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벵갈, 공산당 34년간 통치 (1)
[현대 인도 인민의 역사] 그들의 집권이 바꿔놓은 것들
    2012년 12월 03일 12: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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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벵갈은 인도아대륙의 동북부에 위치하면서 갠지스 강 하류를 통해 벵갈해와 닿는 곳이다. 갠지스강 하류에 삼각주가 발달하여 예로부터 쌀과 황마 생산이 많은 인도의 대표적 곡창 지대이면서 브라흐마뿌뜨라 강이 또 이곳에서 만나 물이 풍부하고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처음 인도를 침략한 것도 이곳이기 때문에 초기 수탈이 심하게 이루어져 농촌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심하게 황폐해졌다. 영국의 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여 소위 벵갈 르네상스라 불리우는 근대화가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다. 중산층과 지식인의 층이 두터운 곳이면서 가난한 농민이 매우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인도가 독립했을 당시 공업화가 두 번째로 많이 된 곳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주의 수탈이 가장 극심한 대표적인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벵갈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1977년 총선에서 공산당(M)이 주의회 선거에서 전체 294석에서 178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면서 처음으로 공산당 정부를 세웠고 그 이후 2011년까지 34년 동안 5번을 연달아 집권하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도에서는 께랄라 다음으로 공산당 정부를 세웠지만 께랄라와는 달리 30년이 넘는 동안 끊임없이 집권을 하였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인민들이 그들로 하여금 근본적인 사회 경제의 구조 개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집권 후 34년 뒤에 모래성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버린다. 무엇 때문일까?

서벵갈에서 공산당이 집권한 1977년은 인도 현대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해다. 1975년 총선에서 인디라 간디 수상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부정 선거 문제가 불거지자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독재 체제로 돌입하였다. 모든 언론을 통제하고 정치인을 구속하는 등 독재를 하다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2년 뒤인 1977년 총선을 다시 실시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 야당인 국민당(Janata Party)는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해 일약 집권 여당의 위치에 오르고 인도공산당(M)은 서벵갈에서 22석을 차지해 독립 후 처음으로 야당이 회의당을 누르고 집권당이 되는 것에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분당이 되어버린 과거의 동지 인도공산당은 독재를 하는 여당인 회의당 편에 섰고, 서벵갈 정부를 장악하게 되는 인도공산당(M)은 공산당 계열이 아닌 야당들을 연합하여 새로 만든 국민당과 함께 연합 전선을 구축해 집권당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분당이 되면 애초의 적보다 정치적 거리가 더 멀어지는 것은 이곳에서나 우리가 사는 곳에서나 다 마찬가지의 일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이합집산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이합집산을 굳이 추악함이라든가 특정 개인의 출세 야욕과 연계시켜 생각하는 것은 정치 혐오증을 부추기는 세력에게 투항하는 것이다.

썩을 대로 썩은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가 부르는 단심가(丹心歌)를 국민 시조로 추앙하면서, 새 나라, 새 세계를 세우려는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를 추잡한 정치 술수로 폄하한 것은 박정희 유신 정권의 교육이었음은 명심해야 한다.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분열 후 어떤 명분으로 다시 통합하고, 그 후 또 다시 어떻게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면서 인민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가를 전략적으로 고민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사실, 1977년 인도공산당(M)이 주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것은 인디라 간디 정권의 독재와 더불어 이 시기에 서벵갈 주에서 극심한 농민 수탈이 일어난 것과 관련이 깊다.

1967년 서벵갈의 북부, 네팔 산악 지역과 인접한 낙살바리(Naxalbari)라는 곳에서 지주들의 수탈을 못 이긴 농민들이 ‘토지를 경작자에게로’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3년 뒤인 1969년에는 마오주의(Maoism)을 내건 일련의 무장 봉기주의자들이 인도공산당(M)을 탈당해 인도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자, 이하 ML)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무장 게릴라 운동을 벌였다.

이 마오주의자들은 그 뒤 분열을 거듭해 일부는 정당 조직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일부는 현재까지 인도의 동부와 동북부 그리고 남부의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해방구를 확보하여 무장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네팔에서 무장 혁명에 성공한 후 의회 선거를 통해 집권당이 된 세력도 넓게 보면 이 마오주의자 반군 계열에 속한다. (낙살바리에서 일어난 마오주의자 반군이라는 뜻으로 흔히 낙살 반군이라 부르는 이 세력에 대해서는 서벵갈에 대한 글이 끝난 후 기술하기로 한다.)

1967년 낙살바리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무장 반군은 서벵갈주에 점차 퍼졌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정부의 경찰에 의해 잔혹하게 짓밟혔다. 농민들은 이를 목격하거나 그 소문을 들은 후 크게 자극을 받았고, 이 사건이 서벵갈 전역의 농민을 공산주의 정당 아래에서 대오각성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다.

