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정당이 아니라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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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06일 08: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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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혹은 부르주아계급의 집행위원회

부르주아의 역사에서 오늘날만큼 정치가 희화화와 비판의 대상이 된 적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누구든지 정치에 대해 한 마디 비판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 당한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시기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온갖 조롱을 다 받았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누구나 한 마디씩 그를 깠다.

그 반사 이익이 이명박에게 갔다. 비록 BBK가 의심스럽지만 대중들은 그의 능력을 기대했다. 그러나 취임 1년도 되기 전에 그를 상징하는 코드는 ‘쥐’가 되었다. 이명박씨가 무슨 절대적인 과오를 범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명박씨의 스캔들은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나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친미정권과 비교하면 그래도 봐줄 만하다. 정치 혐오증은 전 세계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말이다.

정치에 대한 불만을 정치인들의 무능이나 부패로만 돌리는 것은 올바른 분석도 아니고 올바른 대안을 위한 출발점도 아니다. 정치를 정치인 자체의 문제로 보려는 입장은 정치를 독립된 사회의 영역으로 단절하여 분석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방법론에 의존할 때만 가능하다. 정치는 결코 독립된 영역이 아니다. 정치를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가장 전위에 서 있는 분야로 볼 때만 오늘날의 정치의 위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앞 글에서 나는 현재의 ‘혼돈의 기원’을 자본주의의 이윤율 하락에 있다고 했다. 1980년대 이후 정치는,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로서 궁극적으로 ‘자본의 이윤율 회복’을 위한 정책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어 왔다.

혼돈의 기원과 국가의 역할

경제 구조가 ‘금융주도적 축적국면’으로 전환되자 정부는 금융을 성장시키는 것이 경제 성장에 중요한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융과 관련된 일체의 규제를 풀었다. 미국과 영국이 이를 주도했고, 신흥공업국들도 모두 이 범례를 따랐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금융중심지 건설’이나 ‘자본시장 통합법’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은 현재 경제적으로 가장 개방적인 사회다.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그만큼 높은 사회이다. 이 모든 것은 민주당 정부가 한국 사회에 남긴 흔적이다.

더불어 산업자본의 이윤율 회복을 위해 임금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 진행되었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국면에서 부르주아지들이 임금비용을 줄이려는 것은 ‘계급적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 다. 비정규직 법이나 변형시간 근로제와 같은 것을 통해 노동을 신축화 하는 것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반화 된다.

이른바 도요티즘의 세계화가 그것이다. 국가별로 약간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북유럽도 그렇게 했다. 사회복지 비용을 줄이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본의 세금부담을 줄여주는 것이다.

노조를 무력화시키는 것 또한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났다. 레이건과 대처는 노조에 대한 직접적 공격으로 이 문제를 정면 돌파 했다. 김대중 정부는 백골단을 투입하는 것보다 ‘파업에 대한 민사소송’을 통해 노조를 무력화시키는 게 훨씬 세련되면서도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도 같은 맥락에서 움직였다. 이명박 정부는 백골단 투입과 손해배상을 동시에 활용한 점에서 고전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조화시켰다. 노조가 잘 버틴 몇몇 국가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그런 나라들도 사태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보수정권만 그런 게 아니다

정치적 과정은 금융자본주의의 반동성을 더 심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윤율 회복을 위한 기업의 노력을 지원한 결과는 노동자계급 불안정의 심화였다. 정부 정책의 결과 부동산투기와 금융소득을 통한 자산소득은 훨씬 더 늘어난 반면 실질임금은 감소되고 노동자들 내부의 임금격차는 더 심화되었다. 실업자가 늘어나고 준실업자(비정규직)는 더 많이 늘어난 반면 안정적 일자리를 지니고 노조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들은 더욱 줄어들었다.

청년들은 취업이 안 되어 도서관에 죽치면서 미래를 준비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정치에 대한 불만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더 심화시키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것으로 이해했고, 정확히 그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 불안정을 더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보수반동 정권만 그렇게 했다고 착각하지 말라! 덩컨 폴 리가 썼듯이 레이건이 구상한 개혁프로그램, 그러니까 보수파의 급진주의 정책을 체계적으로 밀고 간 것이 바로 ‘미국 좌파의 지지를 받은 클린턴’이었다. 영국의 블레어는 ‘대처의 아들’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중심에 서 있는 정권이었다. 룰라는 같은 맥락에 서 있지만, 브라질 사회가 워낙 ‘개판’이어서 그나마 빈민 지원 사업(여러분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빌자면 선별적 복지)을 통해 인기를 끌고 있을 뿐이었다. 그도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했다.

