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심’의 정치교체는 가능한가
        2012년 10월 15일 1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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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3월 22일 ‘관훈포럼’ 강연회에서 안철수 후보는 “정부에서 뜻을 펴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30대 후반부터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등 다양한 형태의 공직 제안을 받았다”며 “정치는 잘 모르고 정치권으로 가는 건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해 안 하는 게 낫다”고 밝힌 적이 있다.

    작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도 박원순 시장을 지지하며 출마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그가 현재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9월 19일 출마선언 이후 건너온 다리도 불살랐다고 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인다. 그는 혹시 그 동안 대통령을 제안하지 않아서 “다양한 형태의 공직 제안”을 거절했던 것일까. ‘진심’이 궁금하다.

    정치는 잘 모른다던 안철수

    ‘인생의 낭비’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 후보는 정치에 대해 종종 혐오감을 보여왔다. 그간의 발언으로 볼 때 기존의 정치란 그저 ‘나쁜 것’으로 그에게 입력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정치인들의 도덕불감증과 ‘비상식적’ 정책 때문에 나쁘게 보이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정치의 내용이 나쁘다고 해서, 정치 그 자체를 나쁜 세계처럼 이해하는 건 상당히 편협한 태도다.

    작년 3월 관훈포럼 초청 토론회에 참가한 안철수(자료사진)

    그리고 “상식파”라는 그는 정치적 이념, 즉 일종의 (정치적) ‘색깔’을 불편하게 여긴다. 그가 어느 정도로 이념을 혐오하는지 알 수 있는 발언이 작년 8월 청춘콘서트에서의 ‘벌레’ 발언이다. 김제완 세계로신문 대표의 글에 인용된 문장을 재인용해 보겠다. (프레시안 기사 참조 )

    “보수와 진보로 자꾸 나누는 이유가 뭘까. 비유를 들어 보겠다. 평온한 평지에 어느 날 벽을 만들어서 그늘과 습지를 조성하면 거기에는 벌레들이 많이 살게 된다. 벽을 없애자고 할 때 그것을 가장 싫어하는 존재는 누구일까? 바로 벌레들이다. 멀쩡한 사람들을 억지로 나누는 사람들은 담 밑에서 자기 나름의 이익을 얻기 위한 사람들이다.”

    안철수 후보가 이해하는 진보와 보수란, 정치적으로 지향하는 방향과 가치라기 보다 그저 편 나누기와 이권쟁탈전에 불과해 보인다. 그렇기에 그에게 그런 구분은 ‘나쁜’ 구분이 되고 이념을 가진 자들은 분열 덕분에 생존할 수 있는 벌레가 된다. 아마 그의 ‘상식’에 따르면 이 글도 벌레 같은 글이 될 것이다.

    또한 4월 총선 즈음에 그는 전남대학교에서 <광주의 미래, 청년의 미래>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보다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다면 적격자일 수 있다.” “대립, 분노보다 원만하고 따뜻하며 인격이 성숙한 분을 뽑는 것이다” “정당과 정파보다는 개인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 옳다” 라고 했다. 정책이나 지향하는 가치관이 아니라 원만하고 따뜻한 인격을 가진 ‘개인’을 뽑으라는 조언을 청년들에게 하는 ‘멘토’라는 점을 떠올리면 참으로 걱정스럽다.

    정당과 이념에 대해 이렇게 일관된 거부감을 드러내는 태도를 보면 진심임이 분명해 보이고, 이런 진심을 드러내는 걸 보면 정치는 잘 모른다고 했던 그의 말도 비교적 진심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념과 정파를 너무 혐오한 나머지 정당에 발 들이기를 극구 부인하며 “무소속 대통령이 낫다.”고 했다.

    무소속 대통령이 국회를 아무리 존중한들, 그 국회는 과연 대통령과 ‘아름답게’ 소통과 화합이 이루어질까. 인간의 소통에 대해 너무 낭만적 환상을 가지면 이런 발상이 가능하다. 무소속이라서 대통령이 여야의 설득에 유리하기는커녕 국정 운영으로부터 소외될 가능성이 더 크다. ‘나쁜’ 때를 묻히기 싫어서 공중부양으로 강을 건너려다가 공중분해 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대통령이 의회 위에 군림하겠다는 건가.

