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파 갈등과 그 교훈 ①
[조선생의 역사이야기] 붕당정치, 당파싸움...과거 얘기 아니다
    2012년 09월 25일 02: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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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규 선생의 수업 이야기 ‘조선의 당파가 나뉘어지는 이유’를 두번에 나누어 싣는다. 앞 부분에는 조선의 당파가 갈라지고 합쳐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중심이고 두번째 글에서는 그것과 조선 이후의 현실과 함의에 대해 다룬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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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붕당정치에 대하여 정리해보기로 합시다. 붕당정치는 좋은 표현이고, 나쁜 의미로는 당파싸움을 했다고들 하지요.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사색당파라고도 부릅니다. 네가지 색깔로 나뉘어졌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훨씬 더 많이 나뉘어졌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붕당정치의 장단점을 이야기합니다. 장점은 여론을 중시하고, 상대방에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하여 건전한 정치를 했다고 합니다. 단점으로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아서 한쪽이 잡으면 다른 쪽에 보복하는 정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논쟁으로 예송논쟁을 듭니다. 효종은 둘째아들인데, 세자였던 형(소현세자)이 죽고나서 왕이 되었습니다. 이 효종이 죽었을 때, 가족 질서 그대로 둘째 아들 대우를 하느냐? 아니면 그래도 왕이었으니까 큰 아들 대우를 하느냐?를 가지고 싸운 이야기입니다. 서인은 둘째아들이 맞다, 남인은 큰 아들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한 번은 서인이 이기고 두 번째는 남인이 이겼습니다.

또 성리학이 발달하여, 율곡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고, 퇴계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고, 송나라의 성리학이 조선에 와서 더욱 깊어지고 심오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숙종은 한번은 이 쪽 편을 들어주고, 그 쪽이 너무 힘이 쎄지면 다음에는 다른 쪽 편을 들어주고 하면서 왕권을 유지하였다고 하고,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조, 헌종, 철종 때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번갈아가며 외척세력이 되어 조선을 완전히 말아먹었다고 합니다.

조선후기의 양명학자 이건창의 정치사서

이상이 대략 교과서에서 늘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러면 도대체 줄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엄청 발달했다. 이이의 제자는 서인이 되고, 이황의 제자는 동인이 되었다. 붕당이 만들어지면서 초기에는 장점이 많았는데, 점차 단점이 많아졌다. 영조와 정조는 이를 막기 위하여 탕평책을 썼는데, 정조 사후에는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이렇게 되겠군요.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요? 이게 우리 역사라고? 도대체 무슨 인과관계도 없고 발전도 아니고 후퇴도 아니고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잘됐다가 안됐다가 다시 잘될라다가 망해버렸다… 교훈이라도 있는 건지, 원…

이제 하나씩 검토해 봅시다

사림이 네차례 사화(士禍) 끝에 권력을 잡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다

동인과 서인이 나뉜 이유는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심의겸과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이조(吏曹)라는 부서가 관리들의 임명과 해임과 승진과 좌천을 다루는 인사이동 담당하는 부서인데, 이조의 전랑이라는 직책이 그 초안을 만드는 자리입니다. 초안이 만들어지면 특별한 승진 이유나 결격 사유가 없는 한 그대로 유지될 것이니, 이 초안을 짜는 이조전랑 자리가 요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조전랑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들 달려들게 생겼는데, 결정적으로 이조전랑 자리만은 자천(自薦)하는 제도, 즉 전임자가 후임자를 사실상 결정하는 제도였으니, 이조전랑을 한번 한쪽이 차지하면 그 쪽 당파가 계속 차지하게 생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렇게 나뉘게 된 타이밍입니다. 이때가 선조 임기 중반쯤인데, 이때는 사림이 네 차례의 사화를 당하면서도 그 때마다 다시 세력을 확대하여, 결국 훈구파를 몰아내고 최종적으로 권력을 다 잡은 때였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림의 입장에서 더 이상 싸워야 할 적이 없어지자 사림이 분열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조전랑의 자천제도도 사림이 훈구파와 싸우면서, 훈구파가 인사를 둘러싸고 비리를 저지르니 이를 막고자, 훈구파에 비하여 맑고 깨끗했던 사림파가 자신들이 인사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자천하도록 하였을 겁니다.

훈구파가 장악하고 있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나 심지어 직속 상관인 이조판서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이조전랑직은 자천하도록 하였는데, 그 외압이 없어지자, 이제 이 이조전랑직이 권력기관이 되었고, 이를 둘러싸고 사림파 내에서 자기들끼리 분열이 생긴 것이지요. 권력을 쥐고서 타락했던 훈구파를 비판하던 사림이 막상 자기들이 권력을 잡게되니, 자기들 역시 권력을 서로 잡기 위하여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서인을 누르고 정권을 잡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다

남인과 북인이 나뉘어지는 계기를 살펴보기로 할까요? 서인과 동인은 엎치락 뒤치락 권력을 서로 잡았다 놓쳤다 합니다. 이이가 살아있는 동안은 서인이 약간 우세하며 갈등하다가, 이이가 죽고나자 동인이 압도하고,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거치면서 동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합니다. 그리고 다시 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싼 ‘건저의(建儲議)’ 사건으로 동인이 집권을 하고 이게 약 30년간 지속됩니다.