1947년 독립 후 서벵갈 주는 무슬림이 대거 빠져 나간 상황에서 종교공동체 갈등도 한 풀 꺾여 있었고, 계급 분포 차원에서 보더라도 벵갈인 소수 지주를 제외하고는 일찍부터 상업화가 된 바람에 비(非)벵갈인 상인들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공업화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비하르를 비롯한 이웃의 주와 방글라데시에서 건너 온 기술 노동자와 전문인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을 뿐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억누를 수 있는 중간 세력의 힘이 매우 약했다는 사실 또한 공산당이 세를 형성하기에 우호적인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인도공산당(M)은 이 억압 받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혁명으로 일으킬 힘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힘이 없어서가 아니고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몰라서 권력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인도공산당(M) 안에서 참혹한 농민의 상태를 두고 치열한 노선 갈등이 터져 나왔다. 마오쩌둥을 따르는 일련의 무리들은 농민 봉기를 통한 계급혁명을 부르짖었고, 이에 반해 주류는 계급간의 연대와 상황의 정치적 활용을 통한 점진적 개량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서벵갈 인도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조띠 바수. 2010년 사망

노선 갈등 끝에 승리는 개량주의에게로 돌아갔다. 승리의 중심에는 집권을 한 1977년 이후 2000년까지 주 수상을 지낸 조띠 바수(Jyoti Basu)라는 이데올로그가 있었다. 조띠 바수는 공산당이 집권하면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의 삶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설득을 집요하게 펼쳐나갔다. 조띠 바수는 자본주의와 봉건 사회라는 대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중앙 정부의 권력이 그렇게 강대한 상황에서는 농민들이 유혈 폭력으로 사회 혁명을 일으킬 수 없음을 설명하면서 개량주의가 유일한 길임을 택하도록 설득하였다. 바수의 노선에 반대한 마오주의자들은 분당 후 지금까지 산 속에 해방구를 확보하면서 게릴라 유혈 혁명을 시도하고 있고, 개량주의자들은 34년 간 집권 여당으로서 통치를 하다가 2011년에 권좌에서 물러났다. 마오주의자의 노선에는 정치란 부르주아의 놀음에 기생하는 것일 뿐이어서 그 자리가 없었고, 개량주의 노선에는 하층 계급과 농촌 및 도시의 빈민이 주체로 설 자리가 없었다.

권력을 잡은 서벵갈의 공산당은 맨 먼저 토지 개혁 문제에 뛰어들었다. 그것은 그곳의 악화된 상황의 뿌리에 농촌 문제가 있었고, 그 농민이 그들의 향후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기 때문이었다. 토지 개혁 문제는 비록 법적 소송 문제가 걸려 있고, 새로운 입법을 한다는 것이 연방제 국가 아래에서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그 권한이 주정부에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서벵갈 의회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 연방 정부가 헌법에 따라 께랄라 공산당 정부를 해산시킨 적이 있어 서벵갈 공산당 정부는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급진적으로 혁명적인 방식은 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벵갈 공산당 정부는 토지 보유 한도를 낮추는 것과 소지주와 대지주를 없애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중소 규모의 자작농의 토지를 급진적으로 몰수하는 것은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많은 농민들의 지지를 상실할 것으로 판단해 시행하지 않기로 했으니 모든 농민이 균등하게 소유하도록 하는 방향의 개혁은 애초부터 계획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기에는 아직은 공산당을 지지하는 하층 농민 조직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공산당이 우선 연착륙을 한 후 오랫동안 기반을 다지고 그 위에서 점진적인 사회 변혁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공산당은 모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지 않은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다만 10에이커 이상 소유한 지주의 토지만 몰수하고 그 토지를 농업 노동자와 소작인 가구 당 1.5 에이커씩 분배하기로 정했다.

이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4.2%만이 10에이커 이상을 소유하였고, 그 결과 공산당 정부는 주 전체 토지의 33.3% 즉 453만 에이커의 땅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 이외 즉 10 에이커 이하를 소유한 지주의 토지는 그 한도액만큼만 보유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들이 내세운 목표는 봉건 지주와 자본가가 보유한 토지는 보상 없이 몰수하고 그것을 무토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그들은 소련이나 중국에서 행한 집단농장 건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정치권력의 밖에 있음을 깨닫고 시행하지 않기로 했다. 보유 한도액을 낮추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작농이나 중농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소작농이나 무토지 임금 농업 노동자와 중소 규모의 자작농과의 계급 연대를 원하는 것이었지 그들 간의 계급 투쟁을 유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전술이 그들의 향후 정치에 우호적으로 작용할지 악영향을 끼칠지 그들은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정치적 기반이 아직 튼튼하지 않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양자를 포괄하는 연대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서벵갈은 이로서 인도에서 유일하게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무상으로 농업 노동자에게 나눠준 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계급 간 연대 전략이 의회 민주주의에서 권력 획득을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회 경제 구조를 개혁하는 것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인도의 서벵갈 주의 경우를 통해서 볼 때 매우 휴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갖는 한계 또한 명백하다. 그 한계가 무엇일까? 계급 투쟁과 계급 연대, 그 사이에서 공산당 혹은 진보 정당 혹은 좌파 인민이 취해야 할 태도는 어떠해야 했을까? 서벵갈 공산당의 집권 34년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진보 정당을 돌이켜 볼 시간이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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