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 김남주의 '종과 주인'
관념의 변증법에서 투쟁의 변증법으로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5류 시가 아름다운 이유
    2012년 12월 03일 03:57 오후

Print Friendly

*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000여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이다. 87년 창립된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다.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는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월요일에 게재한다. 이 칼럼은 민교협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올라간다.<편집자>
——————————————————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민중민족해방 투쟁의 전사로 청년기를 보낸 다음 15년형을 선고받고 9년의 감옥 생활을 하고 난 후 자유인으로서는 5년여의 짧은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김남주.

감옥 안에서 칫솔 끝을 뾰족하게 밀어 만든 철필로 은박지에 시를 써서 세상 밖으로 내보내던 김남주.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시를 쓰는 전사였다. 그의 시 중에 <종과 주인>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다음은 그 시의 전문이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이런 섬뜩한 시를 내가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에 들이미는 것은 80년대의 한국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던 이런 종류의 저항시나 노동시를 요즘 좀체 볼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저항시는 노동자나 농민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던 과거의 문학에 불과하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현재 농민과 도시빈민을 포함한 노동계급 전반에 대한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은 근본적으로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자본의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은 더욱 더 정교해지고 자본에 저항해야 할 진보진영은 분화가 지나쳐 분열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정도이다.

진보진영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계급중심성이 우선 회복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종과 주인’이 자본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을 압축하여 혁명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해방투쟁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서양 철학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이 이 시의 제목 ‘종과 주인’을 본다면 얼른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있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떠올릴 것이다. 물론 이 시의 종과 주인이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투쟁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전주교도소 정문 앞(1988) (사진= 김남주 기념사업회)

김남주가 이 시를 쓰면서 헤겔과 마르크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이 시가 실린 그의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에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각주’라는 시가 ‘종과 주인’ 바로 다음에 실려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김남주는 ‘각주’에서 헤겔은 게르만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다고 하였고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만인이 자유롭다고 하였지만 이 두 철학자 모두 식민지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종과 주인’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에 대한 김남주식 비판이며 이 두 철학에 대한 변증법적 지양이다.

서양의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헤겔의 대표적인 저서인 <정신현상학>은 의식이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쳐 절대 지식에 이르는가를 밝히고 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온다. 자아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 스스로의 자신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신 역시 인식하여야 한다. 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인정됨을 뜻한다. 그러나 개별 인간은 자신의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존재임을 주장하기 위해서 타인을 부정하려 한다. 이런 각 개인은 자기를 주장하고 타인을 부정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게 된다고 헤겔은 설명한다.

이러한 투쟁을 헤겔은 인정 투쟁이라고 한다. 이 인정 투쟁에서 승리하는 자는 주인이 되고 패배하는 자는 노예가 된다. 목숨을 걸고 투쟁하여 승리를 쟁취한 주인은 노예로부터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으면서 노예의 노동으로부터 삶의 수단을 확보한다. 노예는 투쟁의 승자에게 주인임을 인정해주고 목숨을 부지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주인으로 하여금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은 노예의 인정이다. 노예가 주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주인이 되지 않는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예는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노동을 하기도 한다. 노예의 노동은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존립시킬 수단을 확보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 노동은 인정 투쟁에서의 승리자인 주인과 패배자인 노예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노예는 노동을 함으로써 독립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은 생존을 위하여 노예의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삶의 수단을 노예에게 의존하게 된다. 이때 노예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주인은 노예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된다. 주인은 직접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토대가 되는 물질적 자연세계를 알지 못한다. 주인과 노예의 투쟁관계를 인정이라는 관념의 세계에서 물질적 삶이라는 유물론적 세계로 바꾸어 이해할 때 헤겔의 관념철학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변한다.

김남주가 자주 언급했던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유물론적 변증법에서는 육체적 노동을 하는 노예가 관념적 인정을 추구하는 주인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셈이 된다. 김남주의 시에서 종은 주인을 위하여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도구인 낫으로 주인의 목을 베어버린다.

김남주가 이 시에서 제시하는 종과 주인의 관계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리고 이의 역전으로서의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이 둘의 변증법적 관계를 넘어서고 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와는 달리 김남주 시의 종은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종과 주인’에서 종은 낫을 쓰고 있기 때문에 주인을 위하여 일을 한다고 볼 수는 있지만 글자를 모른다고 깔보는 주인의 목을 베어버린다는 것은 주인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종이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헤겔 철학에 있는 인정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실상의 목숨을 건 투쟁, 즉 주인의 목을 베어 주인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이루어진다. 주인이 없어지면 종은 종의 신분 자체가 없어지기에 종으로서의 자기 인식은 불가능하게 되지만 그 불가능성 자체로 인하여 종은 독립된 인간의 지위를 확보한다.

김남주의 이 시는 또한 마르크스의 명제인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의 내용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넘어선다.

‘종과 주인’에서 노동을 하는 종은 관념적 억압자인 주인을 아예 없애버림으로써 계급 자체를 없애버리고 있다. 이 말은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역사적 유물론의 지향점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역사의 최종 목적지는 모든 계급이 소멸된 평등사회이기 때문이다.

네 줄에 불과한 짧은 분량으로 서양 관념 철학의 핵심을 아우르고 이를 계급투쟁으로 전환시키면서 역사의 종착점을 열어 보여주는 김남주의 ‘종과 주인’은 사상의 역사로 볼 때는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이 시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그 언어의 단순함과 명쾌함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

이 시의 내용은 간단하게 ‘어떤 종이 자신의 무식함을 깔보는 주인에게 화가 나서 그를 죽여 버렸다’라는 말을 통해 ‘어떤 놈이든 신분이 낮다고 깔보는 놈이 있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는 대개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사랑의 기쁨을 찬양하는 내용도 없고 예술로서의 시가 지향하는 세련된 언어도 없다. 시인 송경동은 고공 농성중인 조선소 노동자들, 삶의 터전을 빼앗겨 투쟁의 나날을 이어가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때문에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없는 자신을 5류 시인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없는 김남주의 시가, 그리고 송경동의 시가, 5류 시라면, 나는 모든 1류 시를 팽개치고 5류 시를 찾아 읽겠다. ‘종과 주인’이 실린 김남주의 시집의 제목 ‘나의 칼 나의 피’가 말해주듯 김남주의 시가 칼이고 피라면 내가 하는 말 내가 쓰는 글도 칼이 되고 피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필자소개
민교협 회원, 중앙대 영문화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