2. 정치혐오증의 시대 : ‘새로운 인물’이라는 환상

어느 누가 권력을 잡는다 해도 현재의 반동적인 금융축적 국면을 구조적으로 개혁할 의사는 없는 것이다. 비록 행정부는 장악하지만 경제 관료를 장악하지 못하고, 거기다가 조직된 재벌의 영향력, 국제금융집단 및 초국적 자본의 영향 하에 있는 정치엘리트들이 이 모든 세력들과 대결하면서 민중들에게 더 유익한 정책을 펼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정치인들은 정확히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것이다. 그만큼 대중들은 절망하고 고통 받는다.

그러니 신자유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대중의 불만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인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겠다고 약속하며 권력을 장악한 이후, 정치엘리트들은 근본적으로 현재의 축적체제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만 움직였을 뿐이다.

일반 서민들, 노동자들, 취업 못한 젊은이들, 비정규직들 어느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정책을 실행했다는 말이다. 대중들은 다시 속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원한과 분노를 기성정치 엘리트 집단에 대한 증오로 대체하게 된 것이다.

정치인에 대한 불만만 커진 것은 아니다. 불안하고 절망한 젊은 세대들은 그들이 ‘주적’으로 삼은 공인들이면 누구나 가차 없이 공격했다. 연예프로그램에서 약간의 ‘이상’만 있어도 대중들은 그 프로그램을 맹공한다.

대중들이 내세우는 공격의 근거는 ‘정의’이다. 대중들은 공인, 엘리트들에게 광적으로 열광하는 만큼이나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원칙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깔아뭉개 버린다. 정의가 이렇게 사라진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정의’를 기치로 연예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우울한 풍경이다.

환상, 배신, 비판, 분노의 순환

진보주의자들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이명박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진보신당 평당원들이 보여준 당 지도부에 대한 공격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통합 과정에서 스스로를 평당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당의 지도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SKY 나온 운동권들이 평당원들을 배신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려고 통합을 추진한다는 이야기가 하루를 멀다하고 당원 게시판에 등장했다. 이런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로 인해 당 지도부는 엄청난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정치에 대한 증오가 커져갈수록, 삶이 절망적일수록 대중들은 새로운 희망을 ‘새로운 정치인’에서 찾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인물들이 베를루스코니, 탁신, 노무현, 이명박, 아르헨티나의 메넴 등이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들은 대중들에게 어떤 희망도 제공하지 못했고, 임기를 다 채우는 과정에서 온갖 욕을 먹었다. 혹은 임기가 다 되기도 전에 민중 저항에 의해 쫒겨 나거나 식물정권이 되었다.

대중들은 자신들의 염원이 단지 환상이었을 뿐임을 자각하는 순간 현존하는 정권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이 또한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이런 특징을 우리는 반정치의 문화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정치란 공동체의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정당은 권력 획득을 통해 체계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책을 통해 실현한다. 그러나 오늘날 정당들은 자신들이 대중에게 약속한 것을 지킬 수 없다. 대중들의 불만을 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정치는 사기 행각?

그러자 대중들은 기존 정당보다 새로운 인물에 대한 희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정치 그 자체는 ‘사기 행각’ 정도로 생각한다. 이런 반정치의 문화는 정치를 이성적으로 발전시키는 것도,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불만을 위로할 신기루를 찾는 것일 뿐이다.

이쯤 되면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이다. 오늘날 신드롬이 된 안철수 현상은 근원적으로 이명박에 대한 환상의 대체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안철수씨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현재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 구조 속에서, 현존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어떤 구조적인 개혁 전망을 내세워 이 위기를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혀 반대일 것이다. 그가 권력을 잡는다 해도, 2012년 불어 닥칠 위기에 대해 우왕좌왕 하다가 반동적인 금융 부르주아와 경제 관료들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이 그랬듯이 말이다. 대중들은 1년간, 2년간 희망을 품다가 또 다시 절망과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

물론 어떤 개혁적인 인물들은 이런 대중들의 욕구를 부분적으로 만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무상급식도 하고 무상보육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개혁은 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을 그 자체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불안정한 지위를 지닌 채 살되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보장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 보편적 복지라고 이야기 되는 것은 ‘잔여복지’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복지주의자들의 사기 행각은 멈춰야 한다.

