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정치의 세 가지 길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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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31일 09: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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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화는 크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권위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민주화 이행이다. 우리의 경우는 1987년 직선제 개헌이 그 전환점이었다. 둘째는 민주적 공고화라고 부르는 단계이다. 많은 정치학자들은 이 단계를 민주주의가 아닌 방법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가 사라지는 것, 혹은 대다수 정치세력이 민주주의를 정권 장악의 유일한 게임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나아가 헌팅턴이라는 정치학자는 선거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이 두 번 바뀐 것을 민주적 공고화의 지표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적 공고화 단계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민주주의’를 갖게 될 것인가가 결정되는 데 있다.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다르고 영국의 민주주의 다르며 독일, 일본, 이탈리아, 북유럽의 민주주의 다 다르다.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갖게 될 것인가?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이 문제와 관련해 어떤 생각을 갖게 하는가.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함께 대화해보고 싶다.

2.

우선 문제를 이해하는 판단의 기준, 혹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유형에 대해 먼저 말하고 싶다. (이하 갈색 부분은 필자의 저서 『정치의 발견』에서 인용한 내용임)

어느 나라나 민주주의라고 할 때, 상당 정도 공유되는 바람직한 가치나 규범을 갖는다. 어느 민주주의 국가든 헌법에는 그런 가치 합의가 적시되어 있고, 대체로 그 내용은 생명, 자유, 평등, 행복 추구로 수렴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평화로운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기본 규범 내지 가치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해 보자. 현재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는 110개 정도 된다. 이들 가운데 빈곤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낮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작은 나라는 어디일까? 투표율은 높고 인권 및 자유화 지표도 좋으며 소수자 및 이주민에 대한 권리 부여 정도도 높고 여성 장관 비율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기대 수명은 높고, 불법 약물 복용, 10대 임신, 10대 자살, 저체중아 출산율, 정신 질환 발병률, 영양실조, 비만율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후천적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나라, 즉 기회의 평등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강력 범죄율과 재소자 비율이 낮은 안전한 나라는 어디일까? 요컨대 어떤 유형의 민주주의가 되어야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국가 간 민주주의의 성취를 통계적으로 조사 연구한 성과들에 따르면, 결론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진보 정당의 경쟁력(집권 기간, 득표 경쟁력 등)이 큰 나라일수록, 다른 하나는 (보통 노조 조직률, 노사 협약 적용률, 노조의 중앙 집중화 정도로 평가하는) 노동조합의 힘이 강할수록 결과가 좋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할수록, 그리고 진보적인 정당들도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의 전망도 있는 나라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념적・계층적 대표의 범위가 충분히 넓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관심과 이익이 평등하게 고려될 수 있다. 진보 정당의 경쟁력이 낮아 집권의 가능성이 없는 민주주의를 보수 독점적 정당 체제라 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그 사회의 하층이나 약자 집단의 이해는 대표되기 어렵다.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조건 위에서 실천되고 있는데, 이때 그 사회의 민주적 성취는 노동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의 이익과 열정이 기업 운영과 노사 관계, 나아가 정당 체제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느냐에 달려 있게 된다. 노동의 시민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임금 소득에 근거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70퍼센트에 이른다. 자영업자가 비정상적으로 많아 이 정도이지, 이른바 서구 선진국의 경우 그 비율은 90퍼센트를 웃돈다. 따라서 노동을 축소해야 할 생산 비용으로 간주하거나, 하나의 독립된 집단으로서 정치 참여의 권리를 갖는 것을 불온시할 때, 그것은 단순히 노동만 배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회 다수를 이루는 하층과 약자 집단 전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은 부정적 효과를 낳게 된다.

좋은 사회, 좋은 정치란 보수정당만이 아니라 진보 정당도 집권할 수 있는 민주주의, 노동의 시민권이 기업 운영-노사관계-정당 체제의 차원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민주주의에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가진 어떤 진보적 이념 때문이라고 오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진보 없이 좋은 보수가 가능할까? 어려울 것이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경쟁하는 것이 갖는 좋은 효과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현실의 민주주의를 좋게 만들 방법이 없다. 보수와 진보가 좋은 경쟁의 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민주정치의 발전에 있어 핵심 중의 핵심이라는 것, 그것을 말하고 싶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가치나 이상과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동의 시민권이 노동조합과 진보 정당의 형태로 조직되는 것에 있으며, 그럴수록 공동체의 발전에 대한 그들의 기여와 책임성도 커진다. 그런 사회가 더 건강하고 투표율도 높고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이보다 더 확고한 사실은 없다.

