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실패가 자유주의 불러들여"
    2012년 01월 16일 12: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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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레디앙

진보의 실패가 자유주의 불러들여

– <레디앙> 신년인터뷰를 통해 최장집 선생님의 경우 ‘자유주의(의 재발견)를 통한 민주주의의 풍부화’ 기획을 말씀하시면서 ‘진보적 자유주의’에 주목한 바 있다. 최근 자유주의는 본래 진보적이거나 혹은 그럴 수 있다는 견해들을 모은 책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가 나왔다.

이런 내용 가운데에는 신자유주의의 대안 이념으로서 진보적 자유주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자유주의는 다르다는 견해도 있다. 최근 자유주의 담론이 부각되고 있는 배경이 무엇이라고 보나? 그리고 자유주의,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말씀해주신다면?

= 최근 자유주의 담론이 부각되는 이유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진보의 실패에 따른 결과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이라는 것이 대표적 자유주의 정권으로 제대로 자리잡은 최초의 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초의 일이다. 4.19 이후 장면 정권이 있긴 했으나 너무 짧아서 평가하기가 어렵다.

신자유주의의 정책으로 인해 자유주의는 파탄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진보정치 세력이 성장할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에 따른 자유주의 복원하려는 노력이 생기고 있다.

두 번째는 이명박 정권 이후 자유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반공이라는 부정적인 차원이 아닌 자유주의를 불러들이려는 움직임이 생긴 것이다.

자유주의 진보적일 수는 있지만

이 같은 현상에 대한 나의 평가는 양면적이다. 물론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분리 가능한 것인가, 환원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은 논쟁이 가능한 대목이다. 학술적 수준의 논쟁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이 환원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고 본다.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과잉이 문제가 아니라 부족이 문제다. 국가보안법, 사이버 공간의 검열 등 아직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다. 흔히 얘기하는 UN이 정한 자유권도 제대로 궤도에 올라와 있지 않은 사회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당연히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보고,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는 중요하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우리가 정치적 자유주의를 말할 때 먼저 밀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에 대한 탁월한 견해를 가졌다. 특정한 판단에 대해서 우리가 틀렸는지, 안 틀렸는지 알지 못할 수 있으며, 설령 틀렸다 해도 그 견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했다. 이러한 정치적 자유주의는 뛰어난 진보적 측면이 있다.

하지만 밀의 경우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동시에 보통선거에 대한 극렬한 반대 입장도 나타냈다. 부자나 기업 가진 사람에게는 4표를 주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노동자들 같은 무식한 사람들 에게는 1표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에는 반민주성 내장돼 있다.

물론 자유주의는 진화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초기 자유주의, 다시 말하면 (자유방임을 주장하는)경제적 자유주의는 그 이후 미국에서 뉴딜 정책을 집행하던 리버럴(자유주의)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신자유주의 놔두고 정치적 자유주의 유지 어려워

두 번째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관계 문제다. 그 둘은 다른 것이다? 좋다. 다르다고 하자. 하지만 정치적 자유주의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다. 경제체제는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놔두고, 여기에 정치적 자유주의가 결합된다면 과연 그것은 얼마나 진보적일까?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폐해를 그대로 놔두면 정치적 자유주의 자체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반민중적이고 집회와 시위 자유를 억압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권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두 명의 농민이 집회 중 ‘공권력’의 폭력에 의해 사망했다. 왜 그런가? 이는 신자유주의에 따른 정치 사회적 갈등이 자유주의의 토대를 잠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현연 교수.(사진=레디앙)

나는 그것이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유권 가지고 있는 문제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현실 사회주의자들이 자유권과 관련돼 제대로 전범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보비오나 로버트 달 같은 학자들은 이런 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로버트 달은 자유주의, 다원주의의 ‘챔피언’인 미국의 자유주의가 얼마나 좋은지 얘기하던 사람이었다. 한데 그는 지금 완전히 사회주의자가 됐다.

자유주의에서 출발하고 미국 최고의 학자가 점점 변화해가면서, 소련과 동구의 몰락 이후 더 ‘좌경화’됐다는 사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간 지식인

그가 자유주의를 벗어나 사회주의로 간 중요한 이유는 자본의 힘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자유주의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이 자유사회주의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그렇고 우리가 더 고민을 해야 할 주제라고 본다.

우리가 자유주의와 관련해서 국가보안법 얘기를 하지만, 이념으로 자유주의와 정치체제로서의 자유주의는 분리되지만 또 같이 가기도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자유를 얘기하지만 그 자유주의가 경제체제 문제와 충돌할 경우, 예컨대 사유재산권이나 경제체제에 위협이 되면 언제든지 그 자유는 되돌려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밀의 보통선거에 대한 태도나, 미국 부시 정부 당시 나타난 것처럼 선진국에서도 경제적 어려움이나 테러 등에 대한 대책으로 자유가 후퇴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발리바르는 자유와 평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로 같이 가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평등 없는 자유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 최장집 선생님의 경우 한국사회에서 역사적으로 고착화된 이데올로기 지형의 폐쇄성과 그로 인한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진보파가 지향할 최대치는 사민주의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선생님께서는 2002년에 출간한 󰡔근대와 탈근대의 정치학󰡕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저 자신을 진보적 정치학자, 굳이 더 분류를 하자면 모든 억압과 착취, 차별과 배제에 반대하는 ‘열린 마르크스주의자’, ‘비판적 좌파’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열린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

= 사회주의, 사민주의부터 페미니즘이나 녹색주의, 하다못해 다양한 포스트 주의들은 서로 결합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념 그 자체보다 모든 억압, 착취, 차별, 배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

사회주의가 불가능하고 한국의 현실에서 사민주의가 얻을 수 있는 최대치라는 의견에 대한 나의 답은 그럴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적 분석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 상당히 있다.