3. 현 정세의 역설 : 좌파의 붕괴

그렇다면 좌파들은 뚜렷한 대안이 있는가? 간단하게 답변하면 “없다.”라고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2010년에 발간된 윤소영 교수의 강연록 『금융위기와 사회운동노조』에서 그는 ‘현정세의 역설’에 대해 언급했다. 현정세의 역설이란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심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좌파 역시 동시에 붕괴되고 있는 현상을 일컫는다.

전간기 자본주의가 붕괴되었을 때만 해도 전 세계는 좌파의 물결로 흘러 넘첬다. 소련의 재건 과정에서 스탈린의 범죄가 음으로 양으로 알려졌지만 대중들은 소련을 믿었고 각 국에서 좌파들의 활동은 무르익었다. 유럽에서 파시즘을 물리치는데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집단은 좌파게릴라였다.

1920년대 영국 수상 쳄벌레인은 복지의 필요성을 “혁명에 대한 보험”이라고 정당화했다. 영국이나 서구가 볼세비키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서구 노동자를 체제내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홉스봄의 주장대로,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레닌이 건설한 혁명국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사회주의 조국의 건설”이 아니라 “유럽의 복지국가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위기가 현재처럼 심화된 것은 1920년대 공황 때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로 갈 것이라 예상하지 않는다. 부르주아만이 아니라 나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그걸 참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의 극복은 노동자 대중운동(반체제 사회운동)과 ‘급진적 이데올로기의 해후’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오늘날은 노동운동도 붕괴되고 급진적 이데올로기의 영향도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이다.

좌파의 색깔 빼기 노력

경제위기와 함께 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체계적으로 고조되고 있지만, 좌파는 어떤 대안적 세력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좌파들은 오히려 좌파의 색깔을 죽이고 현재의 정치 질서에서 주류가 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영국 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을 배신한 것은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 독일 녹색당이 독일의 신좌파와 거리를 두고 클린턴의 ‘폭격’에 동참한 것도 에피소드꺼리조차 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 당권파가 민주당과 연정을 꾸리려는 것은 독일 사민당이 좌파당과의 연대보다 메르켈이 이끄는 우익정당과 연정을 꾸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한 때 유럽 최대의 공산당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스스로 붕괴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균열 또한 이런 세계적인 좌파의 균열과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좌파정당들은 살아남기 위해 우파와 연대하거나 아니며 스스로 지리멸렬한 세력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브라질의 룰라와 남아공의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희망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들도 권력을 잡은 후 부르주아적 질서를 체계적으로 옹호하는 세력이 되었다. 주류화에 완전 성공한 것이다. 브라질의 경우 주요 노동운동 지도자가 거의 대부분 정부에 들어감으로써, 말하자면 지도부들이 좋은 일자리를 얻으면서 노동운동의 독립성이 소멸된다. 이런 상황은 전후 영국 노동당의 모습을 연상시켜 씁쓸함을 더해 준다.

그렇다고 누군가처럼 비정규직에 ‘올인’ 하는 정당, 녹색도 함께하는 정당을 만든다면 희망이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정규직에 대항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단적 조직화, 중심에 저항하는 주변의 세력화, 탈중화된 타자들에 대한 관심은 그 자체로 정의감에서 비롯된 목표라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중심의 정당, 녹색 중심의 정당이라는 것도 구체적인 조직화의 전망, 운동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면 공문구에 불과하다. 소위 녹색좌파당 주창자들에 내가 비판적인 이유는, 이들은 ‘옳은 주장’을 하는 것이 세력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4. 운동을 복원하자

결국 좌파의 기획은 정당정치로만은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노동운동과 대중운동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노동자운동과 급진적인 이데올로기의 해후와 세력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좌파의 부활을 논하는 것은 요원하다는 말이다.

진보신당이 사회운동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여러 논자들이 말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운동의 복원 없이 정당정치가 무슨 대단할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1930년대 자본주의의 구조개혁을 밀어붙이 것도 사회주의 정당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세력이었다.

   
  ▲필자

운동이 커지면 부르주아 우파들도 구조개혁 한다. 노동운동이 힘이 있었을 때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복지국가, 영국의 복지국가가 우파들이 주도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면 노동자운동이 약화되고, 사회운동이 약화되자 사민주의 정당들은 복지를 포기하고 신자유주의를 앞다퉈 수용한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핵심은 정당이 아니라 운동인 것이다.

진보신당은 현재 독자로 남기로 한 것 같다. 진보신당 당원들이 진짜 좌파의 성장을 지지한다면, 전체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보다 진지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신당이 가치 있는 세력으로 남는다는 것은 한국의 사회운동을 위해 새로운 기획을 제시하고 함께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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