박찬표 박사가 쓴『한국의 1948년 체제』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매우 흥미로운 분석이 있다.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 의회에서 노동과 관련한 의제가 어떻게 변화되었나를 분석했다. 민주화 이전까지 의회에서 야당 대표자 연설문에는 “노동자, 농민……”을 호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화만 되면 노동법도 개혁하고 분배도 개선하는 등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많이 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되면서 이런 표현과 의제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김대중, 노무현정부에 들어서 그 경향은 계속되었다. 급기야 노무현정부에서 열린우리당, 민주당 교섭단체장 연설에서는 노동이라는 단어조차 언급되지 않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달라진 것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에 성공하면서부터였다. 비정규직, 양극화, 무상급식 등 이른바 서민 의제가 제기되기 시작했고 다른 정당들의 의제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언론의 의제 구조도 영향을 받았고 급기야 양극화, 비정규직 의제를 한겨레, 경향도 쓰고 조선일보도 기사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복지는 모두의 이슈가 되었고 한때 다소 낯설었던 무상 관련 이슈들은 이후 한국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만들어낸 데까지 이르렀다. 복잡하게 이야기했지만, 말하려는 핵심은 간단하다. 진보정당이 없을 때에는 개혁적인 정부조차 노동 관련 의제에 그리 영향 받지 않았다.

자신들의 집권은 노동과 관계없이 정당하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서 노동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벗어버렸다. 그런데 비록 작은 정당이지만 진보정당이 원내에 들어간 것이 미친 물리적 효과는 대단했다. 제한적인 경험 사례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도 진보정당이 있는 민주주의와 그렇지 않는 민주주의가 어떤 차이를 낳았는지 보여주는 매우 좋은 분석이었다고 생각한다.

3.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나는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진보정당과 그렇지 않은 정당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노동 문제에 있다고 본다. 우리 삶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갈등의 구조가 자본주의라면 노동의 문제를 빼고 진보를 말할 수는 없다고 보고, 그런 노동의 열정과 이익에 기초를 둔 좋은 진보정당이 만들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결국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결정한다고 본다. 좀 더 다른 차원에서도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시민 스스로 만든 법과 제도에 시민 스스로 복종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법이나 제도가 만들어진다 해도 시민이 입법자가 아니라면 그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렇듯이 노동자도 호남도 비정규직도 여성도 농민도 자영업자도, 권력의 향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적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들은 시민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흑인 대통령의 출현이 뿌리 깊은 인종적 차별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대다수 흑인들의 시민적 자존감을 이보다 획기적으로 높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 몰려든 흑인 참석자들의 기쁨에 찬 얼굴과, 대표적인 흑인 지도자 제시 잭슨 목사의 얼굴에서 멈추지 않고 흐르던 눈물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뿌리 깊은 호남 차별의 구조나 편견을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계기는 호남 출신 대통령의 등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해서 더 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그의 당선만으로도 한국 정치에 기여한 바 크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서 지역감정의 영향력이 많이 줄었다고들 하는데,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호남 유권자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비정규직을 포함해 노동문제가 심각하다고들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부당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여러 차원의 노력이 모두 소중하겠지만,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당 내지 후보가 당선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사태 개선에 더 좋은 효과를 갖는 것은 없다고 본다. 브라질 커피도 좋아하고 그 열정적인 문화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브라질에 부러운 것 하나를 더 꼽으라고 한다면 룰라라고 하는 가난한 노동자도 정당을 만들고, 정당의 리더가 되고,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정당, 대통령이 등장한다고 해서 노동문제가 금방 좋아질 것이라고 말할 만큼 내가 순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정당이나 후보가 집권할 수 있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노동을 대표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집권할 수 없다면, 절규에 가까운 문제 제기는 끊이지 않지만 그 해결은 늘 지배적 위치에 있는 세력들의 각성과 온정주의에서 구하게 되는 종속적 심리가 계속해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할 수 있을 때, 사회적 약자 집단도 무시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온정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 시민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도 커진다.

진보도 집권할 수 있는 길, 혹은 권력의 향방에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진보 그 자체의 이념성도 중요하고 가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만큼, 정치의 길을 개척하고 넓히는 것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노선과 정치노선 사이의 일정한 실천적 균형을 만들어가는 노력 속에 진보정치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제발 더 이상은 공허한 논쟁과 헛된 감정싸움으로 스스로를 소진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

4.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과거 우리는 “노동의 정치세력화” 과제라고 표현했다. 나로서는 그 표현이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점점 그 표현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고 있는 느낌이다. 노동문제가 많이 개선되어서? 진보정당이 필요 없을 만큼 정치나 사회가 좋아져서?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데도 노동의 정치세력화 혹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길은 멀어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고 들어 온 것은 ‘민주대연합론’이다.

