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총파업만이 진짜 민주주의 가져와
        2008년 09월 23일 08: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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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포스트에서 제가 한국에서의 ‘시민 사회의 결여’를 언급하자 댓글을 다신 여러 분들께서 이 의견에 대한 반대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해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 필자

    만약 시민사회를 김순혁 교수(The Politics of Democratization in South Korea: The Role of Civil Society, 2000)의 정의대로 "국가와 생산관계로부터 자율적인, 그리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각자의 이해관계를 표방할 수 있는 단체들의 집합"이라고 본다면 한국에서는 분명히 시민사회가 있는 것이고, 그 계보를 독립협회나 신간회, 그리고 1970년대의 ‘재야’로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강성국가와 전투적 시민사회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러한 단체의 절대적 부재가 아니라 한국 지배계급의 현존의 통치 방식이 이와 같은 시민사회라는 매개체보다 대자본과 관료집단의 이해관계를, 많은 경우에는 단순한 물리력을 통해서 관철시키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시민사회단체들의 맹활약이 분명히 관찰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권력의 주먹’, ‘노골적인 권력 행사'(naked power)가 아직까지 통치 행위의 중대한 – 거의 핵심적인 – 부분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초의 구해근 교수(하와이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강성 국가와 전투적 시민사회가 제도화돼 있는 길항관계에 처해 있다"는 것인데, 이 길항 관계에서는 어디까지나 시민사회의 ‘말’보다 권력의 ‘주먹’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역사를 따져봅시다. 한국의 최초의 근대형 시민 단체인 독립협회가 처음 결성됐을 때에 그 수장은 정부의 고문인 서재필이었고, 그 후원자 중의 하나는 대세가 어디인지를 늘 잘 아는 이완용 같은 만고의 출세주의자이었습니다.

    이완용이 같이 놀아도 될 만큼 그 단체는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익찬’, 즉 왕권을 보필해주면서 문명개화를 실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1898년초에 고종에게 이미 위협으로 보였던 러시아의 간섭을 독립협회가 대신 규탄하는 등 사실상 ‘왕권의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해주었을 때에 박수를 많이 받았지만 같은 해 가을에 헌의 6조를 만들고 국내 통치 방식의 약간의 변경까지 요구하자 과연 어떻게 됐는가요?

    구한말 시민단체의 태생적 한계

    왕실 세력들에게 곧 박살나고 만 것이었어요. 그게 구한말 체제에서의 ‘시민 단체’의 태생적인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왕실에도 부담이 되는 외세를 대신 때려주면 괜찮았지만 통치 과정에 직접적 개입을 하면 곧 죽는다, 이것이었습니다.

    일제 때에 구체적 내용은 꽤 다르지만 유형적으로 비슷한 광경은 다시 재현됐습니다. 신간회는 좌우익을 망라한 3만9천 명 회원의 막대한 ‘전민족적 시민단체’였지만 ‘민족의 공동 이익 실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인 행동, 즉 광주학생운동 탄압에 대한 조사를 벌이자 그 주도자들이 당장 잡혀가는 등 탄압에 부딪쳐 물러서야 됐습니다.

    나중에 신간회 해산 이야기가 나올 때에 해산의 이유로 자주 거론됐던 것은 ‘뚜렷하게 하는 활동이 없어서’였습니다.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구호에 비해서는 활동은 많이 모자랐지요.

    뭐, 통치 행위를 통치자 그룹이 절대적으로 독점한 상황에서는 안그럴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한 상황에서는 말이 아닌 ‘액션’을 하는 게 파업을 조직하는 지하 공산서클들이지요. 그들이 ‘위’의 노골적 권력 행사에 ‘밑’의 반권력적 물리력의 행사로 실제로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구해근 교수의 말대로 해방 이후의 남한의 시민 사회의 존재의 이유는 권력과의 길항 관계, 즉 각종의 ‘저지/반대 운동’들이었습니다. 한일 굴욕 외교의 저지부터 유신 반대, 1987년의 독재 반대까지 말씀입니다.