동인이 집권을 하자마자, 반대편인 서인의 정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두고서, 강경하게 정철을 사형시켜야한다는 입장(이산해)이 북인이 되고, 유배로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론(우성전)이 남인이 됩니다.

물론 남인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많고, 북인은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문적 입장에 따라 나뉘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달랐습니다.

결국 학문적 입장은 겉치레 뿐이고, 사실은 오로지 권력을 둘러싸고 친하냐 친하지 않느냐 만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같은 스승 밑의 제자라는 점은 그 스승의 사상을 따르고 지키고 발전시킨다는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었고, 단지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워서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밀고 끌어주는 인맥의 기반이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대북은 골북과 육북과 중북으로 나뉘다

남인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북인이 권력을 잡자, 이 북인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뉘어집니다. 대북과 소북이 나뉘어진 계기까지는 저도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나이든 세력이 대북이고, 젊은 세력이 소북입니다. 소북이 약해지자 대북이 나뉘어져 이산해가 이끄는 육북(肉北)과 홍여순이 이끄는 골북(骨北)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광해군 대에 또 나뉘어져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은 인목대비 폐위를 주장하고 , 중북(中北)은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합니다.

북인은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조식 선생의 사상을 제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의리에 투철한 건 기본이고 실천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선 홍의장군 곽재우며, 정인홍이며 유명한 의병장들이 북인 출신입니다. 또 현실적이어서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국가 조세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대동법 실시에 적극적이었고, 광해군 때 청과 명 사이에서 줄타기 중립외교를 한 것도 이러한 현실인식에 투철한 면이 있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물론 광해군 당시의 양다리 외교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임진왜란 때 열심히 싸운 거며, 대동법 실시한 것들을 보면 북인이 참 괜찮았다 싶습니다. 그런데도 권력을 잡으면 또 저렇게 대북과 소북과 중북이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 아— 저게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과 남인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다

인조반정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성공한 쿠데타였습니다. 광해군이 명과의 의리를 버리고 양다리외교를 했다,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였다, 임금감이 안된다고 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사례입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왕은 인조이지만, 실세는 서인과 남인의 연합 세력이었습니다.

인조가 왕위에 올라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이괄의 난은 복잡한 내막이 있지만 결국은 권력을 잡은 서인과 남인이 누가 더 공을 세웠나를 내세우며 더 많은 권력을 잡기 위한 다툼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서로 상대방이 북인이나 광해군과 연결되어 있다고 뒤집어 씌우며 서로를 탄핵하고 자리 다툼을 하였습니다.

남인에 비하여 제1당처럼 많은 권력을 잡았던 서인은 청서와 공서, 노서와 소서, 원당과 낙당 등으로 나뉘다가, 산당과 한당으로 크게 나뉘어집니다. 이게 인조, 효종 당시의 일입니다.

예송논쟁 ; 서인과 남인이 학문논쟁을 하다가 권력싸움을 하다

그리고 현종이 즉위하자 서인과 남인 간에 예송논쟁이 벌어져 1차에서는 서인이 이기고, 2차에서는 남인이 이깁니다. 둘째 아들인데 왕이 된 효종이 죽었을 때, 이 효종을 왕이기 때문에 맏아들 대우를 하여 3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게 남인의 주장이었고, 아무리 왕이었어도 집안에서 둘째이면 둘째로 대우하여 1년상을 치러야 한다는 게 서인의 주장이었습니다. 이걸 가지고 온갖 공자님 맹자님 말씀을 갖다 증거로 들이대고, 이런 저런 해석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사례들을 갖다 대며 논쟁을 하였습니다.

이런 논쟁을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 교수들이 서로 논문을 쓰면서 하면, 학계에 저런 의견 차이가 있구나— 하고 말텐데, 이걸 권력 투쟁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1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이겼을 때, 남인이 대거 쫓겨났고,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이 이기자 서인을 대거 쫓아냈습니다. 이제 감정이 악화될대로 악화됩니다.

이거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여러분 어릴 적 싸우는 거랑 비슷합니다.

A : “니가 먼저 때렸잖아?”

B : “아니, 니가 먼저 나한테 욕했잖아?”

A : “그건 니가 나한테 화내서 그런거야.”

B : “너는 지난 번에도 그랬어.”

이제 옛날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그러다가 상처 받는 말이 나오지요.

A : “그 땐 장난으로 그런거야.”

B : “장난이 아니라 일부러 그런 거였어.”

A : “너, 나 의심하는거야?”