한때 ‘민주연합론’의 주장이 영향력을 가졌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등장과 함께 그 주장은 사라졌다. 나 역시 ‘민주연합론’의 정당성은 두 정부의 집권으로 종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 주장이 다시 불러들여졌고 거기에 ‘대연합’이라는 더 넓고 강한 주장으로 등장해서는 독자적 진보정당을 추구했던 세력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민주대연합론은 현 정부의 악정에 대한 반대와 항의의 열정을 담고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이 초점이 되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의 정치에너지는 지난 두 정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재집권 의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 주장의 정당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길을 굳이 어렵게 개척할 이유는 크지 않다. 민주당의 범위 안에 있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말 많고 탈도 많은 진보정당의 세계 안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느니 그 길이 반한나라당의 투표효과를 극대화하는 합리적인 선택일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세계 12~13위를 다투는 나라가 지난 25년간 민주주의가 중단 없이 지속되고 다섯 정권을 경험한 마당에 여전히 민주주의냐 아니냐로 고통받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남들 보기에 우습지만, 더 문제는 진보가 실력을 키우는 노력 대신 늘 남 탓하는 것에 편승해 스스로의 기회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데 있다. 한나라당 정권은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길을 희생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민주대연합을 주장하는 진보파들이 어떤 미래 구상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근거들은 반한나라당 연합전선이 대세라거나 혹은 차기 총선에서 일정한 의석수를 갖기 위해 필요하다는 실용적 논리들이다. 글쎄, 그런 측면이나 필요가 있다고는 보지만, 결국 그 미래는 미국처럼 독자적 진보정당의 실험이 좌절되고 민주당 안에 진보 블록을 형성하는 것으로 전환하면서 노동운동도 민주당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커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미국의 경우 민주당 선거 자금 가운데 노동조합이 제공하는 비율은 꾸준히 늘어 지금은 50%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진보정당 없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사대국, 경제대국을 이루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유색인 등 약자 집단들의 자유권이 가장 취약하고 재소자율과 범죄율이 높으며 투표율은 낮고 10대 임신과 약물 복용 심각한 사회라는 비용을 치르고 얻은 성취이다.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가 가져다 준 나쁜 효과는 일본과 이탈리아 사례가 잘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다.

1997년 사회당이 ‘반자민당연합’에 참여함으로써 정권교체를 이룬 일본은 그 덕분에 오랜 자민당 일당우위체제를 종식시킬 수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사회당은 독자적 역할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당으로서의 존재도 소멸했다. 그러면서 비정규직은 급격히 늘었고 빈곤 문제가 새로 등장하고 다양한 사회 해체 위기를 경험했다.

이탈리아도 다르지 않다. 이탈리아 역시 전후 기민당 우위체제를 유지해왔지만 냉전 해체와 세계화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존 정당체제가 붕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도 분해되었다. 그 결과 등장한 베를루스코니하의 이탈리아 사회는 더 불평등하고 덜 자유롭고 덜 건강하고 덜 평화롭게 되었다. 진보정당의 길이 봉쇄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민주대연합을 위해 그 길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혹자는 민주대연합 내에서 진보 블록이 결국 주도권을 잡아 진보정당화하는 길을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나는 부정적인데, (정당론의 패러다임을 만든 지오반니 사르토리가 강조하듯이 ) 지금까지 모든 나라의 정당의 역사에서 외생정당(기존 정당체제 밖으로부터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 진입하는 것)으로서의 길이 아닌 방법으로 진보정당이 만들어진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외생정당의 충격 없이 기존 정당체제가 달라질 수 있다면 정당체제 이론이 통째로 달라져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배운 정당이론을 부정할 만큼 과도한 용기나 상상력을 발휘할 생각이 없다.

아무튼 진보파가 민주대연합의 길을 가겠다면 어떻게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개척할 수 있는지 좀 더 이야기되어야 할 것 같다. 민주대연합을 말하는 진보파가 성공할 수 있으려면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주장이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기대한다.

5.

물론 진보 안에는 민주대연합이 아닌 주장도 있다. 하나는 ‘진보대연합론’이라고 부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진보정당 독자노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먼저, 전자의 진보대연합론을 보자.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범 진보가 힘을 합해 향후 중대 선거에 대처해 가야 할 것이다. 진보대연합론은 이 문제를 중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진보대연합론은 모호한 면이 많다. 내가 보기에 거기에도 상당 정도 민주대연합론의 흐름이 잠복해 있거나 혹은 민주대연합론으로의 전환 가능성도 커 보인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수는 그런 여지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치노선의 유연성 내지 전술적 고려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고려는 공천 및 선거 과정에서 기존 정당들에 대해 독자적인 연합능력과 협박능력을 더 효과적으로 발휘한다는 목표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달리 말해 진보정당의 선택 여부에 기존 정당들도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모습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진보연합세력이 이루어진다 해도, 불가피하게 집단지도체제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경우 지도부의 응집성이 약해 전략적 유연성을 가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진보연합 안에서 논란과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지도체제를 갖게 되면서, 연합을 유지하는 일 자체에 정치에너지를 소진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문제 이전에 진보대연합론이 성공하려면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분단과 재벌중심사회, 대통령중심제, 강한 국가중심사회, 강한 중앙집권사회 등을 특징으로 하는 우리 사회에서 단순다수제의 강력한 양당제 효과 속에서 진보정당이 계속 존립하려면, 제3당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나 선거제도가 지속된다면, 선택은 과감하게 제2당을 모색하는 것밖에는 없다.