사민주의 주장한다고, 사민주의 되는 거 안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사민주의 주장한다고 사민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를 주장해야 그나마 사민주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의 사민주의는 사민주의자들이 떠들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역사는 다양한 의지들의 힘의 벡터를 통해 이뤄진다. 우리에게 허용될 수 있는 것, 또는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것이 사민주의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략이나 요구를 사민주의 수준으로 낮춰서 주장하라는 것은 잘못이다.

비유적으로 얘기해보면, 로마 시대에 가능한 최대치는 무엇이었을까? 예컨대 스파르타쿠스는 그럼 노예해방 이야기를 하지 말고 ‘인간적 노예주의’를 얘기해야 된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최장집 선생의 얘기도 분명히 맞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방금 말한 것처럼 다양한 세력들의 힘의 벡터이기 때문에 다양한 이해와 전망들을 가지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노예해방 꿈꾸면 안되나

–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 한국 사회만이 아니다. 한국사회가 반공 사회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사회주의가 가능하냐고 물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대답하겠나. 얼마나 긴 시간을 가지고 얘기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만약 백년 후에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90년이 지난 다음에야 떠들어야 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공산주의는 앞으로 이뤄질 체제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대한 반대 운동이라고 하는 데 나는 그게 맞다고 본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능하냐는 다른 얘기라 본다.

“불가능을 꿈 꿔라”는 노래 가사도 있다.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줬고, 기억에 남아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당시 만들었던 정치 광고의 배경음악은 존 레논의 ‘이매진’이었다. 우리에게 상상력과 꿈이 없을 수 없다. 스파르타쿠스는 노예해방 꿈꾸고 그것을 말하면 안 되는 것인가.

   
  ▲사진=레디앙

– 선생님께서는 “나는 진보의 핵심에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에 대해 지난해 말 장은주 교수는 “이런 진보 개념은, 단순히 오래 되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새롭고 변화된 상황과 조건에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하는 데서 별다른 ‘실천적 합리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말씀해주신다면?

차라리 민주당하고 합당을 하든지

= 지금 통합진보당이라고 하는 3자 통합당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진보냐, 보수냐 하는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탈당파 그리고 국민참여당의 통합은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봤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진보에 대한 보수적 생각이라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나의 주장은 진보세력이 중심이 된 진보대연합에 기초해서 통합진보정당이 먼저 들어서고, 그 이후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함께 하는 통합자유주의정당이 만들어져서 이 둘을 토대로 반MB, 반한나라당으로 가자는 게 첫 번째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아예 민주당과 대통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최소한 신자유주의 문제, 복지와 통상 문제에 관한 한 민주당이 국민참여당이나 유시민보다 진보적이기 때문이다. 이게 왜 보수적 논리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를 어떻게 볼 거냐에 대해 잠깐 얘기를 해보자. 이미 전에 글로 쓰기도 했지만 네 가지 기준이 있다.

첫 번째는 변화에 대한 태도이다. 변화에 대해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나눌 수 있다. 변화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면 수구다.

그렇다면 이 기준으로 하면 5.16은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진보였다. 하지만 그 변화의 내용이나 방향은 잘못된 것이다.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당시 미국에서는 미국은 소련 공산당을 보수파 불렀는데, 이념적 배경과 상관 없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4가지 기준

두 번째 상대 평가로 보수와 진보는 서로 상대적인 것이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후보가 가장 진보적이었고, 박근혜 후보가 가장 보수적이었다. 민주당은 진보적이고, 한나라당은 보수적이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은 진보적이고 공화당은 보수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할 경우 미국과 같이 보수 양당제가 안착된 나라와 유럽처럼 계급정당이 있는 곳과 구별이 안 된다. 무솔리니가 히틀러보다 덜 보수니까 상대적으로 진보라고 부를 수 있나? 문제가 있다.

세 번째는 절대 평가다.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시장과 자본주의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사민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게 진보고,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주의는 보수다.

그런데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로 다 환원되지 않는다. 요즘은 젠더, 녹색, 동성애 같은 문제들이 등장했다.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페미니스트 여성 잡지인 <이프> 편집장은 국민승리 21의 권영길 후보가 아니라 박근혜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장 진보적인 남성후보보다 가장 보수적인 여성후보가 더 진보적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세 번째와 네 번째의 결합이 옳다고 본다. 뭐라 해도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모든 것이 거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이다.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핵심

장 교수 얘기는 내가 계급 환원론적 입장에서 젠더라든가 동성애 문제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진보이 기준이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와 자본 중심으로 진보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상황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보편적 복지를 중심으로 놓고 보자는 건데, 그게 바로 시장과 자본주의 문제점을 보는 거 아니냐. 내가 다른 것을 다 버리고 사회주의만 얘기했다면 그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사민주의나 복지 같은 것을 다 포함한 개념으로 진보라고 했는데, 왜 그런 비판이 나오는지 이해가 안 간다.

실천적 합리성이라는 것이 구체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말한 것을 다시 비유하자면 스파르타쿠스는 노예해방을 떠들었기 때문에 ‘실천적 합리성’이 결여돼서 보수이고, ‘노예제도의 인간화’를 말하면 진보인가. 그가 말하는 실천적 합리성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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