    게다가 무소속 대통령 발언이 문제가 되자 청주교대 강연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기를 “정당 스스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쇄신을 해서 국민이 ‘우리 정치가 믿을만하구나, 달라졌구나’ 하면 제가 가만히 있어도 ‘빨리 정당에 들어가라, 어떻게든 단일화하라’고 하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정당이 쇄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들어가서 바꿔야 한다. 아니면 모범적인 깨끗한 새 정당을 창당하면 된다. 그런데 기존 정당이 바뀌면 들어가겠다, 그것도 국민이 들어가라고 해야 들어갈 듯 내비치는 태도는 한 나라의 지도자로 나서는 정치인으로서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안철수의 딜레마

    이렇게 계속 정당 정치에 거리 두는 정치인, 왜 그럴까. 흔히 이념에 대한 일종의 증후군이 있다. 예를 들어 보편복지에 찬성하고, 비정규직 철폐에 찬성한다고 하면서도 “나는 좌파는 아니지만”을 꼭 강조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차별에 분노하면서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을 꼭 언급하는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현실에 분노하고 그래서 운동을 지지하지만 자신이 참여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리 말할 수도 있다. 또는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할 정도로 아직 자신의 사회의식을 잘 모른다는 조심성 있는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좌파는 빨갱이가 되고, 페미니스트는 꼴페미가 되는 우리 사회의 ‘낙인’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며 바로 스스로도 그 낙인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갱이’와 ‘꼴페미’라는 사회적 낙인에 저항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그들로부터 분리시키며 ‘피곤하지 않은 건전하고 상식적인’ 사람으로 규정하려 애쓴다.

    사회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개인이 사회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함에도 마치 ‘정치적 색깔’을 지니고 있으면 오염된 인간처럼 여기며 주홍글씨를 찍어대는 사회풍토가 개인의 사상과 의식을 자유롭게 표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탈이념’을 운운하게 하고 ‘건전한 중도’니 ‘상식적 중도’니 하는 애매모호한 언어를 낳는다. 다수의 무당파 중도층(이라고 하지만 ‘무관심’과 종종 잘 구별되지 않는)이 안철수를 지지하는 이유 중에는 정치적 색깔에 대한 부담이 없으며 또한 ‘나쁜 경험’이 없다는 그가 기존과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거란 막연한 기대가 크게 차지한다. 안철수 후보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정당인이 아니고 탈이념적이라 두루두루 지지층을 확보했는데 정당에 들어가는 순간 그 고유의 힘이 빛을 바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박정근의 농담’에 2년 구형을 할 정도로 이념의 자유가 아직도 억압 당하는 남한 땅에서 이념 기피자, 혹은 혐오자의 ‘새 정치’란 무엇일지 막막하다. 그저 기존의 ‘낡은’ 것으로부터 거리 두고 있다고 새 것이 되는 건 아니다.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분명히 가진 사람에게는 이념이 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면 이념공동체인 정당의 존재는 필수다. 그런데 이걸 거부하며 자기만의 ‘상식’과 ‘비상식’으로 세상을 보는 정치인은 이 이념억압의 사회를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며 자기와 다른 상식의 존재를 ‘벌레’로 몰아붙일 가능성이 크다.

    세상을 바꾸는 건 진심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을 바꾸는 건 진심이라는데 과연 그럴까. 지난 7일 정책비전 발표시 안 후보는 “정책 실행이 위험하면 위험하다고, 안전하면 안전하다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국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위험하면 위험하다고, 안전하면 안전하다고’ 그저 ‘솔직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위험을 극복할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국민과 솔직하게 소통만 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결과에 대한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그도 <안철수의 생각>에서 “10년간 집권했으면 서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도록 했어야 하는데 어땠습니까? 정부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열심히 했다는 것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며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열심히 소통했다는 것 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건 “시대의 숙제를 감당”하겠다던 안철수 후보가 그 시대의 숙제를 과연 무엇으로 파악하고 있느냐에 달렸다. 숙제를 엉뚱하게 파악한 채 그에 대한 진심을 가득 담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심이니 선의니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좋은’ 가치라고 내미는 것이야말로 더욱 소통을 불통으로 만들 수 있다.

    23번째 죽음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 찾아왔다. 구미에서의 불산 유출로 인한 피해는 어디까지 확산될 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우리가 풀어야 하는 시대의 숙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안 후보는 한 70대 노인의 자살에 가슴 아파했지만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온갖 진심의 수사가 동원되어도 노동자들을 향한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진심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경제모델이 필요합니다.” 라던 그는 이미 많은 지적이 쏟아져 나왔듯이 새롭기는커녕 우려되는 인물과 손잡고 있다. ‘낡은’ 세력이나 안철수 측이나 시대의 숙제를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안철수 캠프에서는 정치체제를 바꾸는 ‘정치실험’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정치실험의 의지가 그토록 강하다면 최소한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장에 도전하며 실험의 실패와 성과를 통해 정책적 공감과 검증을 얻는 게 순서가 아니었을까. 정당과 정치 불신으로 일관된 채 정치체제를 바꾸겠다는 태도, 즉 아무도 믿지 마라, 오직 나만 믿어라, 모두 낡았다, 나만이 새 날을 불러오리라, 신앙심의 정치가 열리고 있다. 추상명사의 정치는 정서적 공감은 얻을지 몰라도 현실을 바꾸는 것과는 무관하다.

    언어의 난장은 걷어버리고 분명한 입장과 정책을 보여주길

    필자소개
    이라영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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