비견한 예로는 영국 모델을 생각할 수 있다. 즉 자유당을 대체한 노동당 모델이 그것이다. 민주당을 대체할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현재와 같은 구조 속에서 진보대연합론은 민주대연합론과 진보정당 독자노선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도 전에 좌절될 가능성이 크고 본다.

진보 안의 연합을 유지하기도 힘든데 그것에 만족해서는 생존도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진보대연합의 길은 만만치 않은 실력과 응집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진보대연합을 하고 나서 빠른 시기 안에 지도체제를 단일화해야 할 것이고, 그것과 함께 내년 대선에서 매우 강력한 후보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내년 대선이 열어 줄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을 활용해 대중적인 진보정당으로 가는 문턱을 넘지 못하면 현재와 같은 진보대연합론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런데 진보대연합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의식이라도 갖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진보대연합의 성공 정치 전략이 무엇인지 윤리적 정당성과 현실을 갖춘 대안 논리가 빨리 나와야 할 것이다. 그것을 기대한다.

다음으로 후자의 진보정당 독자노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노선이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면 내가 보기에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 그것은 현행 단순다수제를 비례성이 높은 제도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진보이념을 멋지게 만들고 강령을 잘 만들고 선거 전략을 잘 짜도 (앞서 지적했듯 분단과 재벌중심사회, 대통령중심제, 강한 국가중심사회, 강한 중앙집권사회 등) 양당제의 효과를 강제하는 구조적 조건 및 현행 단순다수제는 제3당의 존립 여부를 어렵다 못해 불가능하게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비례대표제 도입 여부를 결정할 힘은 진보정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당들이 갖고 있다. 결국 타인의 호의에 의존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마는데, 어떤 정치 노선도 수동적인 기대에 의존해서는 잘 되기 어렵다. 어떻게 비례대표제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지와 관련해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대책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 노선은 의석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해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진보적이라는 기준에서 강한 윤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한국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는 점, 정치적으로는 점차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노선과 더불어 정치노선의 문제를 어떻게 개척해갈 지 더 깊은 고민이 뒤따랐으면 한다.

6.

어디로 갈 것인가? 혹은 한국정치에서 진보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민주대연합 내 진보블록인가 아니면 비례대표제를 통한 다당제 하에서 제3정당인가, 혹은 진보-보수의 양당제 모델로 가고 있는가?

현재로는 민주대연합이 다수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전략은 정권교체와 당선 가능한 자리라는 확실한 목표도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나타날 텐데, 가장 큰 문제는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 노동의 정치세력화 없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길을 넓힌다는 데 있다.

진보대연합론은 이를 말하는 사람들의 단결된 의지나 열정을 느낄 수 없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막연히 진보가 연합해서 내년 선거구도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상황 논리만 앞서 보인다. 민주대연합론과의 관계도 모호한데, 앞으로 이 문제는 더 민감해질 것으로 보인다.

진보대연합이 당선을 위해 결국 야권단일후보라는 프레임에 자신들도 참여하게 될 텐데, 그것이 민주대연합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고 실천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흐름은 진보의 다수가 민주대연합으로 전환하는 심리적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효과만 남기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독자진보정당론은 진보대연합론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에 비례해 더 큰 윤리적 영향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해도 진보파 안에서 정당성은 더 강하게 가질 수도 있다. 이 흐름이 계속해서 건재하게 되는 것이 진보대연합파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괴로운 일이 되겠지만,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문제는 이들 때문이 아니라 본인들의 진보대연합론의 정치노선과 진보노선의 윤리적 정당성이 취약하고 목표나 전략도 분명치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10년 지방선거 이후 한국 정치는 독자적 진보정당 없이도 잘 돌아가는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방선거에서 승리는 민주당 몫이 되었고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서도 진보정당의 존재감은 느낄 수 없었다. 민주대연합의 주장은 지속적으로 강해져 왔으며, 진보대연합의 시도는 일단 실패했다.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진보대연합파는 민주대연합파에 정치적 승패 이전에 정신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말하라면, 한국이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노동의 정치세력화)로 갈 수 있을까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 안에 있다. 그 내부로부터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지배하고 있으며, 누구도 책임 있는 지도부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진보정치의 에너지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어떤 입장에 서 있든 이 문제에 답해야 하고 다시금 열정을 갖게 하는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본다. 본격적인 논쟁과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먼저 각 입장은 자신들의 미래 구상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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