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6, 군부 온건파의 쿠데타적 사건
    [기고] 1979년 10월 26일, 그날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
        2012년 10월 27일 01: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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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단체협의회에서 진행한 박정희 정권의 유신시대에 대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조희연 선생의 토론문을 보완한 글이다. 이 토론회의 기조 발제자는 성공회대의 정해구 교수였다. 조희연 선생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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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구 교수는 10.26 사건을 ‘독재권력 내부 온건노선’의 분출이고, 10.26 사건을 ‘민주회복을 위한 쿠데타적 거사’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정 교수는 김재규 시해사건에 대해서 “탈독재 민주화 이행이라는 정치적, 역사적 맥락이 무시된 채 대통령의 최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중앙정보부 부장이 그 신임을 배반하고 자신의 주군인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패륜아’식의 접근은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보았다.

    더구나 12.12 및 5.17 쿠데타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김재규에 대한 평가를 그런 식으로 몰아갔던 당시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런 접근의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김재규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유신독재를 종료시키고 민주화 이행의 돌파구를 열었던 독재권력 내부의 온건노선의 분출이라는 10.26 사건의 의미와 관련하여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김재규 스스로가 명백히 민주회복의 의도를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 제거의 거사를 수행했는가, 아니면 사적 권력욕 등 다른 동기를 가지고 그런 행동에 임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김재규를 ‘유신이라는 독재 하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의 분출로 인한 체제 위기에 대응하는 온건파의 거사’로 보기 때문에, 정해구 교수의 논지에 동의한다.

     김재규가 느낀 안보위기감, 도덕적 환멸

    또 다른 토론자로 나온 경기대 김재홍 교수는 10.26 사건을 더욱 적극적으로 평가했는데, 김 교수는 “자기 상관을 죽임으로써 국민의 희생을 막은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다. 밑으로부터의 압력,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 미국과의 관계에서의 안보위기감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도덕적 동기가 없으면, ‘정조준’해서 박정희를 시해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섹스파티에 해당하는 소행사와 대행사가 10여차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도덕적 환멸감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그러한 거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국과의 갈등관계에서 미국이 압박을 하는 것에 대해, 박정희는 ‘미국이 갈려면 가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보수적인 안보관을 가지고 있는 김재규는 ‘미국과의 관계 악화에 따른 안보위기감’이 컸다.

    김재규는 일종의 ‘국가안보 중시론자’라고 할 수 있는데, 김재규는 보안사령관, 군단장, 중앙정보부 차장보, 중정부장을 두루 거친, 일반 장교가 아니라 안보, 정보전문가로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안보가 대단히 중요한 거사 이유였다고 평가하였다.

    우리는 왜 박정희 독재체제의 붕괴와 제1민주화 시도가 -민중적 저항에 체제위기를 체감한 온건파의- 쿠데타적 거사로 출현하고 그리고 그것이 실패한 후 제2군부정권/광주항쟁을 거쳐 제2민주화로 가게 되었는가 라는 점에 대해 구조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반독재 세력의 힘

    독재 대 반독재의 힘 관계에서, 한국은 반독재, 민중세력의 역동적 도전이 존재하고, 후자의 주도성이 강한 사회이다.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민주화 유형은 민중세력-반독재세력의 도전과 주도성이 강한 유형이다. 거센 도전과 저항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거센 저항은, 이른바 ‘탄압과 저항의 악순환’이 나타나게 하는 것은 물론, 군부 통치엘리트 내의 균열로도 나타난다.

    10.26 사태 이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자행된 광주학살의 전조들

    내부 강경파와 온건파의 집단적 분화가 불가능

    거센 도전의 반대편에 박정희 지배세력의 헤게모니적 결합이. 강고한 결합이 아닌 1인 독재자를 중심으로 하는 경직된 위계적 지배구조 하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 있다.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이 체제위기로 나타나고 그것이 내부에서 김재규 같은 온건파를 출현시키지만, 그것이 온건파와 강경파의 집단적 분화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체제의 폭력적인 위계적인 통합구조 때문에 집단적 분화가 불가능했다.

    물론 여기에는 더욱 크게 분단체제(외부의 적을 명분으로 내부의 통합이 폭력적으로 유지되는 구조)의 영향도 언급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이, 김재규로 상징되는 온건파에 의한 쿠데타적 거사의 형태를 출현시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김재규가 자신의 시해행위를 규정했던 민주회복 ‘국민’혁명이라는 소망이 현실로 나타나려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과 만났어야 한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박정희체제의 폭압적 작동양식, 지배와 저항의 역관계로 인하여, 체제 내부의 온건개혁파 흐름과 체제 외부의 거세 민중세력의 저항의 흐름이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온건파의 쿠데타적 거사가, 김재규 선생의 소망이나 의지처럼 “민주회복 ‘국민’혁명”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한국 독재의 ‘붕괴’양식이 가지는 특수성이다.

    사실 돌이켜 보면, 체제 위기 시에 나타나는 경로는 통상 3가지이다. 개항기 조선시대도 그러했다. 즉 ①지배세력 자체의 전형과 혁신(계몽군주로서의 고종의 개혁 성공), ②체제 지배엘리트 내 온건 개혁파의 혁신 시도(개화파), ③체제 외부의 급진적인 변혁세력(동학혁명 등)이다. 근대 초기 ②와 ③의 경로가 결합되지 못한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민주화는 ‘점진적 이행’의 경로가 아니라, 훨씬 적대적인 충돌의 경로를 통해서 민주화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제3세계 지배전략’ 전환의 과도기적 상황

    다음으로 분석적으로 볼 때, 70년대 말~80년대 초 1차 민주화 경로의 실패를 규정한 것은 국제정세적 조건과 미국의 전략기조에 기인한다.

