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주의와 가족이 가지는 종속성
[서평] 『아버지가 없는 나라』 (양 얼처 나무 외/ 김영사)
    2012년 11월 10일 11:33 오전

Print Friendly

<아버지가 없는 나라>는 모쒀족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양 얼처 나무의 개인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을 수식하는 ‘매력적인 모계사회 이야기’나 ‘유토피아’라는 단어에서 기대했던 모쒀족의 삶보다는 양 얼처 나무 본인의 생각과 시선이 많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드러난 모쒀족의 모계제는 그렇게 ‘매력적’인 ‘유토피아’로 다가오지 않았다.

모쒀족은 모계제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포기하고 여성이 집안의 가장이 되고, 그 자식과 남자 형제로 가정이 구성된다. “딸이 없으면 누가 나한테 손주를 안겨주겠어? 딸이 집안의 재산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라고 두제마 아줌마가 말했듯 여성이 집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정의 재산은 딸에게 곳간 열쇠와 함께 상속된다.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여성이 보편적으로 남성에 종속되는 이유를 물적 조건이라고 보았다. 정착생활을 하면서 생산성의 향상에 따라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그때 (경제적) 가족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성된 가족은 노동 분업을 하게 되고 이때 여성의 가내 노동, 재생산 노동을 함으로써 가족 안에서 성별에 위계가 생긴다.

모쒀족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양한 소수민족이 모여 모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착 생활을 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가족을 구성했다. 여기서 노동 분업 또한 생겼다. 주목할 점은 다른 부계제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가내 노동과 재생산 노동을 했고 남성은 장사를 하거나 산에 올라 유목을 했다는 점이다. 다만 남성의 역할에 ‘권위’와 가치가 부여되지 않았을 뿐이다.

대표적인 부권제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어떠했는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에서 엄마는 ‘부엌이 좋으냐’는 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부엌을 좋아하고 말고가 어딨냐? 해야 하는 일이니까 했던 거지. 내가 부엌에 있어야 니들이 밥도 먹고 학교도 가고 그랬으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믄서 사냐? 좋고 싫고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거지.”라고. 그렇게 여성은 집에서 요리하고 가족들의 삶을 부양해야 했다. 모쒀족과 다르게 우리나라의 전통적 사회에선 남성의 역할에 ‘권위’가 부여되어 여성 종속이 이뤄졌다.

그러나 모쒀족과 우리나라 여성의 위치가 비슷하게 느껴진다. 모쒀족의 여성은 가정에서 ‘힘’을 가졌지만 결국 그들이 가정에서 해야 하는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여타 부계제 사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이 밥을 하고, 재생산을 해야 했다. 남성 애인을 들이지 않고, 재생산하지 않으며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이 이행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다그치고 조언했다.

‘끊임없이 부엌에서 일하고 생활을 위해 누에를 치고 누룩을 빚고 두부를 만들고 재봉질과 밭일까지 하며 자식을 키워내던’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와 모쒀족의 다부가 가정을 위해 하는 노동과 희생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모쒀족에서 ‘어머니의 집’을 떠날 수 있는 것 또한 남성뿐이다. 비록 개인적인 꿈을 위해 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보다는 자유로웠다. 양 얼처 나무가 집을 다시 떠나고자 할 때 가족들이 “대체 그게 무슨 생각이니? 너는 여자야. 집에, 마을에 머물러야 마땅하지. 너의 힘은 집에 있어. 집을 건사하고, 노인을 공경하고,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게 네 의무야.”라고 말할 것을 예상했듯 여성에게 세계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성은 라마승이 되기 위해 떠날 수도 있었고, 라마승이 되면 부족 내에서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제한되었지만 개인이 ‘가정’을 떠나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 또한 부권제 사회인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가부장제’가 좀 더 심했던 70년대나 80년대의 한국을 생각해보면 남성의 경우 ‘서울’로 대학을 가거나 직장을 구하러 가는 등 가정을 떠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인정받았지만, 여성의 경우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어디 여자가 학교야’와 같은 인식 아래서 집에, 마을에 머무르도록 강요받았다. 만약 모계제 사회에서 여성이 종속되지 않았다면 여성의 자아실현을 위한 자유로운 공간 이동이 부계제 사회의 남성처럼 가능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 얼처 나무의 어머니가 집을 떠날 때도, 양 얼처 나무가 노래를 부르기 위해 다시 마을을 떠날 때도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도망’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모쒀족의 모계제 사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성관계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방에 불을 피워 남성을 맞을 수 있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남성의 경우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은 마냥 자유롭고 개방적이지 않다. 양 얼처 나무가 노래 대회에 나간 뒤 마을에 돌아오자 양 얼처 나무의 어머니와 거코의 어머니는 둘을 ‘이어주는 것’을 도모한다. 또 거코는 양 얼처 나무에게 “오늘 밤, 네 방문을 두드릴 거야. 두고 봐. 나랑 함께 밤을 보낸 다음엔 절대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테니까. 절대로!”라고 “두고 봐. 너무 행복해서 다시는 떠나고 싶지 않을 테니까.”라고 이야기한다. ‘남성’을 겪으면 절대로 마을을 떠나지 않고 가정에 종속될 것임을 예언하는 것이다.

과연 모계제 사회라고 여성이 종속되지 않는 것인가. 종속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자주성이 없이 주가 되는 것에 딸려 붙음’을 그 뜻으로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모계제에서도 결국 여성은 ‘가정’에 종속된다. 그들은 그들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충실이 이행해야 하며 자유롭게 가정을 이탈할 수도 없고 재생산을 해야 한다. 그들이 ‘다부’로서 스스로 갖는 자부심 또한 그 부족사회가 만들어낸 틀에 지나지 않는다. ‘모계제’라는 틀 안에서 모쒀족의 여성들 또한 교묘히 종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종속은 결국 이성애주의와 가정이 갖는 종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이성애주의가 원하는 ‘재생산’과 가정이 원하는 ‘지속성’이 맞물려 모계제든 부계제든 여성은 가정 혹은 남성에 종속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된다. 분명 가정이 갖는 이점 또한 있겠지만, 그 가정이 추구하는 가치가 최우선이 될 때 개인은 사라진다.

진정으로 여성이 어딘가에 종속되지 않으려면 ‘이성애주의’와 ‘가정’을 타파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가지는 종속성을 깨지 않으면 성은 ‘자궁’이라는 신체적 특징 때문에 끊임없이 종속된다. 또 여기선 불임 여성의 경우 모계제 사회의 여성일 경우에도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한다.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가정이 원하는 가치보다 앞세우고, 이성과의 결혼이나 출산을 강요하지 않을 때 남성, 여성의 성 구분을 초월하여서 한 개인의 독립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명절은 개인들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이성’과 결혼을 하고 ‘출산’을 강요하는 말들 속에서 이성애자, 동성애자 상관없이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나 생각은 무너진다. 이때 ‘가정’은 가정이 추구하는 가치를 확대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에게 ‘불편’을 주는 존재가 되어 개인의 이탈을 초래한다. 결국, 가정이 추구하는 가치를 확대하는 것을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가정이 진정한 가정,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생활을 함께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되기 위해 파트너 제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부계제, 모계제의 이름이 아니라 이성애주의와 가정이 갖는 권력에서 탈피한 진정한 파트너 제도가 사회적인 인식 아래서 시행될 때 모든 개인이 종속되지 않는, ‘종속이 없는 나라’가 구성되지 않을까.

필자소개
연세편집위원회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