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자 통합당은 진보정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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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1월 24일 03: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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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아래서의 복지국가’를 강령으로 내건 3자 통합당

민주노동당과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가 결국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과 통합하여 ‘통합진보정당’을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지난 9월 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안을 부결시켰던 민주노동당 당대회의 결정은 아예 없었던 것인 양 무시되었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통합연대 지도적 인사들은 국민참여당은 진보대통합의 대상이 될 수 없다던 두 달 전의 선언을 180도 뒤집어버렸다. 민주노동당은 당대회도 열기 전에 통합당의 당명 공모를 시작했다. 이제는 숨김도 없이 공공연하게 당대회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인준 절차에 불과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보수정당들의 보스정치, 붕당정치를 비판하며 당내 민주주의를 내세워 왔던 진보정당의 모습인가?

진보정당? 그렇다. 우리는 지금 3당 통합으로 만든다는 ‘통합진보정당’이 정말로 ‘진보정당’인가를 물어야 한다. 앞서 말한 절차와 과정상의 문제도 물론 진보정당의 매우 중요한 원리요, 구성요소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진보정당의 ‘진보’는 단순한 정책적 차별성을 넘어서 노동자•민중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로 나선다는 의미와 그렇게 되는 과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르주아 포퓰리즘의 정치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3자 통합에 이르는 절차와 과정이 얼마나 ‘진보’에 반하는 것인지에 대해 더 이상 구구절절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긴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대신 여기에서는 이 ‘통합진보정당’이 ‘진보’에 값 하는 이념적,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세 정당•정파는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발표하면서 ‘통합진보정당 강령’을 내놓았다. 이 강령은 진보정당으로서의 당의 정체성과 이념적 지향을 총괄적으로 밝히는 부분이 없이 40여 개 항목으로 된 일종의 행동강령 내지 정책 과제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강령의 제1항이 사실상 40개 항 강령 전체를 총괄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강령 제1항은 “출산, 보육, 교육, 의료, 주거, 노후, 장례 등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애주기별 공적 사회서비스를 확대해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질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편적 복지사회를 실현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하 여러 항목에 걸쳐 이 ‘보편적 복지사회’를 구성하는 세부 내용들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강령의 성격은 과거 민주노동당 강령은 물론 진보대통합 논의 과정에서 도출되었던 5.31 합의문과 비교해 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그 전문에서 “민중이 주인되는 진보정치를 실현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등과 해방의 세상으로 전진해 나갈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또한 “국제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인류의 오랜 지혜와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의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인류사에 면면히 이어져온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다”라고 명시했다.

다시 말해 적어도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다소 추상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주의의 지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런 추상성은 현실운동의 발전과 더불어 구체화되고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5.31 합의문은 그 첫 항에서 진보대통합으로 설립될 진보정당은 “우리나라와 세계 변혁운동의 이상과 역사적 성과를 계승하고 자본주의의 한계와 폐해를 극복하며 진정한 자유, 평등, 자주, 평화, 복지, 생태, 인권, 소수자 권리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는 새로운 대안사회를 건설”할 것이라고 그 지향을 밝히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지향해 나간다는 명시적인 표현을 빼버림으로써 민주노동당 강령보다 분명히 후퇴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자본주의의 한계와 폐해를 극복’한 ‘새로운 대안사회’를 건설한다는 방향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3자 통합당의 강령에는 ‘자본주의 극복’과 ‘새로운 대안사회 건설’의 지향이 완전히 사라지고 ‘보편적 복지사회’만 남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이 당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의 복지국가 또는 복지사회’를 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념적 좌표로 삼는 당인 것이다. 사회복지의 대폭적 확대가 진보정당의 당면한 행동강령 또는 정책 과제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의 복지국가, 즉 ‘복지주의’를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념적 좌표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런 복지주의를 궁극적 목표이자 이념으로 삼는 정당을 과연 진보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 20년이 가져온 기억상실증? 역사적으로 복지주의는 진보정당의 이념이 아니었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복지주의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그리고 노동조합을 포함한 진보세력 내에서 꾸준히 세를 확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지주의 흐름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별로 없었다. 복지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극단적인 양극화와 삶의 파괴가 복지의 대폭적 확대를 절실한 요구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선의를 가지고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선의가 언제나 그것의 올바름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더구나 복지에 대한 요구를 넘어 진보운동의 전망을 복지주의의 틀에 가두어 버리는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명백히 진보에 반하는 반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의 복지국가’로 요약되는 복지주의의 이러한 반동적 성격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복지주의를 진보적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어떻게 등장하고 또 어떻게 쇠퇴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서구 자본주의에서 복지주의가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말 독일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 입법을 통해서였다. 이 사회보험 입법과 병행된 것이 ‘사회주의자 탄압법’이었다.