    미국의 제3세계 지배전략의 변화는 7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86년 필리핀의 피플파워의 등장)까지의 시기는, 미국의 제3세계 지배전략의 ‘민주화전략’ 이른바 ‘저강도전략’으로 전환하지 않은 과도기였다고 나는 평가한다.

    75년 월남 공산화, 78년 이란 혁명, 79년 니카라구아 혁명 등으로 안보독재를 앞세운 미국의 60-70년대 제3세계 지배전략은 균열되고 있었다.

    그런데, 독재정권의 연이은 붕괴. 그에 대한 저항의 혁명적 분출 속에서, 폭압적 독재정권을 내세운 미국의 제3세계 지배전략이 위기에 처했지만, 그것이 새로운 민주화 전략으로 명확히 전환되지 못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바로 여기에, 반독재세력의 거센 저항력을 가지고 있던 남한에서, 먼저 붕괴의 시작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이 79년의 10.26 사건이다.

    그러나 이처럼 미국의 ‘독재 이후의 지배전략’이 분명하게 확립되지 않은 상황, 독재의 붕괴가 혁명정권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위기상황에서, 미국은 ‘독재 붕괴와 민주화 이후의 전략’에 대해서 이중적 태도를 드러냈다.

    바로 이런 과도기에서 12.12라고 하는 군부강경파의 반격이 가능하고 성공할 수 있었다. 전두환를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세력이 온건파의 쿠데타적 거사를 진압하고 권력을 재장악한 것이다. 여기서 제1민주화의 시도는 실패하고 전두환 신군부정권에 대항하면서 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진 제2민주화의 시기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박정희 독재 하 온건파의 쿠데타적 거사는 실패함으로써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궤도로 ‘직행’하지 못하고 7년 동안의 ‘우회로’로 들어서게 되었다.

    군부엘리트 내의 강경파의 반격(12. 12), 그에 대한 민중적 저항(광주항쟁), 그에 대한 유혈적 진압을 거쳐, 제2군사정권이 출현하게 되고,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민주화의 고통스런 경로가 열리게 된 것이다.

    김재규가 소망했던 민주회복 ‘국민’혁명은, 스스로의 거사가 실패하고, 반대 강경파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등장한 광주항쟁, 학살과 그 희생에서 새로운 도덕적-정치적 에토스를 보강함으로써 민주회복 ‘국민’혁명이 될 수 있었다. 광주의 피의 항쟁을 이어받는 급진적인 그리고 진정으로 국민적인 반독재 ‘국민혁명'(김재규)이 나타나게 되었다(김재규의 소망은 그렇게 실현된 것이다)

    유신체제의 도덕적 붕괴

    김재홍 선생이 김재규가 박정희를 처음 쏘고 다시 정조준해서 쏠 때에는 유신체제에 대한 도덕적 환멸이 강렬하게 작용했다는 지적은 중요한 지점이다. 이것을 나는 유신체제의 붕괴의 일차 원인은 민중의 저항이었지만, 또 다른 점에서 이것은 유신체제의 도덕적 자기붕괴가 원인이라고 본다.

    체제의 도덕적 기반, 즉 체제엘리트들이 자신들이 지배세력으로 있는 그 체제에 대해 더 이상 도덕적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자기모멸적 심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2006년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라는 책을 썼는데, 이런 점에 대해 서술했다. 이 책에서 나는 5.16 당시 군부엘리트들이 기성엘리트들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일종의 ‘우국충정’의 결속감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말기에 오면 이러한 우국충정식의 결속감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는 마지막에 유신체제의 작동양식이 거의 마피아 수준으로 작동했으며, 또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구조화된 부패가 고착되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마피아적으로 작동하였다는 것은, 유신체제가 민중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체제에 조금이라도 항변하거나 비판적인 상층 엘리트, 심지어 군부 엘리트들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70년대 초반이지만, 김성곤 등의 항명파동에 대해 안기부가 수염을 뽑고 고문하는 수준으로 ‘탄압’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박정희에 비판적인 군부 엘리트도 고문을 당하는 마피아적 성격이 말기의 유신체제였다.

    다음, 부패가 구조화되어갔다. 사실 각종 개발 인허가와 관련된 특혜를 주면서 공화당이나 안기부가 리베이트 자금을 공식적으로 모금하여 이를 통치자금으로 사용하는 구조였다.

    서울대 총장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억대의 위로금을 받고 청와대를 향해 큰 절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전별금이라는 이름으로, 충성분자들에게 돈을 배분하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70년대 이후에는 요정정치도 확산되었다. 이런 것들이 결합하면서, 박정희 정권 자체의 내부적인 도덕적 붕괴가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김재규의 거사에서 김재규가 가졌던 도덕적 환멸도 자기가 엘리트로 있는 체제에 대한 도덕적 환멸이기도 했다. 오늘 10.26에 내가 생각해본 일들이다.

    필자소개
    민교협 의장.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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