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L은 유령이 아니다
    [NL 30년-①] 대도시 대학생들의 출현
        2012년 05월 29일 09: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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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한국 자본주의가 본격 성장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화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전과는 질을 달리 하는 새로운 집단을 출현시켰다. 많은 것이 그렇듯 새로운 집단의 출현을 알린 것은 문화였다. 문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들을 대표했던 인물은 김민기, 하길종, 최인호 등일 것이다.

    이들은 60년대 서방 청년들의 진보적 자유주의 이념을 수입했고 농촌에서 태어나 일본 육사에서 잔뼈가 굵은 박정희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장발 단속, 대마초 파동 등은 전통 봉건적인 문화를 체현하고 있는 권력자와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여전히 봉건적 잔재가 뚜렷한 농업사회였다.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필자가 재구성

    70년대 20대 초반의 청년층 중 7~10% 정도만이 대학생이었다. 대학생들의 절대 규모가 크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저항은 대도시의 일부 인텔리층을 뛰어 넘지 못했다. 덕분에 투쟁의 치열함에 비해 박정희 정권을 넘어 설 수 없었다.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농촌, 전통, 봉건의 굴레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이다. 80년대 이후 자본주의적 성장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중공업화가 진전되면서 대졸 사무직과 엔지어니들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고 이는 대학생들의 숫자와 대졸자를 급속히 증대시켰다. 80년 10% 선이던 대학생 비율은 85년 20%를 넘어 섰고 절대 숫자도 100만명에 육박했다.

    광주와 사상 논쟁

    이와 더불어 김민기, 최인호 등 일부 선진 인텔리들의 문화는 점차 늘어나는 대학생 규모와 함께 대도시 대학가를 파고들고 있었다. 이들의 눈에 박정희와 전두환은 대통령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고리타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70년대 중반 대학생들의 반유신투쟁은 박정희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직면했다. 민청학련 사건이나 긴급조치 등이 이를 상징한다. 70년대 중반을 계기로 박정희와 학생들의 대결은 점차 첨예화해졌다. 이와 동시에 학생들은 종속이론, 해방신학 등 급진적인 이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불을 지른 사건이 광주였다. 광주를 계기로 학생들은 박정희-전두환 정권과는 한 하늘 아래서 공존할 수 없는 적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학생들의 생각은 보다 급진적인 형태로 정교화되기 시작한다. 이를 배경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상 논쟁이 전설처럼 남아 있는 무림-학림, MT-MC, NL-CA, NL-PD 논쟁들이다.

    긴 역사적인 안목에서 보면 70~87년을 하나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시기는 한국 자본주의가 본격 성장하던 시기였고 한국자본주의 성장과 함께 발흥했던 중산층과 진보적 인텔리의 이해에 맞는 정치체제를 두고 각축했던 시기이다. 이를 대표했던 인물이 김대중, 김영삼이다. 따라서 6월항쟁 이후 80년대 중반 대학가를 수놓았던 급진 논쟁은 빠르게 가라 앉았다. 그리고 박정희/전두환-김대중.김영삼 등의 대결은 장외 투쟁이 아니라 제도화된 정치공간으로 이동했다. 운동의 주도권 또한 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결국 80년대 중반 학생들의 급진 이념은 시대와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NL 이론의 역사적 맥락

    문제는 6월항쟁의 승리가 미온적이었던 만큼 민주화 추세가 대단히 느리고 고통스럽게 진행된 점이다. 그 사이에서 급진 이념이 잔존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했다. 80년대 중반 급진 이론에 대한 진보적 인텔리들의 미련(?)을 극점까지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 이른바 사노맹이다. 반면 NL은 6월항쟁에서 얻은 경이적인 대중세와 6월항쟁의 미온적인 측면(유사 민주화)을 파고 들어 상당기간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 정점에 있었던 사건이 95년 하반기 전두환 노태우(전노) 구속투쟁이다. 아마도 여기까지가 NL 이론이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시기일 것이다.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NL은 유령이 아니다. NL의 출현과 종말에는 사회역사적 맥락이 있게 마련이다.

    필자는 NL 이론의 사회역사적 맥락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70년대 한국 자본주의화와 함께 출현한 대도시 대학생들의 급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하나의 이념체계이다. 둘째. 6월항쟁 이후 대부분의 급진 이념, 사조들이 소멸되었지만 NL은 90년대 중반까지 상당 수준의 세력을 유지했다. 그것은 6월항쟁이 밑으로부터의 힘에 의한 대중적 승리이면서 위로부터의 개량화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민주화가 보다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NL은 대중적.사회적 지지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있었던 시점은 95년 하반기 전노 구속투쟁이었다. (계속)

    필자소개
    민경우
    전 범민련 사무처장이었고, 현재는 의견공동체 ‘대안과 미래’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서울 금천지역에서 ‘교육생협’을 지향하면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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