즉 복지주의는 그 출발에서부터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운동을 제압하기 위한 ‘당근과 채찍’이라는 양면 전략의 한 날개로서 등장했다. 사회주의자 탄압법과 병행된 이 사회보호 입법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은 독일의 우파인 국민자유당이었다.

20세기 들어 복지국가의 이념을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복지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영국의 ‘비버리지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 입각한 사회보장제도가 실현된 것은 전후 노동당 정부에 의해서였지만, 비버리지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보고서를 제출하게 만든 것은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 중심의 전시내각이었다.

비버리지 보고서 이후 서유럽에서 복지국가는 케인스주의라고 불리는 전후 서구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이 케인스주의-복지국가 체제의 요체는 대공황과 제국주의 상호간의 전쟁,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성공과 서유럽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 등으로 표출된 자본주의의 총체적 위기를 노동자계급을 개량주의적으로 포섭함으로써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복지주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에 대응하는 예방혁명 전략으로서 자본주의를 지키려는 ‘보수’의 성격을 띠고 등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복지주의는 자본주의 극복의 전망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개량에 안주하게 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노선이었을 뿐 아니라 보수주의 자본가 정당의 노선이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재탈환한 영국의 처칠은 1953년 “정당 사이의 차이는 오늘날 실제로 주로 강조점의 차이다”라고 말했고, 1970년대 초 미국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도 “이제 우리 모두가 케인스주의자다”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복지국가 또는 복지주의가 진보의 이념적 좌표라면 우리는 이제 처칠이나 닉슨도 모두 진보로 보아야 하는가?

복지주의는 왜 진보정당의 이념이 될 수 없는가

복지국가를 이념적 지향으로 삼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또 하나의 (선의의) 착각 또는 의도적인 왜곡은 복지국가나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국가가 마음대로 채택하고 바꿀 수 있는 모델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같은 나쁜 자본주의가 될 수도 있고 복지국가 같은 좋은 자본주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모든 악은 영국과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같은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쁜 모델이 채택되었고 그것이 자발적이든, 강요에 의해서든 세계적으로 확산되어온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 동안 신자유주의 모델이 얼마나 나쁜지 드러났기 때문에 이제 복지국가 모델의 정당성이 확인되었고, 사람들이 다시 복지국가 모델을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결론부터 말하면, 복지국가의 등장과 쇠퇴,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대두는 단순히 사람들이 이쪽 이데올로기를 좋아했다가 마음이 바뀌어 저쪽 이데올로기를 더 좋아하게 되어 생긴 결과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케인스나 대처가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만들어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지국가나 신자유주의와 같은 자본주의의 축적형태 변화는 일정한 시점에서 대공황과 같은 자본축적의 위기와 그에 따른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표출되는 자본주의의 모순적 운동의 산물이다.

서구에서 케인스주의-복지국가의 등장은 한편으로 19세기 후반 이래 노동자 대중의 혁명적 진출이 계속되고 제1차,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인류사상 유례 없는 전쟁을 겪으면서 노동자계급은 물론이고 자본가들조차도 자본주의가 이대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적 차원의 계급 역관계의 변화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재건 과정에서 국가를 중심으로 한 노자간 타협을 통해 자본주의를 재건하고 개량한다는 자본가계급의 전략과 이에 포섭되어 이를 뒷받침한 개량주의적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에 의해 케인스주의-복지국가가 등장했던 것이다.

이 케인스주의-복지국가 체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선순환을 통해 이른바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열었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노자간의 타협과 국가의 역할을 통해 잘 관리될 수 있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큰 위기 없이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동안 서구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 케인스주의-복지국가는 처음부터 지속적인 자본축적이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 황금기에도 노동자계급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선 이들 서구 복지국가의 노동자 대중은 생산과정 또는 노동과정에서 생산성 제고를 지상목표로 하는 자본의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제를 수용해야 했다.

