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유의 아름다운 성좌, 점자
    WIPO 독서장애인조약과 저작권
    [정보공유와 지적재산권] 시각장애인에게 읽을 기회를
        2012년 11월 26일 05: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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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부터 정보공유연대 IPleft에서  ‘정보공유와 지적재산권’이라는 제목의 연재를 시작한다. 지금 지적재산권은 무역과 통상에서 가장 큰 이슈이자, 소위 자본주의의 사유재산  권리에 대한 가장 예민한 영역이 되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압박하는 가장 큰 무기이자 대자본이 인민들을 지배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정신 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과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첫 글로 시각장애인과 독서장애인에게 점자는 최소한의 인권이지만 이 또한 저작권이라는 거대한 장벽과 만나는 현실을 다루고 있다. <편집자>

    *** 

    6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점자. 6개의 점을 규칙에 따라 배열하면 우리가 읽는 것과 같은 글자가 된다. 마치 별자리처럼.

    모르는 사람에게 별은 그냥 의미 없는 빛일 뿐이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본 사람들의 상상력과 지식에 힘입어, 그 안에서 온갖 신화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 별자리를 성좌라고 부른다. 점자책 속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점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라고 불린다. 가장 과학적인 글자도, 가장 대중적인 글자도, 가장 편리한 글자도 아니지만,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글자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점자가 그렇게 불리는 것은 그것이 그 어떤 글자보다도 사람에 대한 배려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 ‘문자’라는 말 대신 ‘글자’라는 말을 사용했다. 큰 차이가 있겠냐만, 굳이 문자라는 말을 피한 것은 문자가 시각에 의존하여 읽히는 것에 반해, 점자라는 글자는 사람의 살을 통해, 촉각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조금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점자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을 몸으로 읽는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점자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그것이 촉각을 통해 전달된다는 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시각이 특권화된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잃어가고 있는 감각이 점자를 통해서 보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점자 교육의 한 장면(사진=부천점자도서관)

    서구에서는 점자를 브라유(braille)라고 부른다. 6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글자 체계를 만들어낸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3살 무렵 시력을 잃었다. 브라유 이전에도 점자 체계가 있었는데, 그것은 12개의 점으로 된 ‘밤 문자’였다. 밤 문자는 전쟁터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비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고, 보통사람들이 배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후 브라유는 보다 간편한 6개의 점으로 된 점자 체계를 만들어 낸다. 그는 살아서 자신이 만든 점자가 널리 쓰이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사후 시각장애인을 위한 공식 문자로 인정받게 된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 9969번에는 ‘9969 브라유’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아마 그가 만든 점자가 밤 하늘의 별 자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봄직 하다.

    어쨌든 그가 만들어낸 점자 체계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빛이 되었다. 헬렌 켈러는 브라유의 점자책으로 세상과 소통했고, 레이 찰스는 브라유 점자 악보를 통해 음악과 만났다. 그리고 그들 역시 우리 삶의 빛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그 삶의 빛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있다. 그 장벽은 저작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저작권법에는 “공표된 저작물은 시각장애인 등을 위하여 점자로 복제, 배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그 법이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쓰이기 보다는 동일한 법안에 있는 문화 산업 및 유통 기업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저작물 이용자의 향유권, 시각 장애인의 경우 그 향유권은 유희나 쾌락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에 해당하는데, 그 향유권 조차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권리자의 권리는 최대한 보장하되, 이용자의 향유권은 최대한 축소시키는 것이 지금의 저작권 체계이다.

    거기에는 어디에도 “문화의 향상 발전에 이바지”(저작권법 1조, 목적)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 영상 매체가 특권화된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시각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우리가 얻는 정보의 90% 이상이 시각을 통해 전달된다. 때문에 시각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한 이들에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점자로 된 정보는 그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점자화된 정보는 상당히 드물다. 책으로만 따져도 점자책은 한국에서 출간되는 책의 단 2%에 불과하다.

    한국의 헌법에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식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다. 이걸 알 권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장애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권리까지 들먹이는 것이 무색하게 시각 장애인들이나 독서 장애인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도 알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한 권의 점자도서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일반 도서를 스캔하여 입력하고, 교정을 본 후 이를 다시 점역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점역을 하고, 점자로 인쇄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해서 점자책 한권이 나오기까지는 보통 3-4개월여가 소요된다.