    ‘반대 운동’의 한계

    그런데 독재 기간 동안 실질적 국정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소외돼온 재야는 많은 면에서 참 취약했습니다. 반대, 즉 ‘나쁜 놈 끌어내리기’를 꽤 잘 했지만, 개인을 중심으로 한 파벌로 구성된 관계로 내부 통일성이 없어 1987년에 김대중, 김영삼의 경쟁으로 집권에 한 번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다가 현실적, 계급적 대안의 부재까지 겹쳐져 문제였습니다. 예컨대 김대중 선생의 ‘참여경제론’은 어디까지나 ‘모두들에게 좋은 자본주의’에 대한 듣기 좋은 ‘국민적 이야기’ 수준인데, 자본주의는 – 특히 한국적, 준주변부적 상황에서 – 사실 모두들에게 좋을 리는 없습니다. 결국 김대중이 신자유주의적 관료와 대자본에게 백기를 든 게 그러한 측면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어요.

    1998년, 김대중의 집권은 100년 만의 한국적 시민사회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반쪽의 승리 (김종필과의 동상이몽적 동거를 의미합니다)는 곧 패배로 판명됐습니다. 정부에 들어간 재야 출신들은 기존의 권력관계망에 포획돼 모범적 신자유주의자가 됐으며, 보안법 철폐와 같은 시민단체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들은 다 관철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2000년에 낙선 운동의 이름으로 그 ‘끌어내리기 게임’을 다시 한 번 화려하게 해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시민사회 요구 관철의 차원에서는 새 국회도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 뒤로는 시민 사회의 기대를 한 몸에 담은 것은 노무현이었지만 이건 거의 희극적 수준의 실패작이었습니다.

    시민사회의 대다수가 반대했던 모든 일들 – 이라크 파병부터 한미자유무역협정까지 – 노무현이 막무가내로, 토론하는 시늉만 하면서 다 해낸 것이었습니다.

    촛불, 시민사회의 대규모 저지 캠페인

    시민사회 지도자 중에서는 유시민씨처럼 정권의 요직에 오른 이들은 철저하게 ‘권력형 인간’으로 개조(?)됐지만 권력과 그 만큼 깊은 관계를 가지지 못하거나 가지지 않으려는 이들은 권력 언저리의 각종 ‘과거사 위원회’에서 과거 처리나 하거나 그냥 이를 갈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끌어내리기’ 만큼 잘하는 시민사회는, 통치 주체 중의 하나가 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으로서 그 시민사회의 대표자 중에서 권력자가 된 이들도 있었지만 시민사회의 의제를 갖고 권력 행위를 하는 게 아니었음은 두말할 게 없습니다.

    시민사회의 마지막의 대규모 ‘저지’ 켐페인은 지난 번의 촛불집회이었는데, 노동자, 비정규직 운동과의 유기적 관계 만들기에 실패해 대규모의 대중 동원에 성공해도 ‘저지’ 그 자체를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산 쇠고기는 계속 수입되고, 유모차를 이끌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데모했던 어머니들이 이제 경찰들의 수사에 시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석행 위원장부터 수사 대상이 된 반이명박 누리꾼이나 사노련 운동가까지 지금 "naked power", 국가적 주먹의 쓴 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대환 님께서 ‘가슴을 열고 민주화된 조국을 인정하자’ 하시지만, ‘조국의 민주화’는 아직도 데모를 한 번 해본 어머니에게 도로 불법점거를 들이대며 마구 괴롭힐 수준의 ‘유사 민주주의’입니다.

    비정규직 관련 법률 제정 과정에서 비정규직이 많은 주요 노조 대표자들의 의견까지 대거 수렴되는, 매년 임단협을 중앙의 노총과 경총이 중앙적 협상으로 시작하는 그러한 ‘진짜 민주주의’, 즉 시민사회를 통치 영역으로 끌어들여 노동자 조직들에게 일부분의 권력을 할양하는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아주 먼 꿈입니다.

    그 꿈을 이루자면 수많은 파업들이 필요할 것이고, 결국에 온 나라를 총파업과 데모로 마비시킬 만큼의 ‘비폭력적 실력 행사’도 필요할 듯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거든요. 진짜 민주주의도 복지국가도 그 ‘구태의연한’ 노동자 투쟁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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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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