노동은 일체의 구상능력을 빼앗긴 채 기계의 작동에 부속된 단순 반복적인 소외된 노동으로 더욱 격하되었다. 그 대가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의해 뒷받침되는 안정적 고용, 상대적 고임금과 복지를 통해 대량소비에 참여하는 ‘보장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보장노동자의 소외된 비인간적 노동은 복지국가의 토대로서 지속적인 축적을 지탱한 하나의―어쩌면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지속적인 축적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백인 여성노동자 등 더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사회보장에서 소외되거나 덜 보장받는 주변화된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더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신식민주의 형태로 지속된 식민지•종속국의 노동자•민중들에 대한 초과착취와 수탈이 이러한 축적의 주요한 요소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의 전 역사에서 보면 이런 자본주의의 황금기, 즉 노자간 타협에 기반한 복지국가의 시대가 서구에서조차도 매우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고유한 모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제3세계에서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는 것에 발맞추어 서구에서도 소외된 노동과 권위주의, 사회적 차별에 항의하는 거대한 계급투쟁의 파도가 일어났다. 서구의 체제내화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운동은 단체교섭을 통해 금전적 이익을 얻어내주는 방식으로 투쟁에 떨쳐나선 노동자들의 불만을 ‘관리’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자본의 착취비용을 증가시키고 이윤율을 저하시킴으로써 축적의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자본은 계급 역관계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격렬한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이 축적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자본은 축적의 위기를 노동자의 집단이기주의와 ‘복지병’ 탓으로 돌리면서 조직된 노동에 대한 총공세에 나선 반면, 체제내화된 노동운동은 노동대중의 혁명적 투쟁 열기를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으로 모아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분열되었다.

복지국가의 해체와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10년이 넘게 수행된 이러한 격렬한 계급전쟁에서 노동자계급이 패배한 결과였다. 그 이후 한 세대 동안 자본주의는 대내적으로는 복지국가 시대의 노동에 대한 양보의 철회와 유연화된 착취형태의 강화, 공공영역의 사유화 등을 통해,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전지구적 범위에서 이른바 지구화라는 경제적, 정치•군사적 재식민지화 공세를 통해 축적의 지속성을 보장해 왔다.

매우 거칠게 돌아본 이러한 복지국가의 등장과 쇠퇴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복지국가는 자본축적의 지속성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생산의 사회화와 사적 전유를 그 특징으로 하는 계급사회로서의 자본주의의 모순은 이러한 자본축적의 지속이라는 전제를 부정한다.

복지국가가 지속되려면 노동은 자신에 대한 더 강도 높은 착취, 소외된 노동을 감수하면서 이윤 획득을 위한 자본의 축적에 스스로를 종속시켜야 한다. 더구나 사회의 일부 노동력에 대해서는 점점 강도 높은 착취가 이루어지는 대신, 나머지 노동력은 착취될 기회마저 갖지 못하는 잉여가 되어야 한다.

그 결과는 또한 과잉생산과 과소소비로 인한 공항이며, 그에 따르는 노동의 희생이다. 그런데 노동이 왜 오늘날처럼 발전된 사회의 생산력을 인간적으로 풍부한 삶을 향유하는 데 복무하도록 만드는 대신에 더 소외된 노동과 잉여노동력으로의 전락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요컨대 케인스주의-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일시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을지언정 결코 해소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것은 노자간에 이데올로기적 합의만 되면 지속될 수 있는 ‘좋은 자본주의’ 모델이 될 수 없다. 복지주의, 즉 ‘자본주의 아래서의 복지국가’가 진보정당의 이념적 좌표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현실로 돌아와 보더라도 요즘 스스로를 ‘진보’라고 이야기하는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나라당의 대선 대표주자인 박근혜도 ‘생애주기형 복지정책’을 내걸고 복지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과 3자 통합당은 근본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들은 사기라고? 보수정당은 말로만 복지를 이야기하지 실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캐나다에서 복지국가를 선도하고 구현한 것은 지금은 보수당으로 개명한 ‘진보보수당’이었다. 진보보수당! 그럴 듯하지 않는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보수정당들의 복지론이 구두선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의 정체성과 이념을 복지주의로 삼는 순간 이들 보수정당과의 차이는 정책의 차이,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게 된다.

캐나다의 진보보수당이나 요즘 민주당에서 표방하는 ‘진보’의 경우처럼 진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차용하는 건 자유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진보’를 내세우는 정당이 자본주의 아래서 고통 받고 그 고통으로부터의 궁극적인 해방을 열망하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운동체로서의 진보정당일 수는 없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운동은 여러 주•객관적 조건으로 인해 아무리 낮은 수준으로 표현되고 실천될지라도 자본주의 극복의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이 진보냐 보수냐를 가르는 최소한의 기준선이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연대는 국민참여당과 합당하면서 이 선을 넘어가고 있다. 복지주의를 전면에 내건 ‘통합진보정당 강령’이 그것을 공공연하게 표명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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