서 그는 나이가 훨씬 많은 형님들을 다독이며 용기를 주었었다. 양심을 지키고 있으니까 미래가 있을 거라는 말을 힘차게 내뱉으면서.

    치유과정 처음엔 서먹서먹해 하던 그가 한 주 한 주 지나며 과정 안에 가장 빨리 깊숙이 쑥 들어왔었고 동지들은 그에게 ‘마치 누가 투입시켜 논 사람처럼 잘 논다.’ 고 자연스러운 그의 모습을 흥겹게 바라봤었다.

    진짜 사내라고, 강직한 거 같으면서도 유연하고 유머도 있는 사람이라고 새삼 그에게서 다양한 모습을 발견한 선배들이 그를 칭찬하자 “요즘 씻으러 들어가서 거울로 내 얼굴을 보면 화가 차있던 내 모습이 조금 변한 걸 느껴. 이왕 생긴 주름이라면 웃는 주름을 만들자는 생각도 들고. 사람들 눈도 못 맞추고 손잡는 것도 싫고 부끄럽고 거리감 많았는데 지금은 고마운 마음이 들어. 눈 마주칠 수 있게 되었고 뒤로 안 물러설 자신이 있고, 물러 설 때가 없으니까 앞으로 나갈 거야. 예전엔 화나고 짜증나는 걸 많이 표현했다면 이제는 미안하고 고마운 걸 더 많이 표현하게 돼.”라고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해 주던 그였다.

    매번 과정이 끝날 때 우리는 서로 자기 약속을 했었다.

    그는 항상 ‘화도 덜 내고 욕도 덜 하고 고마움을 표현하겠다.’는 약속을 하곤 했다.

    내 약속은 항상 ‘그가 자신의 약속을 잘 지키는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그에게 전화를 걸겠다.’였다. 일주일을 보내고 돌아와 어떻게 지냈는지 약속은 잘 지켰는지 서로 확인을 할 때 “화 덜 냈다고, 아내에게 욱 하고는 곧 뒤돌아서서 미안해했다.”고 자랑하면서 “근데 봄비는 전화 두 번 하기로 하고 한번 밖에 하지 않았어. 주말에 전화한다고 해서 내내 기다렸는데 전화 걸지 않았어. 혼내야 해.”라고 날 따끔하게 야단치던 그였다.

    과정이 너무 일찍 끝난다고 더 만나고 싶다고, 우리가 매 주 만났던 월요일이 그리울 거라고 말했었는데. 복직 판결이 나고 ‘복직했다.’는 그의 문자가 아직 내 핸드폰에 남아있는데 그는 없다.

    단정한 표정으로 세상을 쳐다보던 젊디젊은 그의 영정사진.

    그 깊은 눈망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슬프고 아프다.

    ‘세상의 모진 꿈만 꾸다 가는 그대,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 어이 큰 눈물을 땅에 뿌리고
    그대, 잘 가라. 그대 잘 가라’

    절망과 슬픔, 그 막막함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혼자 고민하고 결정했을 시간들, 그 두려움을 알아채지 못했다.

    같이 살자고, 같이 나누자고, 같이 행복하자고 약속했던 것들 지키지 못했다.

     

    필자소개
    홀트아동복지회 노조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아리랑풀이연구소 그룹 상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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