B : “내가 너 의심 안하게 생겼어? 왜? 찔리냐? 내가 틀린 말했어?”

A : “뭐라고?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왜 이러는 걸까요? 서로 서운한 감정이 풀리지 않고 쌓여왔기 때문입니다. 서운한 감정은 왜 생겼을까요? 이해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쪽이 이익을 보았을 때,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치권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정치권도 다르지 않습니다. A쪽이 대통령을 하면서 그 이전 장관 중에 유능한 사람이 있지만, 재정기획부나 국토건설부나 외교통상부나 요직이라고 생각되는 자리에는 좀 무능하더라도 자기 사람 심복을 임명합니다. B쪽에서는 수군수군 욕을 하지요. 하지만 그저 그런 장관 자리에는 옛날 사람도 유능하기만 하면 그대로 둡니다.

다음에 B쪽에서 대통령이 되면, 모든 장관을 다 자기 사람으로 임명합니다. A쪽은 엄청 열받지요. 자기들은 요직은 자기 사람을 썼지만, 요직 아닌 자리는 그래도 양보를 했다는 거지요.

다음에 다시 A쪽에서 대통령을 하게 되면 B쪽 장관들이 재직하고 있을 때 비리가 있었다고 검찰 조사를 합니다. B쪽에서는 난리나지요.

그 다음에 다시 B쪽에서 대통령을 하게 되면, A쪽 사람들이 다시는 공무원이 될 수도 없게 심한 재판 결과가 나옵니다.

이 쯤 되면 막가자는 상황이 됩니다. 이제 상대방이 하는 말과 행동은 모든 것이 자기를 욕하려고 의도적으로 하는 나쁜 일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권력과 중요 직책과 명예와 자연스레 돈이 따라 다니는 자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가지고, 은근히 한쪽 편을 들면서 거기서 자기도 이득을 보고 그러면서 같은 편이 되어가고, 그러면서 점차 편 가르기 규모가 커져갑니다.

경종 때 정권을 잡은 소론이 분열하다

숙종 때까지 대개 노론이 권력을 잡았는데, 경종 때 잠시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던 연잉군(경종의 배다른 동생. 후에 영조가 됨)을 경종의 후사로 정해야 한다고 하고, 그래서 연잉군이 세제(世弟)가 되자, 이번에는 이 세제가 경종 대신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세제의 대리 청정 주장은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로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노론의 4대신을 파직할 뿐만 아니라 거제, 남해, 진도 등에 유배를 보냅니다.

그러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4대신의 자식들이 경종을 시해할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사형 20명, 맞아 죽은 사람이 30명, 가족이라는 이유로 잡혀 죽은 자가 13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이 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걸 삼급수 고변이라고 하는데, 소론은 이 역모 사건을 정치적으로 충분히 이용하여, 노론의 목줄을 끊어놓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니 노론은 또 얼마나 소론에 대하여 이를 갈고 칼을 갈았겠습니까?

이 와중에 소론 내부에서 노론을 끝까지 씨를 말려야 한다는 급소(急少)와 너무 심하게 다루면 안된다는 완소(緩少)가 나뉘어지게 됩니다. 참 어이없지요? 소론은 솔직히 정권 잡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정말 조선은 그만두고 소론 자신을 위해서라도 잠시 정권 잡았다고 이렇게 분열되면 도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겠어요?

사도세자의 죽음과 벽파-시파

영조는 노론이 밀어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영조가 52년간 재위하고 정조가 24년간 재위하니, 둘의 재위 기간이 70년이 넘습니다. 이 둘이 탕평책을 제대로 했으면 나라가 좀 좋아졌을텐데,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잠시 덮어두는 정도 이상이 되지 못했으니, 당파의 원한과 뿌리가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허수아비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기 아들인 사도세자를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을만큼 노론의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노론의 신하들이 왕이 자기 아들을 죽이도록 만들 정도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궁녀 하나하나부터 여론 조작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권력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노론의 상대는 이제 소론이나 남인이 아니라 왕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인 영조 자신은 아니었지만, 왕이 자기 아들을 스스로 죽이게끔 만들었으니, 노론이 영조와 싸워 한판 이겼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웃긴 것은 사도세자를 죽이고나서 노론이 분열하는 것입니다. 죽이기를 잘했다가 벽파(僻派)이고, 그건 너무 심했다가 시파(時派)입니다. 이 시파에는 노론의 일부와 소론, 남인이 합류하였다고 합니다.

영조는 이렇게 심한 일을 당하고도 52년간 왕을 하다보니, 이것들이 나를 가지고 놀아도 너무 가지고 노는구나— 하며 조금씩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말 미미하게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실상 영조의 탕평책은 그리 큰 실효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함부로 대놓고 당파싸움을 하지 못할 정도라고나 할까요? <계속>

필자소개
한때 전교조 중앙에서 교선실장을 했었고 또 오랫동안 전교조 서울남부지회 지회장을 맡았다. 지긍은 영림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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