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의 노동자여’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분열하자’까지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내 안의 환부 도려내는 비수
    2012년 10월 30일 10: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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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000여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이다. 87년 창립된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다.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는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월 또는 화요일에 게재한다. 이 칼럼은 민교협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올라간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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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었을 때, 내 자취방의 한쪽 벽면에는 시 한 편이 널찍하게 붙어 있었다. 한지에 붓글씨로 한 땀 한 땀 새겨진 그 시는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였다.

시는 “무슨 밥을 먹는가가 문제다/ 우리는 밥에 따라 나뉘었다/ 그 밥에 따라 양심이 나뉘고/ 윤리가 나뉘고 도덕이 나뉘고/ 또 민족이 서로 나뉘고”(1연)라고 시작하여 “게으른 역사의 바퀴를 서둘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지상의 모든 노동자들이여/ 형제들이여!”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이 실린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靑史)가 발간된 해는 1988년이었고, 내가 그 자취방에 들어가 살았던 때는 1991년 즈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이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세계사 차원에서라면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했고, 이에 따라 세계 질서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로 급박하게 재편되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전개는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몇 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여당과 야당이 바뀌는 사건이 벌어지기는 하였으나, 신자유주의의 가치를 견고하게 구축해 나갔다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누가 정권을 잡든지 크게 변별되는 지점은 없었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가 분신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분신을 투쟁으로 삼는 시기는 지났다”고 냉소적으로 일축했던 대목은 나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참여정부의 부자 감세, 대학교 등록금 인상 묵인 등은 그러한 인식 위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라크 파병이라든가 한미FTA 체결 압박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변한 것은 자본주의로 포섭된 사회주의 국가라든가, 서민을 삶의 벼랑으로 내모는 민주화 세력의 반민중적 입장뿐만이 아니다.

우리 자신도 많이 변하였다. 비유컨대 그동안 우리는 ‘어떤 밥을 먹느냐’(생산)고 묻는 대신 ‘어떤 똥을 싸느냐’(소비)라고 따지는 데로 나아갔다. 그래서 “너는 어디에 사니?”라는 물음은 곧 ‘너의 계급을 알려 달라’는 요청과 등가를 이룬다. 어느 광고에 나온 것처럼, 요즘 어떻게 사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승용차를 보여주면 모두 다 알아채야 하는 분위기이다. 명품가방 선물이 여자 친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랑의 징표로 통용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한 때 같은 밥을 먹는다고 서로에 대한 연대의식으로 뭉쳤던 ‘노동 형제들’도 시대의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나는 보수언론에서 ‘귀족노조’ 운운하면 우선 콧방귀부터 뀌고 보는 편이다. 그네들이 노동현장의 실체를 어떻게 왜곡하고 호도하는가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통령이 나서서 그런 표현을 써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구체적인 내용 파악에 들어가게 된다. 노동계급을 분할통치하려는 의도라는 혐의가 먼저 들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을 ‘붉은 메시아’라고 관념적으로 떠받들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래도 생산현장과 소비행태를 하나로 뭉뚱그려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조심스러움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의 ‘귀족 노조’ 타령을 그저 이데올로기 공세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작년 현대자동차 노조의 자녀 세습채용 요구가 그 까닭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당시 나는 보수 세력이 “귀족노조”라고 호명하자 현대자동차 노조가 나서서 “예”라고 대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그 배신감이라니!

변혁은 왜 어려운가. 내 바깥에 펼쳐진 세상을 바꾸어 나가면서, 동시에, 나 자신도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바꾸어 나가지 못하는 변혁은 필경 실패하고 만다. 지저분한 세계 속에서 살아온 나 또한 세계의 낡은 가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터, 이 지점에 눈을 감은 변혁은 결국 기득권자의 이름을 바꿔치기한 형식적인 사건에 머무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지난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아마도 그가 ‘더 많은 똥’(소비)을 쌀 수 있도록 해 주리라는 기대감이 중요하게 작동했을 것이다. 그에게 쏟아진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명백한 의혹들과 약점들은 이런 기대 속에서 간단하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는 지난 몇 년간 파렴치한 독선과 횡포를 견디어야만 했다.

백무산과 황규관의 시집

우리는 이명박 정부가 구축하는 야만의 질서와도 싸워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 안의 이명박도 냉엄하게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예감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구축한 야만의 질서와의 대결은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진행해야 할 터이나, 우리 안의 이명박을 직시하는 작업은 저마다 홀로 펼쳐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성찰과 반성의 단위는 ‘우리’라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 ‘나’라는 것이다. 집단의 결의를 통해 이끌어낸 노선의 수정 혹은 정책의 전환이 성찰, 반성과 혼동되어서는 곤란하다. 사회과학의 영역과 인문학의 영역을 헷갈린 소치인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 안에는 제 스스로에게 향하는 비수 하나가 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썩은 부분을 도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년 말, 황규관이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실천문학사)을 냈다. 거기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분열하자’라는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에서 나는 시인이 품고 있는 가슴 속 비수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는 ‘만국의 노동자여’의 투쟁하는 단위 ‘우리’에게 이제 분열하여 각자 반성하는 개인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시집 전체를 일별하면 드러날 터인데, 그렇다고 황규관이 ‘우리’라는 단위를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반성하는 개인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우리로 다시 모일 가능성을 모색한다고 판단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인의 인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너는,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서 다시 시작하여야 하리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견디기 힘든 깊은 간극이
우리 내부에 있다

버리지 못해 앓고 있는 관능과
초과 전류가 흘러 뜨거워진
미간이 뒤섞여 있다
함께 밥을 먹어도
불투명한 건 미래만이 아니다
오지 않는 건 평화만이 아니다

찢겨져버린 시간이
우리 영혼에 부어졌다
비겁한 뒷걸음질과
더 갖고 싶은 욕망이
함께 부르는 노래 속에 뒤섞여 있다

우리 이제 분열하자
만국의 노동자여, 분열하자

하나에서 여럿으로
소음에서 새벽으로
거리에서 냇물로, 분열하자
광야에서 산허리로
다리를 절룩이는 비둘기로

거친 모래알처럼 도끼에
쪼개진 마른 장작처럼
병든 새끼를 버리고 떠나는
굶주린 암사자처럼
어둔 허공으로 사라지는 불티처럼
활활 분열하자

비 그치면 우북해지는
허리 아픔이 되자
그 위로 부는 바람이 되자

* 아, 사족 하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황금=똥’이다. ‘더 많은 황금’을 ‘더 많은 똥’으로 치환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서 마련하였다.

필자소개
가톨릭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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