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 행복한 예술가 또는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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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06일 12: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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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보신당 문화예술위원회(준)와 문화연대, 칼라TV의 공동주관으로 지난 12월 3일에 열린 문화예술인 집담회 ‘밥 먹고 예술 합시다’가 열렸다. 이 글은 당시 집담회에 토론자로 참여한 극작가 박새봄 씨가 보내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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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극작가다

    나는 ‘극작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작가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내가 별로 뛰어난 성공을 거둔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첫 번째 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이십대 중반에 등록금이 비교적 싼 어느 예술학교에 들어가 4년간 극작을 공부한 후, 십수 년째 ‘극작’을 생업으로 삼아 근근이 살고 있는, 서른 아홉 살의 비혼 여자 극작가다.

    90년대 말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주로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무대 공연을 위한 대본을 써왔고, 그것들 중에는 수년간 공연되며 대중적으로 조금 알려진 작품이나, 혹은 꽤 그럴듯한 극장에서 화려하게 공연된 작품도 있지만, 더 많은 작품들은 그저 작은 극장에서 얼마간 공연된 후 잊혀졌다.

    가끔 기회가 있을 때는 영화 시나리오나 다큐멘터리 대본과 같은 다른 매체를 위한 텍스트를 쓰기도 했다. 또 나는 대학에 적을 두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도 아니며, 예술대학 입시를 위한 ‘사교육 시장’에서 돈벌이를 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십년 이상 계속 줄기차게 무엇인가를 써왔고, (그것이 예술적으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쓴 텍스트에 대한 보수 즉, 작가료를 받아 생계를 유지해온 ‘전업 작가’다.

    우울하다. 그러나 행복하다

    내가 이처럼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전업 작가’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작업 기회가 계속 이어져왔기 때문이고, 매우 다행스럽게도 ‘작가’라는 직업의 가치를 인정하여 내 경제적 무능력 상태를 크게 탓하지 않는 가족과 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후는커녕, 겨우 몇 달 후의 생계까지 걱정해야 하는 불안과 막막함이 늘 함께하지만, 그래서 가끔은 사는 게 매우 두렵고 우울하지만, 그래도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전업’ 작가로 사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 없게도 나의 현재가 행복하고 약간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생계형 전업 작가’인 내가 ‘예술가’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언젠가부터 ‘예술’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도 않고, 나 자신을 ‘예술가’로 소개하는 게 낯설고 어색하다. 심각한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은 보통의 창작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내 작품이 정말 예술인가?’ 하는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예술’이란 말은 늘 나를 조금은 불편하게 한다. 그동안 내가 쓴 모든 작품이 예술적일 리가 없다. 어떤 것은 형편없고, 어떤 것은 그보다 좀 나을 뿐이다. 치기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예술’이라는 말은 언제나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러나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내가 매우 의식적으로 ‘예술’이라는 단어를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예술’이라는 말이 곧잘 ‘노동’의 가치를 부인하고 은폐하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창작자로서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작업에 대한 적절하고 마땅한 보상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보상받아야 마땅한 ‘작업’의 범위를 ‘작업의 결과물’이나 ‘작업 결과물의 예술적 가치’로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부터는 매우 많은 질문이 필요해진다.

    예술의 결과와 과정

    모두가 인정할만한 매우 훌륭한 예술적 가치를 가진 작품에만 보상을 하는 것이 마땅한가? 그렇다면,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을 생산한 예술가의 작업은 보상할 가치가 없는 노동인가? 자기 작업에 대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예술가는 실패한 예술가로서 그저 자신의 예술적 무능을 탓하며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다른 일을 찾아봐야 옳은가? 그리고, 실제로 이 모든 ‘보상’의 기준과 잣대가 되는 ‘예술적 가치’의 높고 낮음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 판단들은 언제나 객관적이고 본질적이며 올바른가?

    지속 가능한 작업을 바라는 생계형 작가인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작업의 결과물인 ‘작품’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아니라 작업의 과정인 ‘집필’에 대한 보상이다. 아니, 이 말은 오해가 있을 것 같으니 다시 말해야겠다.