    하지만 출판사로부터 텍스트 파일을 지원받는다면 일반 활자의 편집이나 교정을 보는 시간이 단축되어 1-2주일이면 점자책 한 권이 나올 수 있으며 비용도 1/4정도로 축소된다고 한다. 그리고 꼭 점자책을 출간하지 않는다 해도 요즘에는 시각장애인과 독서장애인들을 위해 디지털문자정보를 점자 자료로 변환해 출력하는 점자프린트나 그것을 음성으로 변환해 들을 수 있는 인쇄물 음성변환 프로그램 등이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디지털문자정보 역시 출판사를 비롯한 저작권자의 권리 영역으로 묶여 있다.

    이번 11월 19일부터 23일까지 세계지적재산권기구 저작권상설위원회(WIPO SCCR)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지난 몇 년동안 논의되어 온, 시각장애인 및 독서장애인의 저작물에 대한 접근권 보장을 위한 독서장애인조약이 논의됐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시각장애인연맹(WBU)은 시각장애인 또는 기타 장애로 인해 독서를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접근이 가능한 판형으로 저작물을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도 제작, 배포 등이 가능하도록 하는 세계 지적재산기구(WIPO)의 새로운 조약을 만들 것을 제안해왔다.

    이 제안은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2008년 10월에 완성되었다. 이후 세계지적재산권기구를 통해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저작권 단체들과 미국, 유럽연합 등은 이것이 ‘조약’으로 체결하는 것에 대해 반대해왔다. 특히 국제출판협회(IPA), 국제영화제작자연맹(FIAPF), 국제영상연맹(IVF), 영화협회(MPA), 국제작가 및 작곡가협회연합(CISAC),국제복제권기구연맹(IFRRO), 국제음반산업협회(IFPI), 국제기자연맹(IFJ) 등 20개의 산업단체들은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독서장애인조약을 통한 제한의 범위를 좁혀야 하고, 이런 예외적인 상황이 저작권의 기본원칙을 재정의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11월 19일에 유럽연합은 성명을 통해 구속력있는 조약을 포함한 독서장애인조약 협상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연합과 미국이 이 조약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유럽연합의 성명은 시각 장애인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던져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회의의 결과를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단 WIPO 총회의 로드맵에 따르면, 2013년에는 이 조약의 조인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레이건 정부 이후로 단 한번도 저작권 관련된 정책을 완화해 본 적이 없다. 사기업과 그들로 이루어진 출판 및 영화 산업의 협회 역시 저작권을 더욱 강화해야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저작권 체계를 재구조화 하는 것도 아니고,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예외 조치를 만드는 것뿐이지만, 그들의 반발은 거세다.

    내년까지 갖가지 방법으로 로비가 진행될 것이고, 지식기반경제에서 특허나 저작권이 가지는 역할을 강조하는 경제 담론도 늘어날 것이다. 기업뿐 아니라 가끔은 인류애가 넘치는 보통 사람들 조차 경제적 합리성 앞에서는 기본적인 인권에 기초한 사유를 멈추기도 한다.

    저작권은 원래부터 저자의 권리(author’s right)가 아니라 복제된 상품에 대한 권리(copy +right)이다. 따라서 저작권이 창작자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문화 생산물을 풍부하게 만들것이라는 주장은 환영에 불과하다. 눈 밝은 사람이면 누구나 알 듯이 저작권의 혜택을 받는 창작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오히려 대부분의 보상은 거대 문화상품 유통 기업이나 신탁관리단체로 돌아간다.

    때문에 나는 저작권에 규정되어 있는 대부분의 권리들이 보통의 상법이나 공정거래법 같은 곳에서 다뤄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저작권 체제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고, 지금까지 진행된 여러 국제 협정까지 위반해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 글에서 저작권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의 저작권 체계내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예외적인 조치라도 시행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마저도 지금까지 시행되지도 못했고, 시행되었더라도 극히 제한된 영역에 불과해 시각장애인들에게 충분한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해주지도 못했다. 나는 브라유의 아름다운 성좌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시각장애인들에게 빛에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정보공유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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