    작품의 생산과정, 즉 보이지 않는 작업과정에 들어있는 예술가의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노동’의 가치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라면, 작업의 결과물인 작품에 대한 예술적 가치 역시 제대로 평가해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기 전에는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사회에서 예술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취미로 소일거리 삼아 예술창작을 하는 사람이거나, 대단히 운이 좋아 노동하지 않고도 생계를 걱정할 형편이 아닌 사람들 외에, 모든 예술가들에게 가혹하고 절망적인 조건이다. 단박에 스타로 추앙받지 못하면, 생계를 위한 노동과 예술을 위한 노동 두 가지를 함께 병행할 수 있어야만 예술가로 살 수 있다니.

    상품가치가 없는 작품을 생산한 예술가, 결과가 어찌될지 아직 모르는 작업과정에 있는 예술가들은 모두 일차적으로 자신의 생계를 자신의 작업 이외의 노동으로 해결해야하는 과로에 시달리고 있거나, 절망하여 자신의 예술을 포기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예술가들의 ‘작업’도 노동이다

    예술가들의 ‘작업’도 노동이다. 그것이 단지 눈에 바로 보이는 이윤을 창출하지 못할 뿐, 엄연히 숙련된 노동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지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노동으로 생산된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높기를 바라는 것, 심지어 더 많은 시간, 더 집요한 숙련을 거쳐 보다 훌륭한 작품을 생산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뻔뻔하고 욕심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이미 산업화되어 있는 예술 분야에서조차 ‘예술과 가난’, ‘예술과 고통’을 제법 그럴싸한 낭만적 수사로 엮으면서 예술가들 개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예술’이라는 말 자체에 저항감을 가지게 되었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를 소외시키고 내 삶을 외면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 어떤 예술가도 항상, 매번,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을 생산할 수는 없고, 어떤 작품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평가 역시 획일적이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게다가 어떤 예술 작품이 ‘이윤을 창출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높이 평가 받고 후하게 보상하는 것은 그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어떤 상품에 가격을 매기는 것 뿐, 예술의 발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미 있는 선택과 도태의 결과도 아니다.

    전대미문의 천재예술가 한사람이 한 시대의 예술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아닐진대, 수많은 무명의 예술가들이 생산한 결핍과 결함을 가진 다양한 작품들이 한 시대의 문화와 예술의 기반이자 토대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상품성이 확인된 예술 작품에만 보상이 주어지는 것,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모르는 씨앗 상태의 예술가들을 전혀 책임지거나 보호할 생각이 없는 사회에서 칭송되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대체 무슨 뜻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세상이 내 예술적 가치를 몰라준다며 토라져서 그만 포기해버리는 예술가가 되기도 싫었고, 적절한 보상과 인정 없이 그저 자기만족만으로는 이 직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가 없었기에, 나는 최대한 내 ‘작품의 예술성’ 보다는 내 ‘작업 결과물에 들어간 노동의 가치’를 먼저 정당하게 평가받으려고 애써왔다.

    예술가의 고집과 노동자의 타협

    나 스스로 ‘나는 예술가가 아니라 극 텍스트 생산 노동자다’라고 되뇌면서, 그리고 ‘노동자’에 걸맞은 작업방식으로 작품을 생산해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예술가로서의 자존감도 많이 상처를 입은 것이 사실이다. 예술가로서 고집하기보다는 노동자로서 타협해야 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개뿔! 겨우 이런 거나 쓰고 있는 내가 무슨 예술가냐’ 하며 숱하게 자학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망은 “무명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전업 작가’로 살다가 죽고 싶다”는 것이다.

    지난 십여 년 극작가로 살아오면서 내 ‘삶’과 내가 원하던 ‘예술’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데 많은 부분 실패했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여전히 무언가를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여전히 쓰고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그것이 얼마나 예술적이든 아니든, 생계를 유지하며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이 가장 간절한 바람이라는 것이 사실 좀 슬프다. 그리고 최소한의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어서 그 하나의 바람조차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으로 슬픈 일이다.

    예술과 예술가들의 노동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어, 더욱더 사적이고 예술적인 고민과 작업에 전념해도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기틀이 마련된다면, ‘무명이라도 좋으니 작가라는 직업으로 살다 죽고 싶다’는 나의 불안한 소망은 성큼 가까운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오래, 더 깊게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까’하는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예술 분야에서 그렇게 행복한 예술가들이 많아진다면, 그들이 생산하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작품들이 결국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거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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